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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수업시간
[98] 두 번째 수업시간
노엘이 아리스텔라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두 번째 수업시간이 되었다. 성기사 출신인 로이드를 불편해하는 노엘 때문에 아리스텔라는 이번에도 로이드를 돌의 방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본래는 크리스가 노엘을 돕는 조교가 되어 수업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리스텔라가 조슈아를 찾아가 상담하느라 시간이 지체된 탓에―과연 그것을 상담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알 수 없지만―크리스가 조슈아에게 치료받는 것도 늦춰졌다.
‘ 크리스가 늦어서 다행이다. 성녀님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크리스 녀석이 선생 자격이 없다며 대신관님께 일러바칠 지도 모르니까. ’
노엘은 크리스로부터 치료를 받고 나서 돌의 방에 도착하면 수업이 한참 진행된 후일 거라는 보고를 받고 안도했다.
노엘은 자신을 챙겨주고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크리스는 편하고 좋았지만 그에게 잔소리하고 만만치 않게 구는 크리스는 어려웠다. 서로 간에 친밀한 것이 이럴 때는 좋지 않았다.
정식 사제와 수습사제 간에는 분명 넘볼 수 없는 간극이 있었으나, 예민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노엘이 사실 허당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크리스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 설마 갑자기 들이닥치진 않겠지? ’
노엘은 굳게 닫힌 돌의 방의 정문을 힐끔거리며 칠을 꼴깍 삼켰다. 편한 동생에게 졸지에 약점을 잡혀버린 꼴이 된 노엘로서는, 크리스가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성녀를 가르치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래야 한창 수업 중에 도착한 크리스 앞에서 성녀를 가르치는 제 유능한 모습을 증명하고, 선배이자 그를 이끌어주는 지도사제로서의 위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노엘, 수업 시작은 안 하나요? 아까부터 계속 문 쪽만 쳐다보시고. ”
“ 예, 예? ”
“ 로이드는 밖에 있으라고 명령을 내렸는걸요. 이쪽에서 부르지 않는 한은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
“ 그, 그렇지요. 으음. ”
분명 늦을 거라고 했으니, 아직 크리스가 도착하려면 여유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해왔다. 노엘은 오늘 아리스텔라에게 신성력을 구체화한 빛으로 물건의 형태를 만드는 법을 가르칠 셈이었다.
“ 지난 시간에는 신성력으로 빛의 구슬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드렸지요? 이번에는 구슬이 아니라 빛으로 물건의 형태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
“ 우와……. ”
노엘의 말로부터 히페리온이 침대 시트로 자신의 성의를 만들어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 아리스텔라는 기대감에 들뜬 표정을 지었다. 저를 따르는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리스텔라의 목적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원하던 마법을 배우게 된 아리스텔라는 반짝반짝한 눈으로 노엘을 바라보며 그를 보챘다.
“ 가르쳐 주세요, 노엘. 저, 열심히 배울게요. ”
“ 흠흠. 그러면 먼저 제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
노엘은 가슴 위치에서 왼쪽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펴고는, 손 위에 빛의 구체를 띄웠다. 여전히 노엘의 머리카락을 닮은 붉은 구체였다.
그는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빛의 구체의 한쪽 면을 끌어올렸다. 마치 녹은 치즈를 막대로 퍼서 쭉 늘였을 때처럼, 빛의 구체가 노엘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으로 늘어났다.
“ 와아. 모양이 변했어요! ”
“ 이제부터 물건의 형태를 만들 겁니다. 성녀님, 무엇을 만들어볼까요? ”
“ 네? 음……. 토끼가 보고 싶어요. ”
토끼인가. 어쩐지 그녀를 닮은 소동물이다. 노엘은 손가락을 휘휘 움직여 빛의 실로 토끼 형태를 그려나갔다. 작고 동그란 몸통에 머리위로 솟은 두 개의 길쭉한 귀, 짧은 앞다리와 긴 뒷다리, 그리고 동그란 눈.
노엘의 손끝이 그려나간 모양대로 빛의 구체를 늘여 만든 실 안쪽이 신성력으로 차올랐다. 작은 토끼 모양으로 붉게 빛나는 노엘의 신성력을 본 아리스텔라는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 굉장해요, 노엘. 너무 예뻐요! ”
신성력으로 물체는 만들 수 있어도 살아있는 생명체는 만들 수 없었다. 그저 신성력으로 토끼 형태의 빛 뭉텅이를 만든 것뿐인데, 아리스텔라는 마치 진귀한 보석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두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기뻐했다.
“ 흠. 그렇습니까? 별 것 아닌 술법입니다만. ”
아리스텔라에게 칭찬을 받은 노엘은 기분이 좋아져 실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크리스가 옆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잘난 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순진한 성녀와 둘만 있을 때 실컷 제 자존감을 채워두고 싶었던 노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뭐, 성녀님도 노력하시면 저처럼 능숙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 ”
“ 열심히 노력할게요.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 주세요, 노엘. ”
“ 예. 그럼 먼저 지난 시간에 배운대로, 성녀님의 신성력으로 빛의 구체를 만들어보세요. ”
“ 으음……. ”
아리스텔라는 양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눈을 감았다. 노엘은 눈을 뜨고 한쪽 손만 올리고도 신성력을 빛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아직 형태화에 익숙하지 않은 아리스텔라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바른 자세를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손안에서 따끈따끈한 빛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아리스텔라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지난 시간에 열심히 익혀둔 덕분인가, 이번에는 아리스텔라가 눈을 떠도 빛의 구슬은 사라지지 않았다.
“ 이제 이 빛의 구체를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겁니다. 머릿속에 어떤 형태로 만들지 상상하면서 손끝으로 움직여 보세요. ”
“ 으음, 이렇게요? ”
구체를 한손 위에 올려놓은 채로, 아리스텔라는 노엘이 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물감을 퍼서 캔버스에 칠하듯, 빛의 구체를 손끝으로 늘여서 허공에 토끼를 그려보았다.
“ 읏……. 자, 잘 안 돼요……. ”
“ 손가락만 움직인다고 다가 아닙니다. 손끝에 신성력을 모으시고, 형태화한 빛의 구슬을 원하는 방향으로 잡아당긴다고 생각하세요. ”
“ 으음……. ”
빛의 구체를 만드느라 정신이 온통 그곳에 가 있는데, 그 상태로 또다시 손가락 끝에 신성력을 모아 구체의 끝을 잡아당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으으. 어렵네요……. ”
노엘처럼 자유자재로 빛의 실을 늘릴 수 없었던 아리스텔라가 만든 것은 토끼가 아니라, 그저 한쪽 방향으로 뿔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이상한 구체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하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대개는 신성력을 빛으로 화하는 기초수련에만 몇 달이 걸리고, 그것으로 형태를 만드는 데에는 또 몇 주의 훈련이 필요했다.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났음에도 성녀가 될 정도로 월등한 신성력을 지닌 아리스텔라였기에 요령을 알게 된 것만으로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엘은 아리스텔라에게 그녀의 신성력이 몹시 탁월하며, 보통의 사제에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신성 마법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노엘 자신이 기초훈련에 상당히 시간이 걸린 타입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 성녀님께서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잘 못하시는 것 같네요. ”
“ 네. 요령을 아니까 빛의 구슬을 만드는 건 쉬운데……. 다른 쪽 손끝에서 신성력을 모아 유지하는 건 좀 어렵더라고요. ”
“ 신성력을 형태화하는 것은 많은 집중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잡념을 지우려면 정신수련도 같이 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
“ 정신수련이요? ”
방에 틀어박혀 면벽수련을 하는 것을 말하는 걸까? 답답한 것도 지루한 것도 싫어하는 아리스텔라는 노엘이 정신수련을 말하자마자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평소엔 그저 온순하고 조용한데, 때로는 과감하고 똑 부러지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가 하면 별것도 아닌 마법에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며 눈을 반짝이고, 싫은 것을 상상하면 지금처럼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한다.
대미사 때는 가련하고 청초하게만 느껴졌던 성녀가 뜻밖에도 표정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자, 노엘은 호기심이 일었다.
“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비우는 훈련도 있지만, 성녀님께는 몸을 움직이는 쪽이 더 맞을 것 같군요. 자, 이 위로 올라가 보세요. ”
노엘은 돌의 방 한쪽 벽에 붙어있는 동그랗고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그 위에 올라가라는 것일까. 아리스텔라가 조심조심 바위 위로 올라가자, 노엘이 발끝으로 동그란 바위를 슥 밀었다.
“ 꺄아! ”
동그란 바위가 흔들리자, 아리스텔라는 넘어지지 않도록 양팔을 붕붕 저으며 균형을 잡아야 했다.
다행히 뒤는 벽이라 바위가 데굴데굴 굴러가지는 않았다. 마치 흔들다리처럼 끼익, 끼익 하고 흔들릴 뿐이었다.
“ 노엘, 뭐 하는 거예요? ”
“ 바닥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집중해 빛의 구체를 만들 수 있다면, 몸을 움직이면서도 신성력을 원하는 대로 다루실 수 있을 겁니다. ”
“ 하, 하지만 이대로는……. 균형을 잡는 것만으로 벅찬 걸요. ”
“ 먼저 빛의 구체를 만들어 보세요. 익숙해지면 어렵지 않습니다. ”
아리스텔라는 습득이 빠르니 요령을 알면 흔들리는 바위 위에서도 정신을 집중해 빛의 구체를 만들 수 있을 터였다.
비록 아리스텔라를 칭찬하는 일에는 인색했지만, 그녀의 실력을 알아보는 눈은 있었던 노엘은 그렇게 생각하고 아리스텔라에게 어서 빛의 구슬을 만들어보라 지시했다.
“ 앗, 아으……. ”
흔들리는 바위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아리스텔라의 가녀린 몸이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바위 위에 올라가느라 노엘보다 시선이 높아진 탓에, 노엘의 눈높이에서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와 말랑한 가슴이 흔들리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 이거 좀 위험한걸……. ’
아직도 그녀의 말캉한 살의 감촉을 잊을 수 없었던 노엘은 얼굴이 붉어진 것을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렸다.
아리스텔라는 흔들리는 바위 위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손끝에 신성력을 모아 빛의 구체까지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 노엘이 그녀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도 몰랐다.
양손을 가슴에 모으는 것도 할 수가 없어 손을 공중에 휘저으며 어떻게든 신성력을 모은 탓에,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반짝반짝한 빛의 실이 흔들렸다.
“ 으응, 이걸……. 잡아당겨서, 이렇게……. ”
구체를 띄우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던 아리스텔라는 그냥 양손 끝에 신성력을 모아 늘어뜨린 빛의 실을 서로 묶어 형태를 만드는 쪽으로 방법을 바꿨다.
먼저 신성력을 형태화한 뒤 거기서 모양을 잡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신성력을 엮어 모양을 만드는 것은 더욱 상급의 응용마법이었으나 그런 것을 알 리가 없는 아리스텔라는 기다란 빛의 실을 엉망으로 얽어 형태를 잡아나갔다.
토끼보다는 해파리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 노엘……! 아무리 해도 원하는 모양이 안 나와요……! ”
아리스텔라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를 높이는 것을 들은 노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눈앞에 추욱 늘어진 노란 빛의 해파리를 보고 기겁하며 몸을 떨었다.
“ 우와앗! ”
화들짝 놀란 노엘이 무심코 바위를 걷어차는 바람에, 벽을 맞고 튕겨나온 바위가 앞으로 굴러왔다.
“ 꺄아악! 노엘! ”
“ 우왁! ”
― 콰당!
흔들리는 바위 위에서는 어떻게든 균형을 잡을 수 있었지만, 굴러가는 바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까지는 무리였던 아리스텔라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고, 노엘은 비명을 지르며 제 쪽을 향해 날아오는 아리스텔라를 피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다가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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