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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의 성녀, 정화의 조건
[109] 타락의 성녀, 정화의 조건
북쪽 탑의 지하는 아리스텔라가 이전 방문했던 곳과 같은 장소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끔했다. 벽돌로 지어진 축축한 지하의 벽은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다듬어져 있었고, 어두컴컴했던 뻥 뚫린 통로에는 오렌지색의 조명등이 곳곳에 놓여 있어 통로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 와아, 굉장해요. 이걸 사제분들이 전부 보수하신 건가요? ”
“ 직접 수리를 하거나 한 것은 아니고, 막혀 있던 지하의 통로에 신성력을 흘려보냈습니다. ”
노엘이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북쪽 탑의 보수공사에 참여한 사제 가운데 그의 이름은 없었지만, 노엘은 마치 제가 지하를 보수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아론과 히페리온은 침묵했고, 이자크는 얼굴을 구겼다.
“ 분명 이쪽 벽이 허물어져서 엉망이었는데, 이렇게 깨끗하게……. ”
노엘의 설명으로는, 신성한 기운이 가득한 신전은 물리적으로 파괴되거나 시간이 흘러 마모되더라도 신성력이 작용하는 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다만 이전에는 지하로 가는 길을 완전히 폐쇄하여 신성력이 지하에는 닿지 않았기에,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받아냈던 거라고.
“ 신성력은 정말 굉장하네요. 무너진 지하통로도 복원하고, 식물도 빨리 자라게 하고……. ”
“ 신성력이란 신과 소통하는 힘이고, 또한 세계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힘이니까요. ”
어두운 곳에서 빛을 밝히거나, 침대 시트로 옷을 지어내거나 하는 것도 세계를 변형하는 힘의 일부를 빌려온 것이라고 노엘은 설명했다.
창조와 변형, 그리고 유지.
그것은 아마도 생명과 평화의 신인 헤시우스의 힘일 것이다.
‘ 위그멘타르는 재앙의 여신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위그멘타르를 모시는 사제들이 헤시우스의 힘을 빌려 쓰는 걸까? ’
생명의 신 헤시우스, 재앙의 신 위그멘타르.
세계를 창조하는 신의 힘을 빌린다면 세계를 파괴하고 재앙을 퍼뜨리는 여신은 악마 혹은 이단으로서 여겨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리스텔라는 어째서 위그멘타르 또한 헤시우스의 짝이 되는, 존엄한 여신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어머. 이런 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네요? ”
“ 예. 이전 대 사제들이 기록을 남기기 위해 그려둔 것일 겁니다. ”
“ 이런 것도 복원이 되는구나……. ”
노엘의 설명에 아리스텔라는 감탄하며 통로의 벽에 그려진 커다란 벽화를 바라보았다. 몇 대 전의 성녀일까. 아름다운 금발을 늘어뜨리고 베일을 쓴 성녀의 곁에 그를 추존하는 사제들이 무릎을 꿇고 그녀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 이쪽에도 벽화가 있네요. 이건 또 다른 성녀님인가요? ”
“ 예. 이쪽의 금발머리 성녀님이 11대 성녀 바르바라, 그쪽의 갈색머리 성녀님이 12대 성녀 힐데가르트입니다. ”
“ 성녀님들의 모습을 이렇게 벽화로 남겨놓는 거군요. ”
그렇다면 아리스텔라가 꿈속에서 보았던, 검은 머리의 성녀도 어딘가에 벽화로 모습이 남겨져 있을까. 아리스텔라는 벽화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성녀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면 밝은 대성당에 벽화로 남겨도 될 터인데, 이들은 어째서 지하에 성녀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녀도, 성녀를 따르는 이들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벽화에 그려진 사제들의 시선이 새로운 주인, 17대 성녀 아리스텔라를 향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 ◇
13대 성녀 유지니아와 14대 성녀 샤를로트, 15대 성녀 베아트리스의 벽화를 구경하고 모퉁이를 돌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 지하는 1층이 아니었구나. ’
아리스텔라가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향하자, 히페리온이 옆에서 아리스텔라의 손을 잡아주었다. 조명이 있어 밝기는 충분했지만, 그의 손을 무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서 나머지 세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 2층은 생각보다 깊었다. 꽤 여러 개의 계단을 내려온 뒤에, 아리스텔라는 드디어 자신의 바로 이전 대 성녀인 16대 성녀 밀리아리아를 그린 벽화를 볼 수 있었다.
‘ 이 사람이구나. ’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로 서있던 전대 성녀들과는 달리, 밀리아리아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사제들 또한 윗층에 그려진 벽화와는 달리, 그녀의 아래에 줄을 지어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앉은 의자의 주위를 빙 둘러싼 형태였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밀리아리아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빙의되는 꿈을 꿨을 때 아리스텔라는 앞을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전대 성녀는 맹인이었을 것이다.
앞도 안 보이고 다리도 불편한 밀리아리아를 전대 사제들은 정화의 의식이라는 명분으로 매일 범했다. 그것은 아리스텔라가 꾼 꿈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히페리온이 보여준, 전대 대신관의 일기에는 그녀를 범한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참으로 지독하다.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나.
이전 대 성녀들과는 확연히 다른 벽화 속 여인의 모습에, 아리스텔라는 어쩐지 가슴이 아파왔다. 꿈을 통해 그녀를 조금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노엘. 밀리아리아 성녀님은 어떤 분인가요? ”
“ 네? 어, 음……. ”
노엘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더 이전 대 성녀에 대해서는 교재에 실려 있기에 수습사제 시절 지도사제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16대 성녀 밀리아리아는 노엘이 수습사제이던 시절의 성녀였다.
당대의 성녀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비밀이었기에, 노엘은 그녀에 대해 이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노엘보다 더 이전에 수도원을 졸업한 히페리온과 아론은 16대 성녀 밀리아리아가 사제들과 매일 성관계를 가진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히페리온은 그것을 헛소문으로 치부해 흘려 넘겼다.
“ 밀리아리아 성녀님은, 매음굴 창부였습니다. ”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아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아론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 매, 매음굴이요? ”
성녀는 당대에 성인식을 치른 순결한 처녀들 가운데, 가장 신성력이 강한 여인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창부가 성녀였다니, 아리스텔라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론의 옆에 있는 노엘도 믿기 어려운 듯 눈을 크게 뜨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역대 성녀님들 중 가장 예외가 되는 분이겠지요. 그러나 그분께 성령석이 반응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
“ 하지만 성녀가 신전에 도착하기 전에 순결을 잃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들었는걸요. ”
“ 예. 그래서 밀리아리아 성녀님께서는 이 신전에 오실 때 시력을 잃고, 더 이상 두 다리로 걷지 못하게 되셨습니다. ”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아론이 말하는 내용은 무섭고 끔찍했다. 성녀가 도개교를 지나 신전의 문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여신의 심판을 받는다. 순결한 처녀는 온전히 신을 모실 수 있지만, 순결을 잃은 여인은 여신의 저주를 받아 재액에 물든다고.
전대 성녀가 앞이 보이지 않고 다리가 불편했던 것은 병이나 사고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위그멘타르의 저주 때문이었다.
‘ 너무해……. ’
확실히 사창가의 여인에게 여신을 모시는 성녀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녀를 정하는 것은 신탁이며, 신탁은 신의 뜻이 아닌가. 제 뜻대로 성녀를 정해놓고 그녀가 순결하지 않다며 저주를 내리다니, 제멋대로인 신의 태도에 아리스텔라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보통의 신전이라면, 정숙해야 할 성녀가 순결을 잃은 거라면 또 모르지만, 위그멘타르는 음욕의 여신이 아닌가.
‘ 내 몸으로는 그런 짓을 해놓고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
그녀가 멋대로 흥분하는 바람에 아리스텔라는 그날 처음 만난 조슈아와 성관계를 가졌고, 그 뒤로 몇이나 되는 남자에게 안겼다.
비록 지금은 아리스텔라의 요구를 따라 다정하게, 그녀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과 몸을 섞고 있지만, 익숙해지기까지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혹여 자는 중에 몸 안의 여신이 깨어나 아무 남자하고나 몸을 섞지는 않을까, 미사를 보거나 산책을 하는 중에 성욕을 느껴 음란한 짓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늘 불안했다. 그 불안감은 한동안 여신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꿈속에서 성녀 밀리아리아는 제단에 누워 자신을 따르는 사제들에게 몇 번이고 범해졌다. 눈도 보이지 않고, 다리가 불편하니 도망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창가의 여인이 성녀가 되었으니 사제들이 정화의 의식을 핑계로 대기도 쉬웠을 터였다.
입으로는 성녀를 섬긴다 말하면서, 사실은 제 욕구를 채우는 일에만 정신없이 몰두하던 이들에게 매일 기절할 때까지 안겨야 했던 그녀의 일생은 얼마나 끔찍했을까.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구슬프게 울고 있었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은 아리스텔라는 울상을 지었다.
“ 밀리아리아 성녀님이 불쌍해요……. ”
신탁에 의해 강제로 성녀가 되어, 신전에 들어오자마자 강제로 시력과 두 다리를 잃고, 타락한 성녀라 매도당하며 매일 남자에게 범해지는 삶이라니. 그녀가 자살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아리스텔라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훔치고, 벽화에 그려진 밀리아리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처음 벽화를 보았을 때는 밀리아리아의 얼굴이 어쩐지 괴로운 듯했는데, 지금은 조금 평온해진 것 같았다.
그 순간, 밀리아리아를 둘러싼 벽화 속 사제들의 시선이 아리스텔라를 향해 날카롭게 빛났다.
“ 꺄아악! ”
벽화다.
그림이다.
그림이 움직일 리 없는데, 벽화 속 사제들이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이 너무나도 기분 나쁘고 끔찍해서 아리스텔라는 비명을 질렀다.
“ 성녀님! ”
뒤에서 네 남자가 아리스텔라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갑자기 온 세상의 빛과 소리가 지워진 것처럼, 온몸의 감각이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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