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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의 성녀, 정화의 조건
[110]
어두워졌던 시야가 다시 밝아졌을 때, 아리스텔라는 거울로 둘러싸인 방 안에 홀로 누워 있었다.
“ 여, 여기가 어디지? ”
주위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 것에 당황한 아리스텔라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을 둘러싼 거울에 그녀의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방 안에 자신뿐인 것을 확인한 아리스텔라는 한숨을 돌렸다. 적어도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던 벽화 속 사제들의 모습은 없었다. 그것만으로 일단은 안심할 수 있었다.
‘ 이곳은 지하의 숨겨진 공간이려나? ’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추리소설이나 환상소설에서 종종 나오는, 평범한 액자나 책장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밀면 안쪽에 숨겨진 통로가 나오는 트릭. 어쩌면 벽화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어 아리스텔라만 네 사람과 따로 떨어져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 내가 이곳에 들어왔으니까, 분명 나가는 문이 있을 텐데……. ’
먼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멀쩡했다. 옷이 구겨지거나 더러운 것이 묻지도 않았다.
보아하니 바닥도 깨끗했다. 정화하기 전까지 지하는 관리하는 요정이 없어 먼지투성이였는데, 방 안이 깨끗한 것을 보면 요정들이 청소라도 한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빠져나갈 문을 찾았다. 문은 보이지 않는다. 설마 문도 숨겨져 있어 일일이 거울을 밀어 살펴야 하는 것일까.
벽으로 다가가 거울을 하나씩 밀어 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특수한 방법으로 잠겨 있어, 정해진 순서대로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러면 곤란한데……. ’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아리스텔라는 위화감을 감지했다. 벽면을 둘러싼 거울 가운데 아리스텔라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 어……? ”
위화감을 느낀 아리스텔라는 가까이 다가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거울이 아니었다. 벽면을 둘러싼 네 개의 유리 너머에는 각각 다른 이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아론, 노엘, 이자크, 그리고 히페리온.
“ 대신관님! ”
아리스텔라가 유리에 손을 짚고 히페리온을 불렀지만, 그는 아리스텔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네 사람은 갑자기 사라진 성녀를 찾느라 혈안이었다. 유리 너머로 비치는 네 사람의 뒤에 보이는 풍경이 제각각인 것을 보아, 아무래도 아리스텔라를 찾기 위해 흩어진 것 같았다.
노엘은 아리스텔라를 부르는 듯 입가에 손을 모으고 뭔가를 외치고 있었고, 이자크는 주위를 이 잡듯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아론은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지만 그의 몸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설마 신성력으로 아리스텔라의 위치를 감지하려는 것일까. 처음 아리스텔라가 사라졌을 때 로이드의 방에 있던 그녀를 발견한 것도 아론이라고 들었다.
‘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야 하는데……. ’
유리벽을 두드려도 네 사람 중 누구도 아리스텔라가 유리 너머에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게 할 수 있을까.
아리스텔라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히페리온이 고개를 휙 돌려 아리스텔라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성녀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히페리온의 입모양으로 그가 자신을 부른 것을 확실히 인지한 아리스텔라는 유리에 손을 짚고 그 너머의 히페리온을 불렀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저 여기 있어요! ”
히페리온이 아리스텔라를 향해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창 너머의 소리는 닿지 않는다.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일까, 무사하냐고 묻는 것일까. 그의 입술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아리스텔라는 답답함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 대신관님, 저는 무사해요. 하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그쪽으로 넘어가면 되는지 모르겠어요. ”
과연 그가 아리스텔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짧은 단어라면 입모양으로 유추할 수 있지만, 긴 문장이 되면 구화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 한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쪽의 상황을 히페리온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아리스텔라가 초조한 마음으로 애꿎은 유리창만 두드리고 있는데, 히페리온의 표정이 점점 더 필사적이 되어간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필사적인 표정 덕분일까,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이 외치는 한 구절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뒤를 보세요!>
그 필사적인 표정과 외침에, 갑자기 소름이 쫙 끼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를 돌아본 아리스텔라는 그 자리에 굳어 섰다.
히페리온이나 아론, 노엘, 이자크의 모습이 비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했던 것 또한 거울이 아니었다. 그곳에 비치는 것은 그녀가 지하의 통로를 걸어오면서 보았던 전대 성녀들의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금발의 바르바라, 우아한 갈색머리의 힐데가르트, 키가 작고 귀여운 유지니아, 금욕적인 인상의 샤를로트, 붉은 머리에 화려한 인상의 베아트리스까지.
거울 속의 수많은 <성녀>들이 아리스텔라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 꺄아아악! 싫어어어! ”
여기저기서 뻗어 나온 새하얀 손들에 이끌려, 아리스텔라는 또 어딘가로 떨어졌다.
◇ ◆ ◇ ◆ ◇
―쿵!
“ 아윽! ”
딱딱한 바닥에 등이 부딪혔다. 아리스텔라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눈을 뜨니 조금 낮은 천장이 보였다.
작은 창문에 딱딱한 간이침대, 가구도 집기도 없는 좁은 방.
아리스텔라는 이 장소를 알고 있다. 이곳은 고해실이다.
“ 어, 어째서 내가 이곳에……? ”
몸을 일으키려던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누군가 붙잡았다. 모르는 사제였다. 아니, 모른다고 할까. 사제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다.
“ 누, 누구……. ”
자신을 바라보는 사제의 흉흉한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그 느낌에 아리스텔라는 사제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검은 머리에 금색 눈의 그는, 벽화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앗, 으……. ”
아리스텔라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며 사제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남자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성녀님. ”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느낌이 퍼져 아리스텔라가 몸을 부르르 떨자,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어깨를 붙잡았을 뿐인데 이렇게 몸을 떠시다니……. 앞으로 일어날 일이 그리도 기대되십니까? ”
“ 네, 네? ”
“ 정말이지, 음란한 분이로군요. ”
“ 꺄악! ”
사제는 아리스텔라를 간이침대에 완전히 눕히고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으로 아래로 내려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 아, 아읏! ”
“ 쓰다듬는 것뿐인데 이렇게 음란한 소리를 내시면서, 정숙하지 못하게 허리를 흔들고……. ”
“ 흐읏, 시, 싫어요……! ”
“ 신을 모시는 성녀의 몸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도 모자라, 거짓을 입에 담으시다니. ”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얼굴마저 기시감이 있었다. 남자는 아리스텔라의 허리띠를 풀고 성의를 벗겨냈다. 순식간에 남자 앞에서 알몸이 된 아리스텔라는 비명을 질렀다.
“ 꺄아아! 이러지 마세요! ”
“ 성녀님께서 죄를 인정하지 않으시니, 인정하실 때까지 당신을 벌하도록 하겠습니다. ”
“ 저는 죄를 짓지 않았어요, 저는……! 아흑! ”
남자의 손이 아리스텔라의 말랑말랑한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예민한 부위를 아플 만큼 세게 움켜쥐자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 아파요! 아파요, 제발……! ”
“ 아아, 이토록 가련하게 울면서……. ”
남자는 아리스텔라가 울면서 애원해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슴에 손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 마구 주무르다가, 손가락으로 붉은 젖꼭지를 잡고 이리저리 비틀었다.
“ 아, 앗, 아응! ”
“ 사특한 악마의 꾐에 빠져 타락하신 게지요. 틀림없습니다. ”
“ 아읏, 그만……! ”
“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녀님.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
좀 전에는 딱딱한 얼굴로 아리스텔라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이번에는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황홀한 표정으로 아리스텔라를 바라보더니, 길게 혀를 내밀어 그녀의 젖꼭지를 핥았다.
“ 하응, 아……! ”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났다. 이것은 어디에서 나는 향기일까. 그 향기를 맡자, 아리스텔라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를 밀어내려던 손에 힘이 빠지고,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 이렇게 금방 허락하시는 것을 보니, 역시 처음의 저항은 거짓이었군요. ”
“ 아니에요, 그런……. ”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몽롱해서 천장의 무늬도 흐릿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몸에 전해지는 쾌감만이 또렷했다. 남자는 아리스텔라의 다리를 들어올려,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에 살그머니 혀를 기게 했다.
“ 아, 아아앙……. ”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요염한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이 원래 이런 식으로 신음했던가, 몽롱한 와중에도 수치를 느낀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 다리를 더 벌리세요. ”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항하며 다리를 오므리려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리스텔라의 다리가 저절로 벌어졌다. 드러난 음부에 남자의 시선이 닿았다.
‘ 싫어……! ’
이것은 아마도 몇 번이나 보아왔던, 꿈일 것이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모르는 남자에게 범해지는 것은 싫었다. 게다가 이 남자는 전대 성녀인 밀리아리아를 모시던 사제가 아닌가. 설마 아리스텔라를 밀리아리아로 착각하여, 그녀에게 하던 짓을 아리스텔라에게 베풀고 있는 것일까.
“ 달콤한 냄새가 납니다. 어째서……. ”
뭔가에 홀린 듯한 목소리였다. 남자는 아리스텔라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어 올리며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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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111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