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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남자의 동상이몽
[108]
고향에 있을 때는 먹고 살기에 급급해서, 신전에 온 뒤로는 성녀로서 금욕과 절제를 중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아리스텔라는 제 모습을 꾸미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히페리온과 머리카락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옆머리를 땋아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머리를 땋아서 색색의 리본으로 묶어주던 것이 기억이 났다.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묶는 방법만 바꿔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며 놀았다. 마음에 드는 머리모양을 하고 뛰어가면 아버지는 <응. 예쁘네.>라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했다.
‘ 살면서 칭찬받은 일이 별로 없는데, 신전에 온 뒤로는 칭찬받는 일이 늘었어. 다들 내게 상냥하기 때문일까. ’
부드러운 브러시가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고, 아리스텔라의 물빛 머리카락 사이로 히페리온의 긴 손가락이 들어가 갈래를 나눠 땋아 내린다. 그저 머리를 빗고 땋아주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몸을 만져줄 때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기분이 되어 아리스텔라는 표정 관리를 위해 열심히 딴생각을 했다.
“ 다른 사제분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
“ 아뇨. 아름다우십니다. ”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칭찬의 말에 아리스텔라가 조용히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히페리온도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빛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늘어뜨리고, 가늘게 땋아 내린 옆머리를 새하얀 리본으로 묶은 아리스텔라의 모습은 소녀처럼 사랑스러웠다.
“ 성녀님. 정오 미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미사실로 가시지요. ”
“ 네, 대신관님. ”
히페리온이 문을 열자 아리스텔라가 생긋 웃으며 가볍게 목례했다.
◇ ◆ ◇ ◆ ◇
본래 대신관은 다른 사제들과 함께 정오 미사의 준비를 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번에는 히페리온이 성녀의 시종으로서 그녀를 보필하는 귀중한 임무를 띠고 있기에 사제들끼리 미사를 준비했다.
사제들은 아론의 지시를 받아 미사실을 정화하고 제단의 초를 커면서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 성기사의 직위도 잃은 로이드보다야 낫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신관님이 시종까지 맡으시는 것은……. ”
“ 조금 도가 지나치지 않습니까. 저희는 미사 때가 아니면 성녀님을 뵙는 것도 어렵지요. 곁에 가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
차라리 케인이나 로이드처럼 기사가 시종이라면 사제들끼리 있을 때만큼은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같은 사제, 그것도 대신관인지라 다른 신관이나 그를 따르는 사제들이 들을까 소리를 죽여 속닥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속삭인다 하더라도 아론의 귀에는 사제들의 불평불만이 전부 들어왔다.
‘ 사제와 성기사를 통솔해야하니 분명 대신관에게 막강한 권한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확실히 이번에는 대신관이 경솔했군. ’
성녀의 시종을 임명할 권한은 대신관에게 있었다.
신전 안의 최고권위자는 성녀였기에 아리스텔라가 제 시종은 제가 정하겠다며 로이드를 시종으로 삼았을 때는 아무도 불만을 말하지 못했으나, 성녀가 직접 시종을 임명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래서 성녀의 시종을 누구로 할지를 정하는 것은 대체로 대신관의 권한이었다.
이제까지 전대 성녀의 시종은 늘 사제들이 도맡아 하였으나, 대신관이 직접 시종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관은 스스로 시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물론 대신관의 업무가 막중하여 성녀의 시종 일까지 병행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시종을 선정할 권한을 가진 자가 스스로 시종이 되어서야 다른 사제에게 돌아갈 기회가 없지 않은가.
대신관은 시종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비록 계율로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모범적인 사제인 히페리온이라면 그것을 모를 리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페리온은 스스로 성녀의 시종이 되었다.
‘ 이상하군. ’
동료 사제들의 추천을 받아 신관이 된 아론은 인맥을 관리하는 일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스스로도 뛰어난 신성력을 갖추고 있지만, 사제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으려면 능력만 뛰어나서는 안 되었다.
만장일치제인 신관 승격을 위해서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아론은 남에게 밉보일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 대신관이 성기사들의 편을 든 일로 이미 많은 쓴 소리를 들었을 텐데, 어째서 그런 짓을 했을까. ’
이제까지 히페리온은 성기사들의 편을 들 때 합당한 이유를 제시했다. 불의의 사고에 재빠르게 대처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성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성기사를 그녀의 곁에 두어야 한다는 의견은 타당했다. 로이드를 시종으로 두는 것 또한 사제들은 모두 성녀의 종이니 그녀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으로 무마했다.
이제까지는 반박할 근거도,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그래서 다들 불평을 하면서도 대신관의 결정을 납득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대신관인 히페리온이 그녀의 시종을 맡아야 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없었다.
히페리온 자신의 욕심을 챙기기 위한 행동이었으니 타당한 근거가 있었을 리 없다. 히페리온은 거짓으로 꾸며내 변명하는 것 또한 하지 못했다. 사제들에게 비난받을 것을 각오할 만큼 히페리온은 절실했으나, 아론도 다른 사제들도 그의 마음을 몰랐다.
히페리온은 성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크리스가, 로이드가 부러웠다. 자신은 그들처럼 성녀에게 마음을 고백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하다못해 그들처럼, 시종으로서 성녀의 곁을 지키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살아오며 계율을 어긴 적이 없었던 대신관 히페리온의, 두 번째 일탈이었다.
“ 성녀님께서 오셨습니다. ”
입구를 지키는 성기사들의 목소리에 사제들이 얼른 자리를 잡고 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미사실의 열린 문으로 히페리온과 아리스텔라가 들어왔다.
그저 나란히 선 것뿐으로 손을 잡은 것도 어깨를 안은 것도 아니건만,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주인과 종도, 성녀와 대신관도 아닌 연인처럼 보였다. 제단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그림 속의 부부 같았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과 히페리온을 바라보는 사제들의 시선에 아리스텔라는 조금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 ……기분 탓인가? 나를 보는 시선이 평소랑은 좀 다른데. ’
기분을 내서 옆머리를 땋아달라고 한 것이 실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숙해야 할 성녀가 속세의 여인처럼 머리에 치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 안 좋게 보였을까.
그저 옆머리를 땋아 내리고 성의와 같은 색의 하얀 리본을 묶은 것뿐인데 이것만으로 이런 반응이라니, 앞으로는 꾸미지 말고 단정한 모습으로 미사에 참석해야겠다고 아리스텔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 ◆ ◇ ◆ ◇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정오 미사를 마치고, 약속한 대로 북쪽 탑의 지하를 살피기 위해 나왔다. 히페리온과 아리스텔라의 뒤에는 세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아론과 노엘, 그리고 이자크였다.
대신관인 히페리온이 성녀의 시종으로 있으니 사제들의 대표로서 아론이, 그 수행인으로서 노엘이 동행했다. 정화를 마쳤다는 보고를 올렸으나 성녀와 대신관 단둘이 보내서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기사단에서도 힘을 쓸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성기사 대표로 이자크를 보냈다. 처음에는 케인이 직접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기사단장으로서 기사단을 이끌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 굳은 얼굴로 물러났다.
‘ 그냥 지하의 보수가 잘 되었나 보러 가는 것뿐이잖아. 이렇게 여러 명을 데리고 다녀야 할 이유가 있나? ’
아리스텔라는 그녀보다 한 발 앞서 길을 안내하는 히페리온의 뒷모습을 흘긋 보고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따라오는 세 사람의 모습을 살폈다.
노엘은 본래도 그렇게 키가 큰 편이 아니지만, 장신에 체격도 좋은 아론의 옆에 있으니 더욱 작아 보였다. 길게 땋아 내린 붉은 고수머리를 달랑달랑 흔들면서 따라오는 노엘은 정말로 강아지 같았다.
동글동글한 인상의 노엘이 푸들이라면, 딱딱한 인상의 아론은 셰퍼드일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리스텔라의 뒤를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거구의 로이드나 케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론의 체격은 사제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눈에 띄었다. 오히려 기사인 이자크보다도 건장했다.
대미사 준비를 위해 아침에 그녀를 찾아와 목욕을 도왔을 때 이후로, 아론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 꿈속에서 만난 적이 있긴 하지만……. ’
꿈속에서 정화의 의식을 치르고, 갑자기 풍경이 뒤바뀌면서 아론이 나타났다. 겨우 한 번 얼굴을 본 남자와 꿈속에서 그렇게 몸을 섞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미쳤나 봐.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붕붕 젓고는 그 옆의 이자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뭔가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 이자크는 로이드를 무척 존경했으니까……. ’
그동안은 로이드가 시종이었기에 매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수련을 하느라 곁을 떠난 탓에 존경하는 그를 만날 수 없어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넘겨짚고 고개를 다시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중앙 건물을 지나 북쪽 탑으로 향하는 회랑의 양쪽으로는 키가 큰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익숙해진 탓일까, 처음엔 살풍경하게만 느껴졌던 신전의 정원이 아름답게 보였다.
“ 신전에는 정말 키가 큰 나무가 많네요. ”
“ 위그멘타르 신전이 세워진 지도 오래되었으니까요. 이 신전이 세워질 무렵에 심은 나무는 벌써 수백 살은 되었을 겁니다. ”
뒤에서 따라오던 노엘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 그때 심은 나무는 엄청 굵겠네요? 다른 분들은 보신 적 있나요? ”
“ 저쪽에 보이는 나무가 그것입니다. ”
아론이 가리킨 곳에는 너비가 아리스텔라의 키만큼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저렇게 커다란 나무는 고향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 굉장히 크네요……. ”
경이로운 것을 본 듯 감탄하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에, 노엘이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 신전의 공기는 식물의 생장을 빠르게 하거든요. 같은 세월을 보낸 다른 나무들보다도 더 굵을 겁니다. ”
“ 그렇군요. ”
“ 같은 식물을 키우더라도, 신전에서는 꽃도 더 일찍 피고, 열매도 더 빨리 맺힌답니다. ”
“ 그럼 열매를 따는 것도 일이겠네요……. ”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떠올리며 아리스텔라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골렘과 요정들이 관리하고 있다고는 해도 근 70명의 인원이 평생을 살아야 하는 곳인데, 청소나 빨래는 그렇다 치고 이 인원이 먹을 요리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재료의 조달도 큰일일 것이다.
정기적으로 필요한 물자를 실은 무인 마차가 드나드는 모양이지만,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얻으려면 밖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안에서 자생하는 것을 캐는 편이 효율이 높았다.
‘ 그럼 사제들과 성기사들도 나무에서 과일을 따거나 밭을 일구거나 하는 건가? ’
한 번도 그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설마 그것마저 골렘과 요정들의 일일까.
확실히 히페리온이나 아론이 밭일을 하는 모습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이자크는 검술이면 모를까 농장 일에는 젬병일 것 같고, 노엘은 밭일을 시키면 짜증을 내면서 요령을 부릴 것 같은 타입이다.
‘ 신전 생활에 익숙해지고 마법을 더 능숙하게 쓰게 되면, 이곳에 과수원을 차릴까. ’
사제들은 기도와 정화, 기사들은 훈련과 순찰로 서로 일하는 분야가 다르니 소통할 구석이 없는 것이다. 함께 밭일을 하거나 열매를 따면 공통분모가 생기니 친해지기 쉽지 않을까.
‘ 다들 노동의 기쁨을 알게 해줘야지. ’
사제들이 알면 질색할만한 생각을 태연하게 하면서, 아리스텔라는 콧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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