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02화 (10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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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욕망의 미로

[102]

오늘은 성녀가 노엘에게 신성 마법 수업을 받는 두 번째 날이라고 들었다. 조슈아에게 신성력을 안정시키는 치료를 받은 크리스는 서둘러 동쪽 건물을 빠져나와 남쪽 탑으로 향했다.

수업 시간에 늦지 않도록 시간표를 짰건만, 성녀가 조슈아를 찾아와 상담을 받으리라고 생각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성녀의 상담이 길어진 탓에 크리스의 치료도 그만큼 늦춰졌고, 결국 수업의 끝 무렵에나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 분명, 돌의 방에서 기초수업을 한다고 하셨지……. ’

서둘러 돌의 방을 찾은 크리스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로이드와 또다시 마주쳤다.

‘ 저 거만한 남자가 또……. ’

‘ 저 맹랑한 녀석이 또……. ’

로이드와 크리스는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가볍게 목례를 나누었다.

“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

“ 노엘 사제님으로부터 마법 수업의 조교로 일하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

“ 아까 조슈아 신관의 치료실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 않나. ”

“ 설마 여기서도 당신이 문 앞을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성녀님도 아니고, 시종인 당신에게 제가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

크리스의 당돌한 말에 로이드는 말문이 막혔다. 저보다 한참이 작은데도 기죽는 일 없이 똑바로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맹랑한 수습사제. 그 크리스가 노엘의 조교가 되어 아리스텔라의 마법 지도를 돕는다니, 시종인 그로서는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수습사제라고는 해도 그가 굳이 이런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로이드는 크리스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가에서 비켜섰다.

“ 감사합니다. ”

“ 음. ”

로이드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온 크리스는 아직 수업을 한창 받고 있을 아리스텔라와 노엘을 향해 인사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성녀님. 노엘 사제님. ”

그런데,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무리 봐도 마법 수련을 하던 중이 아닌 것 같았다. 크리스는 방의 한중간에서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며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의아함에 눈을 깜박였다.

“ 성녀님……? ”

“ 크, 크리스? 여긴 어쩐 일이에요? ”

아리스텔라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몸을 가렸다. 이미 성의를 입고 있는데도 무심코 가슴을 가리며 몸을 돌린 것은 반사적인 행동이리라.

성녀의 반응이 평소와 다름을 눈치챈 크리스는 노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노엘은 모르는 척 회피했다.

‘ 노엘 사제님. 대체 뭘 하고 계셨죠? ’

‘ 수업. ’

크리스가 아리스텔라에게 들리지 않도록 입모양만으로 질문을 건네자 노엘은 뻔뻔스럽게도 수업을 하고 있었노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마법 시연을 보인 것도 아리스텔라에게 연습을 시킨 것도 맞으니 수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제가 한 말이 진실만을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없었다.

뻔뻔한 태도와는 달리 차마 크리스를 마주보지 못하고 애매하게 시선을 돌리는 노엘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크리스는 아리스텔라를 향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 오늘부터 제가 조교가 되어 마법 수업을 돕게 되었어요. 조슈아 사제님께 치료를 받느라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

“ 네? 크리스가 조교라고요? ”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와 노엘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요. ”

“ 노엘 사제님께서 어제 허락을 해주셨거든요. 아까는 미처 말씀을 못 드려서……. ”

“ 노엘. 제게 조교를 두겠다는 말을 왜 하지 않았나요? ”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의 말을 자르며 노엘에게 물었다.

아무리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아직 마법 수업의 도중이니 노엘은 그녀의 스승이었다. 수업의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지도받는 대상인 아리스텔라에게 말도 없이 조교를 임명하고, 그 사실을 통보조차 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배임이었다.

“ 예? 아니, 저기……. 마, 말하려고 했습니다. ”

성녀는 크리스와 친한 것이 아니었나. 반쯤 크리스의 협박에 걸려 들어가 허락한 것이지만, 크리스를 조교로 삼은 일을 아리스텔라가 문제 삼을 줄 몰랐던 노엘은 당황했다.

아리스텔라는 무시당한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누군가에게 감시받는 상태에서는 수업을 할 수 없다며 그녀의 시종인 로이드를 내쫓은 것은 노엘이 아닌가. 그런데 크리스를 조교로 삼으면서 그녀에게 허락을 구하기는커녕 일언반구도 없이 수업 중에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크리스가 뒤늦게나마 돌의 방을 찾아올 것을 알고서 몸을 겹쳤단 말인가. 만약 행위의 도중에 크리스가 들어왔다면 어쩔 뻔했나. 아리스텔라는 아찔해졌다.

“ 말로는 내 종이라고, 내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사실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군요. ”

“ 성녀님? ”

“ 나는 노엘을 믿고서 로이드를 내보내고, 이 안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나는 당신을 존중했는데, 당신은……. ”

“ 예? 아니, 성녀님. 저는……. ”

아리스텔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리다가 몸을 돌려 돌의 방을 나가버렸다.

“ 성녀님? 성녀님! ”

모처럼 아리스텔라의 곁에서 일할 수 있으리라 여겨 들떴던 크리스는 그녀가 나가버린 문을 보고 벙쪄서 눈만 깜박거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노엘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 노엘 사제님! ”

“ 아오, 깜짝이야! 왜 나한테 소리를 지르고 그래? ”

“ 성녀님께서 울면서 나가셨잖아요! 노엘사제님께서 뭔가 잘못하신 거 맞죠? ”

“ 야, 잠깐. 크리스! 너……! ”

대뜸 자기부터 의심하는 크리스의 눈초리에 노엘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크리스에게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성적인 방면에서는 몰상식해도 그 외의 방면에서는 노엘도 상식인이었다. 성녀와 몸을 겹친 일이 타인에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걸 안다면 행동도 자제했으면 좋을 일이지만, 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본능대로 행동해버린 남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했다.

“ 어휴, 몰라. 마음대로 생각해라. ”

“ 그럼 노엘 사제님이 성녀님을 욕보였다고 히페리온 대신관님께 고해도 되나요? ”

“ 미쳤냐! ”

크리스의 당돌한 지적에 노엘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잔소리는 많아도 꼼꼼하고 말을 잘 듣는 크리스였다. 필기노트를 몰래 훔쳐 쓴 일로 조교로 삼아달라며 협상을 할 때만 하더라도 이 녀석이 만만찮아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노엘도 몰랐다.

‘ 크리스가 변했어! ’

노엘이 현실에 안주하며 제자리걸음을 하던 사이에 사랑의 아픔을 겪고 훌쩍 성장해버린 크리스는 어느새 그를 당혹스럽게 하는 위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서열이 뒤집힐 위기에 처한 노엘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한 크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 로이드가 성녀님을 능욕한 일로 처형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혔던 일은 기억하시죠? 성기사도 아니고, 사제 중에서 계율을 어긴 낙오자가 나왔다면 보통 일이 아니에요. ”

“ 나, 낙오자라니! ”

노엘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다.

“ 무슨 근거로 내가 로이드 녀석과 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데? 증거 있어? ”

확인사살을 하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식식 성을 내는 노엘의 반응이야말로 바로 그 증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물질적인 증거는 없었다. 증언을 할 아리스텔라도 도망쳐버렸다.

아리스텔라와 몸을 겹쳐본 남자라면 알법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제들 앞에서 수습사제인 크리스가 성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고할 수도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싶었던 크리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 노엘 사제님. 저희들은 성녀님의 종이잖아요. 그분을 곤란하게 해서도, 괴롭혀서도 안 돼요. ”

그녀를 강제로 범하고 괴물이 되어 신전의 종들을 죽이려 했던 크리스가 입에 담을 소리가 아니었으나, 내막을 알 리가 없는 노엘은 그저 크리스의 지적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 우웃……. 알았어, 알았다고. ”

“ 내일 성녀님을 보시면 사과하시는 거예요? ”

“ 거, 참. 잔소리는……. 알았다니까! ”

노엘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크리스의 시선을 피했다.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절제하는 삶을 사는 데는 익숙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고 숨기고 싶은 부분을 들켜서 기분 좋은 인간이 있을 리 없었다. 인지하고 감내하는 고행과, 예상치 못하게 양심을 찌르는 지적은 따끔함의 정도가 달랐다. 노엘은 제 잘못을 지적받는 것을 싫어했다.

‘ 하여튼 크리스 녀석은 아직 어리니까 저렇게 원론적인 말만 하는 거야. 성녀님의 몸을 만져봤더라면 저 녀석도 정신없이 빠졌을걸. ’

노엘은 아직도 소년처럼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크리스를 흘깃 보고는, 피식 웃었다.

‘ 그래. 이 녀석이 여자에 대해서 뭘 알겠어. 앞으로도 크리스가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돌봐주는 것이 선배인 내가 할 일이지. ’

성녀의 몸은 물론이고 성지식과 섹스에 대해서도 크리스가 자신의 한참 선배라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노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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