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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남자의 동상이몽
[107] 여자와 남자의 동상이몽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어둠 속에서도 파르스름한 신전의 공기 덕분에 주위가 어슴푸레하게 보이긴 하지만, 새벽녘의 푸른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 때의 빛깔은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오늘은 히페리온과 함께 북쪽 탑의 지하가 제대로 정비되었는지 살피러 가기로 했다. 간밤에 로이드와 몸을 섞은 일 때문에 피로하여 늦잠을 자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몸 상태는 멀쩡했다.
‘ 처음에는 섹스하고 나면 다음날에도 몸이 나른하고 밑이 저릿저릿했는데, 이제는 정말 익숙해진 것 같아. ’
그렇게 격렬하게 몸을 섞어놓고 개운한 기분이 들다니, 정말로 욕망에 길들여진 몸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아리스텔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오늘부터는 로이드를 볼 수 없겠지……. ’
로이드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수련을 해야 한다며 시종에서 물러났다. 그런 그를 아리스텔라는 붙잡을 수 없었다.
성녀는 그의 주인이니, 그녀가 명령으로 붙들어둔다면 로이드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 지위와 권력을 휘두르며 저를 따르는 이들의 행동을 강제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를 존중하고 싶었다.
비록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강제로 범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녀의 곁에서 시종으로 일하는 동안 극진히 보살폈다. 아직 기사단에 복귀시킬 정도는 아니라도, 원하는 대로 하도록 배려해주고 싶었다.
‘ 로이드가 돌아왔을 때는, 나도 어엿한 성녀로서 그를 맞이하고 싶어. ’
아리스텔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내린 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창문을 열자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폐 속까지 청량해지는 느낌이었다.
‘ 앞으로는 새벽마다 마법 연습을 해야겠어. ’
노엘에게 신성마법을 배우고 있지만 아리스텔라는 아직 초보자였다. 손끝에서 빛의 구슬을 만들어내는 것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그것으로 재미있는 모양을 만들어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는 것도, 히페리온처럼 물건을 만들어내 모두를 놀라게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목표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아리스텔라는 창문을 열고 신선한 새벽바람을 느끼며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의 발치에는 작은 조명등이 있었다. 이 정도의 밝기로 빛의 구슬을 키우는 연습을 하기로 한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고 손끝에 신성력을 모았다.
따끈따끈하고 보들보들한 빛의 구슬이 손안에서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갓 태어난 병아리를 안아든 듯한 느낌. 아리스텔라는 눈을 뜨고 손안의 빛의 구슬을 살폈다. 처음에는 약간 노르스름한 빛이었는데, 지금은 색은 더 옅어졌지만 빛은 더 밝아졌다.
아리스텔라는 빛의 구슬을 공중에 띄우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 떨어진 채로 구슬에 시선을 집중했다. 제 몸의 신경을 타고 흐르는 신성력이 온몸의 모공을 타고 흘러나와 그 구슬을 향해 모여드는 것 같았다.
‘ 이것이 노엘이 말하던 연결된 느낌일까. ’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눈을 깜박인 다음, 빛의 구슬이 커다랗게 확장되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러자 실제로 빛의 구슬이 커지면서, 제 안의 신성력이 빨려나가는 느낌에 아리스텔라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 읏……! ”
갑자기 신성력을 빼앗긴 아리스텔라는 휘청거리다가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리스텔라의 신성력을 빨아들여 커다랗게 변한 빛의 덩어리는 시전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반짝반짝한 빛의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 아……. ”
아리스텔라의 입에서 아쉬운 듯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신성력을 모아 형체화하는 것은 어떻게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수업 중에는 노엘이 집중력을 기르는 훈련을 하겠다며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문득 그때의 감촉이 떠오른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붕붕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처음부터 능숙해질 수는 없겠지. ’
어느덧 해가 떠서 하늘이 밝아진 것을 확인한 아리스텔라는 침대 맡의 종을 울렸다. 맑은 종소리가 대롱을 타고 흘러 떨어졌다.
로이드가 시종을 그만둔다고 했으니, 후임에게 인수인계를 했을 것이다. 새로운 시종은 누가 될까. 그녀의 시종이었던 크리스나 케인이 맡을까, 아니면 모르는 다른 사제나 성기사일까.
사제들의 아침은 그녀보다 빠르니 벌써 다들 일어났을 것이다. 성기사들의 기상 시간도 이를까. 혹 자신이 시종의 잠을 깨운 것은 아니길 바라며 아리스텔라는 거울을 보고 머리를 빗어 차림새를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똑똑. 종을 울린 지 오래지 않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텔라는 문가로 걸어가 직접 문을 열어주며, 오늘부터 자신을 보필할 새로운 시종에게 인사를 건넸다.
“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부터 잘 부탁……, 어머나! ”
“ 좋은 아침입니다, 성녀님. ”
성녀의 방문 앞에 서있는 것은 대신관 히페리온이었다. 시종을 불렀는데 어째서 방문 앞에 대신관이 와있는 것인지 아리스텔라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대신관은 그녀에게 용무가 있어 들른 것이고 시종은 올라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는 표정을 고치고 살짝 눈을 내리깔며 인사를 건넸다.
“ 대신관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 북쪽 탑의 지하를 살피러 가는 것 때문에……? ”
“ 그것도 있습니다만, 성녀님의 아침 준비를 도우러 왔습니다. ”
믿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아리스텔라의 새로운 시종은 정말로 대신관 히페리온인 것 같았다.
“ 대신관님이 제 시종인가요……? ”
“ 예, 그렇습니다. ”
“ 저기, 하지만 대신관님은 그러니까……. 신전의 관리자시잖아요. 제 시종으로 일하기엔 할 일이 많으실 텐데……. ”
히페리온은 로이드로부터 성녀의 시종을 그만두겠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정직 당황했다.
성녀의 시종은 사제들에게도 무척 영광된 자리다. 크리스가 아리스텔라와 함께 밤 산책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일로 잠시 성기사인 케인에게 시종을 맡겼을 때 사제들의 반발이 얼마나 대단했던가.
성녀가 직접 로이드를 시종으로 삼은 뒤에는 감히 성녀의 앞에서 불만을 말하지 못할 뿐 회의 때마다 로이드를 쫓아내야 한다며 열변을 토하던 사제들이 한 가득이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시종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다니, 히페리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로이드로부터 <성녀를 제대로 보필하기 위해,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와 성녀가 어떤 감정의 교류를 하고 있는지, 어떻게 밤을 보내고 있는지 히페리온은 몰랐다. 그러나 진지한 눈으로 히페리온을 바라보는 로이드의 눈빛을 보고, 히페리온은 로이드가 진심으로 아리스텔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다. 그것은 히페리온 또한 같은 여자를 사랑하고 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의 편린일 것이다.
마음속 깊이 감정을 감추어둔 채 사랑한다는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비열한 겁쟁이인 자신과는 달리, 로이드는 최고의 성기사였으니까.
분명 그는 아리스텔라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그녀를 안고 싶다고 마음을 전했을 것이다. 고백은커녕 성녀와 초야를 치렀던 일조차 말할 용기가 없는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히페리온은 로이드의 용기와 결단력이 부러웠다.
“ 성녀님.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이 신전 안의 그 어떤 것도 성녀님을 보필하는 일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사제와 성기사를 전부 통솔하며 신전의 관리까지 맡아야 하는 히페리온으로서는 성녀의 시종 일까지 함께 하기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사제들이 그렇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녀의 곁을 지킬 수는 없을 터였다.
‘ 단 하루라도 좋다. ’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고 싶었다. 성녀를 보필해야 하는 시종 일을 맡으면서 제 욕심만 채우려는 태도에 히페리온은 자조했다. 그러나 사제답게 욕심을 버리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여신 위그멘타르는 탐욕의 여신이 아닌가. 그녀를 모시는 사제가 욕망에 몸을 던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히페리온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합리화했다.
“ 성녀님. 목욕을 하시겠습니까? ”
“ 네? 아니, 저……! ”
아리스텔라는 당황해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얼굴을 붉혔다. 비록 함께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히페리온은 이 신전의 대신관이었다.
아무리 성녀가 주인이고 사제가 종이라 할지라도, 밖에서 나고 자란 아리스텔라에게 히페리온은 여전히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는 귀한 존재였다.
그가 아무리 성녀의 종을 자처해도, 아리스텔라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처럼 히페리온의 앞에서 편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벗은 몸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텔라는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았다.
“ 저, 목욕은 간밤에 하고 잤거든요! 아침에 바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
“ 그렇습니까? ”
“ 네. 그래서, 어……. ”
히페리온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를 굴리던 아리스텔라는 문득 시야에 들어온 거울을 가리켰다.
“ 아! 머, 머리를 빗겨 주시겠어요? ”
“ 예, 알겠습니다. ”
대신관인 그에게 머리를 빗겨달라는 요구 또한 되바라진 요구라고 생각했으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적어도 옷을 벗고 맨몸을 보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화장대 앞의 의자에 앉았다. 희고 우아한 손이 브러시를 집어 들더니, 아리스텔라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모아 쥐어 천천히 빗어 내렸다.
‘ 우와아아……. ’
케인도 제법 빗질을 잘하긴 했지만, 히페리온의 손길은 정말로 우아하고 섬세했다. 히페리온 또한 아름다운 긴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빗질에는 익숙할 것이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히페리온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찰랑거리며 윤이 났다. 모발에 힘이 없어 차분하게 가라앉은 제 머리와는 확실히 달랐다.
“ 대신관 님은 머리카락 관리를 어떻게 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머리가 긴데도 한 번도 엉키는 것을 못 본 것 같아서요. ”
“ 머리를 감고 빗질을 하는 것 외에 딱히 관리는 하지 않습니다만. ”
“ 정말요? 굉장하다……. ”
아리스텔라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거울 속의 히페리온을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귀족적인 풍미의 로이드나 야성미가 느껴지는 케인, 풋풋하고 어린 티가 나는 크리스와는 달리 히페리온은 그야말로 조각 같은 미남이었다.
완벽할 정도로 아름답기만 한 얼굴이 오히려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을 준다고 할까. 조슈아의 인상은 친근했는데, 히페리온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때조차 어딘가 신비로움이 있었다.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다가가기 어려웠지만, 지금처럼 그의 모습을 마음 놓고 감상할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은 아니리라. 아리스텔라는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거울 속의 히페리온을 바라보았다.
‘ 내 머리가 신기한가? ’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거울에 비친 아리스텔라의 시선에 어쩐지 쑥스러워진 히페리온은 살짝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내리깔았다.
수도원에서는 모범생으로, 신전에서는 유능한 성직자로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지만, 외모에 대한 칭찬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금 당혹스럽고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묶지 않아도 거슬리지 않아 풀어 내린 채로 내버려두었던 제 긴 머리를 처음으로 눈여겨보았다. 확실히 가느다란 아리스텔라의 머리카락과는 달리 제 것은 굵고 힘이 있었다.
‘ 나는 성녀님의 머리카락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동경하기에 그러는 것일까. ’
어쩐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따끈따끈한 무언가가 간질거리며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히페리온은 빗질을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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