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03화 (10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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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욕망의 미로

[103]

아리스텔라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돌의 방을 뛰쳐나왔을 때, 로이드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에게 사정을 묻자니 표정이 말이 아니고, 돌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노엘의 멱살을 잡자니 저만치 먼저 뛰어가는 성녀의 뒤를 쫓지 않으면 안 된다.

로이드는 하는 수 없이 방 안의 노엘과 크리스를 흘깃 보고는 아리스텔라를 쫓아 뛰어갔다.

“ 성녀님! ”

로이드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한참을 정신없이 뛰어가던 아리스텔라는 남쪽 탑을 빠져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하아, 하아……. ”

“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

그녀의 몸에 손을 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이드는 차마 아리스텔라를 안아 일으키지 못하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아리스텔라의 상태를 살폈다.

“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방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

“ ……아뇨……. ”

마법 수업을 한다고 해놓고서는 노엘과 방에 틀어박혀 이런 짓을 한 것을 로이드가 알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아리스텔라는 불편한 심정을 토로할 상대가 없어 한숨을 흘렸다.

‘ 이럴 때는 차라리 로이드가 아니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나……. 아니, 아예 친하지 않은 사람이 시종이었으면 좋았을걸. ’

제 이기적인 생각에 환멸을 느낀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가로저은 뒤 손바닥으로 눈가를 비볐다. 눈물을 닦아내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덕분에 눈가가 빨갛게 되었다.

아침에 보였던 기운 없는 모습 이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성녀의 모습에 로이드는 애간장이 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은데, 그것을 물었다가는 아리스텔라가 다시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수업이 조금, 힘들어서요. ”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이는 아리스텔라의 표정은 무척 힘겨워 보였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로이드에게 질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로이드는 속으로 걱정을 삼키며 손수건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눈가를 손으로 비비시면 눈에 좋지 않습니다. 이것을 사용하시지요. ”

“ 고마워요……. ”

이미 눈물을 닦기는 했지만, 아리스텔라는 로이드로부터 손수건을 받아 한 번 더 얼굴을 닦았다.

“ 미안해요, 로이드. 아침에 상담을 받을 때부터 내내 밖에 세워두기만 해서. ”

“ 아닙니다. 성녀님을 기다리는 것이 제 일이니까요. ”

그녀에게 속사정을 물을 수 없다면, 최대한 편하게 해주는 것이 시종의 일이었다. 로이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리스텔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 제 손을 잡고 일어나시지요. ”

처음 아리스텔라가 알몸으로 로이드의 방에 뛰어 들어갔을 때, 그는 분개하여 아리스텔라를 마구 몰아붙였다.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 하자 넘겨짚고 화를 냈다.

그러나 지금은 아리스텔라를 걱정하면서도,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일을 구태여 캐묻지 않는다. 궁금하고 걱정되는 것을 속으로 삼키면서, 그녀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려주려는 거겠지.

로이드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이것이 원래 로이드의 모습이었던 걸까. 아리스텔라는 그의 자줏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네……. ”

로이드의 손을 잡고 일어난 아리스텔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건지, 기사단이 있는 서쪽 하늘의 끝자락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간다.

“ 로이드. 기사단의 저녁 훈련에 참가하기로 했죠? ”

“ 성녀님의 몸이 우선입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

“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

방으로 돌아가 혼자가 되면, 또 아까의 일이 생각나 혼자서 울지도 모른다.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던 아리스텔라는 로이드가 저녁 훈련에 참가하기를 바랐다. 북적거리는 기사단, 혈기 넘치는 기사들이 훈련에 매진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녀도 근심을 잊고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 ◇

케인은 로이드가 저녁 훈련에 참여하는 편이 연무장의 분위기 전환과 성기사들의 사기 증진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실로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로이드가 대련에 나서서가 아니라, 성녀 아리스텔라가 제 시종인 로이드의 훈련을 관람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 성녀님께서 보고 계신다. ’

그 사실은 성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매일 한 번 있는 정오 미사. 그것도 집행관 클로비스가 결계를 깨뜨린 이후로는 인원을 반으로 나누어 교대로 순찰을 하느라 이틀에 한 번 밖에 미사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런 성기사들에게 매일 저녁 있는 훈련에 성녀가 참관하러 온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였다. 순찰을 마치고도 쉬지 못하게 하는 고된 훈련이 제 주인과 함께하는 영광된 자리로 변모했다.

평소에는 얼른 훈련을 마치고 씻고 방에 들어가 드러누울 생각이 만만해 꾀죄죄한 모습으로 훈련장을 어슬렁거리던 이들마저 순찰을 마치자마자 너나할 것 없이 목욕을 하고 단정하게 차림새를 가다듬고 갑주까지 반질반질하게 손질한 뒤 훈련에 나왔다.

사정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그저 오늘은 저번과는 달리 성기사들의 차림이 말끔한 것으로 보아 순찰이 별로 힘들지 않았나보다 하고 넘겨짚었다.

“ 다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아요. 훈련이 힘들겠지만 열심히 하세요. ”

성녀의 형식적인 인사에도 성기사들은 가슴이 뛰었다. 고귀한 제 주인이 이런 연무장까지 찾아와 인사를 건네고,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마치 신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전사가 된 기분이었다.

의욕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성기사들을 보며, 케인이 뿌듯한 심정으로 아리스텔라에게 말을 건넸다.

“ 다들 의욕이 상당하군요. 성녀님께서 와주신 덕분입니다. ”

“ 저는 검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걸요. 훈련에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

“ 성녀님께서 저희를 봐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성녀는 성기사들의 주인인데, 주인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히려 부담이 되지 않을까.

일꾼들이 일을 잘 하는지 감시하는 관리인이 달가운 존재일 리 없다. 물론 성기사와 성녀의 관계는 일꾼과 관리인의 관계와는 다르겠지만, 상전이 이런 곳에 나와 멀뚱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 뭔가 상이라도 주는 게 좋으려나? ’

성녀에게는 사유재산이 없었다. 그러니 훈련에 임하는 성기사들에게 뭔가 물질적인 혜택을 주기란 어려웠다.

신성 마법을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면 뭔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선물할 수도 있겠지만, 빛의 구슬을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수준이니 히페리온처럼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 으음, 그럼……. ”

오늘 아리스텔라는 미사에 불참했다. 미사는 여신을 찬양하는 것과 동시에 여신에게 축복을 받는 의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성녀가 참석하지 않았으니, 오늘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축복을 나누어받지 못한 셈이었다.

“ 오늘 훈련의 우승자에게, 축복을 내려줄게요. ”

아리스텔라의 말 한마디에, 성기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한 연무장의 분위기에 아리스텔라는 딸꾹질을 할 것 같았다.

‘ 내,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

축복을 나눠받는 것과 성녀가 축복을 내려주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성녀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이 일반적인 의식이었다. 그러나 성녀가 직접 입을 맞춰 축복을 내려주는 것은 그녀의 종에게 큰 영광이었다.

성녀의 입맞춤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성기사들은 처음으로 성녀에게 직접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의욕을 불태웠다. 그리고 로이드와 케인은 자신 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성녀가 키스하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살기 가득한 눈빛을 띠었다.

‘ 뭐야. 몰라……. 무서워! ’

성기사들이 왜 이렇게 살기등등한 눈빛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리스텔라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한발 물러났다.

◇ ◆ ◇ ◆ ◇

성기사들이 분발했지만, 결국 결승전은 이번에도 로이드와 케인이 치르게 되었다.

짧은 은발에 귀족적인 분위기의 로이드와, 긴 금발을 하나로 묶고 있는 전장의 용사 케인. 거구의 두 기사가 마주선 주위로는 두 기사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탈진해서 쓰러진 성기사들이 가득했다.

‘ 훈련이 원래 이런 거였나……? ’

로이드 혼자서 서른 명의 성기사를 상대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지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가 보면 훈련이 아니라 전쟁터에라도 다녀온 줄 알 정도로 성기사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온힘을 다해 싸우고도 승리를 거머쥐지 못한 낙오자들은 의욕을 새하얗게 불태운 채로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 저기, 다들……. 괜찮아요? ”

“ 허억, 헉……. 성녀님……. 저희는, 괜찮습니다……. ”

마치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모습으로 에른스트가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괜찮지 않은 것이 분명했지만 살기등등한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까지 로이드와 케인의 승률은 비슷했다. 실력으로는 로이드 쪽이 우월하지만 케인은 상대의 약점과 그날의 몸 상태, 주위환경을 고려해 전략을 짜는 노련함으로 실력 차이를 커버했다.

저번 훈련에서는 케인이 일부러 손을 늦춰 로이드에게 승리를 선물했으나, 이번에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기사의 적은 어디까지나 마수 혹은 신의 위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적국의 병사였다. 같은 성기사끼리의 결투는 명예를 더럽힌 경우가 아닌 한 인정받지 못했다. 아무리 진검으로 겨룬다 한들 훈련은 훈련. 두 사람은 이제까지 전력으로 맞붙었던 적이 없었다.

누가 이길 것인가.

두 사람이 진심으로 힘을 겨루는 것을 보는 것은 아리스텔라뿐 아니라 다른 성기사들에게도 처음이었다. 성기사들은 훈련에 진이 빠져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옛 기사단장과 현 기사단장의 승패를 주시했다.

“ 크윽……! ”

성기사 서른 명을 상대로도 지치지 않았던 로이드가 케인에게 패배했다.

로이드가 대련에서 케인에게 진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승패는 반반이었으니 케인에게 승리했다고 해서 뿌듯함을 느끼지도 않았고, 진다고 해서 자존심을 다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실력이 녹슬지 않도록 감을 다지는 훈련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의 입맞춤을 받기 위해 사력을 다한 진검승부에서 졌다는 사실은 로이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훈련에서 실수로 신입 병사에게 밀렸다 하더라도 이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이드는 제 손을 떠나 바닥에 꽂혀버린 은색의 검을 보고는 망연자실했다.

“ 성녀님. ”

격렬한 전투로 묶은 머리가 풀려, 케인의 금발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케인은 손바닥으로 땀을 닦아 대충 머리카락을 넘기고는, 아리스텔라의 앞으로 척척 걸어와 허리를 굽혔다.

“ 성녀님께, 승리의 영광을 바치겠나이다. ”

“ 케인……. ”

지난 번 훈련에서는 로이드가 이겼으나 원래 두 사람의 승률은 비슷했다고 하니 이번에 케인이 이겼다고 해서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와 케인을 비롯해 성기사들이 훈련에 임하는 눈빛이 지난번 훈련과 차원이 다른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했다.

“ 으음, 저……. 케인, 승리를 축하해요. ”

“ 감사합니다. ”

“ 약속한 대로 축복을 내려줄게요. 케인, 자세를……. ”

거구의 케인을 상대로는 까치발을 떠도 그에게 키스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라는 의미로 살며시 손을 뻗었는데, 케인은 그 자리에서 아리스텔라의 손을 잡아챘다.

“ 케인? ……읍! ”

단단한 팔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았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제 품으로 끌어당겨, 케인은 아리스텔라에게 입을 맞췄다.

여신에게 은총을 받을 때는 그녀보다 낮은 자리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케인은 무릎을 꿇지 않고, 아리스텔라를 안아 올리지도 않고 허리를 굽혀 그대로 입을 맞췄다.

그것은 성녀에게 은총을 받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에게 키스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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