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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리는 사랑의 행로
[97]
조슈아의 진료실은 사제들이 왕래하기 쉬운 동쪽 건물의 3층 중앙에 있었다. 그 아래층에는 신관들의 회의실이 있고, 1층에는 기도실이 있다.
복도를 지나며 마주치는 사제들이 아리스텔라에게 인사하자, 그녀도 답례 인사를 하며 내려왔다. 때때로 사제들이 로이드를 보고 떫은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감히 성녀의 앞에서 그녀의 시종을 트집 잡지는 못했다. 로이드는 뒤통수에 닿는 따가운 시선을 흘려 넘기며 아리스텔라에게 넌지시 물었다.
“ 성녀님. 이제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치료가 상당히 길었는데……. ”
“ 안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
“ 예? 아닙니다! ”
아무리 궁금하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는 것은 큰 실례다. 그것은 성녀의 시종이 아니라 평범한 귀족집의 하인으로서도 금물인 행동이었다.
비록 진료실 안에서 그녀의 달콤한 신음이 들렸을 때는 기사도고 귀족의 예의범절이고 뭐고 다 날려버리고 엿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하필이면 크리스가 함께 있던 탓에 행동을 자제했다. 로이드는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던 일은 싹 배제하고 결론만을 고했다.
“ 저는 성녀님을 모시는 시종입니다. 성녀님께서 제게 말씀하기를 원치 않으시는데, 엿듣거나 뒤를 캐내 알아낼 정도로 치졸한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
“ 원치 않는 건 아니지만요……. ”
로이드는 아리스텔라가 알몸으로 그의 방을 찾아갔을 때, 그녀의 몸에 가득했던 정사의 흔적을 보고 분노했다. 반성을 하는 중이라고는 하더라도, 아리스텔라가 하루 사이에 케인과 조슈아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분명 질투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리스텔라는 이상하게 아침때처럼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조슈아로부터 모두의 마음을 받아들이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일까.
‘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구나. ’
고민으로 무거웠던 마음이, 원하는 대답을 듣자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에게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제 마음을 편하게 하는 조슈아의 대답을 놓지 못했다.
“ 로이드. ”
“ 예, 성녀님. ”
“ 저는 당신이 계속 제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
어차피 그들은 이 신전에서 평생 나갈 수 없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해주길 바랐다.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욕심이지만, 음욕과 탐욕의 여신을 품은 그녀로서는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성녀님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
“ 정말이죠? ”
“ 제 영혼에 맹세코. ”
그녀의 모습을 비추는 깊은 자줏빛의 눈동자와, 오늘따라 한층 낮고 부드러워진 음성. 로이드의 대답에 안도한 아리스텔라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그의 손을 잡았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 ◆ ◇ ◆ ◇
“ 성녀님, 산책을 나오셨습니까? ”
“ 아, 히페리온 대신관님! ”
계단을 내려오자 기도실에서 나오던 히페리온와 마주쳤다. 아리스텔라가 반갑게 인사하자, 히페리온은 그녀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 오늘 미사에 불참하셨기에 걱정했습니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
“ 이젠 괜찮아요. 멋대로 미사에 빠져서 죄송해요. ”
“ 성녀님의 몸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희들의 일은 염려하지 마시길. ”
히페리온의 대답에 아리스텔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따스한 햇살처럼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그 눈빛은 요염함을 띠고 있었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가슴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히페리온과 관계를 가진 지 며칠이나 지났다. 보통 사람이라면 몰라도, 음욕의 여신을 품은 몸으로는 그 기간 동안 아무와도 관계를 가지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터였다.
히페리온의 귀에 들어오는 사고가 없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아리스텔라는 스스로 제 안의 여신이 폭주하지 않도록 성욕을 잘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여기서 <통제한다>는 것은 그저 참는 것이 아닌 적절한 방식으로 욕구를 푼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리스텔라의 생기 넘치는 표정에서 그녀의 상태가 확실히 안정되어 있음을 느낀 히페리온은 안도하는 한편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 성녀님은 어떤 남자와 관계를 가지는 걸까. ’
사제들의 행동반경은 정해져 있다. 사적으로 성녀를 찾아갔더라면 그의 귀에도 소식이 들어왔을 텐데, 특별히 들리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렇다면 밤 시중을 드는 것은 곁에 있는 시종인 로이드일까. 아니면 다른 성기사일까.
‘ 어차피 나는 아닌 것을, 알아서 무엇을 어쩌려고 이러는지. ’
히페리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스텔라가 요구한다면 언제든 밤 시중을 들겠다 말했지만, 그녀는 히페리온에게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시종을 맡았던 다른 이들처럼 그녀와 사적으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조슈아처럼 아리스텔라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주위에 그녀를 연모하는 남자가 많은데, 마음을 고백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다가서지도 않는 히페리온을 아리스텔라가 필요로 할 리가 없었다.
그날 두 사람이 몸을 섞었던 것은 우연히 알몸의 아리스텔라를 발견한 것이 히페리온이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만약 히페리온이 아니라 다른 누가 그녀를 발견했더라도, 아리스텔라는 그 남자와 몸을 섞었을 테니까.
‘ 다른 누구라도……. ’
성녀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자신과의 관계를 특별하게 여겨주길 바라는 것도, 유치한 욕심이다. 그의 집착과 소유욕은 표현하는 순간 성녀에게 독 이외의 것은 되지 않을 것임을 히페리온은 알고 있었다.
“ 성녀님께서 기분이 좋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혹 문제가 있으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
“ 네. 고마워요, 대신관님. ”
신전의 주인인 성녀와, 그녀를 보필하기 위해 사제와 성기사를 통솔하는 대신관. 어쩌면 가장 여신의 현신에 가까이에 있어야 할 남자는 지금 그녀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아리스텔라와 잠자리를 가지고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다른 사제와 성기사는 앞으로도 늘어갈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기회가 오더라도 히페리온은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그녀를 독점하고 싶다는 추악한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입 밖에 낼 용기는 없었다. 그녀에게 경멸당하는 것도 두려웠다.
오히려 제 마음을 인정하고 아리스텔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저주하며 괴물이 되어 폭주했던 크리스 쪽이 그보다는 훨씬 솔직했다.
아리스텔라는 크리스를 겁쟁이라고 불렀지만 진짜로 비겁한 것은 아직까지 그녀에게 진실도 진심도 고하지 못하고 있는 히페리온이다.
히페리온은 진심으로 크리스가 부러웠다. 그토록 솔직하게 제 욕망을 표현하고, 그녀의 앞에 제 가장 수치스러운 진심을 내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 성녀님. ”
“ 네? ”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히페리온은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할 진심을 속으로 삼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북쪽 탑 지하의 무너진 계단을 모두 보수했습니다. 공기도 완전히 정화되어, 신전의 기운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니 괴물이 나타나는 일도 없을 거라고 합니다. ”
“ 어머, 정말요? 다행이네요! ”
“ 내일 점검을 하러 갈 예정입니다만, 함께 가시겠습니까? ”
“ 네, 좋아요. ”
밝게 웃어 보이는 아리스텔라의 미소를 보고 히페리온은 가슴이 뜨끔했다.
저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면 언제라도 마음이 따뜻해져야 할 터인데, 어째서 이토록 가슴이 아픈 것일까. 바라보는 것만으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쿡쿡 쑤셨다.
“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성녀님. ”
“ 네, 대신관님.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목례를 하고 물러났다. 로이드가 그녀를 따라 인사하고는 히페리온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 아. ”
그대로 방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아리스텔라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몸을 돌려 걸어왔다.
“ 성녀님? ”
“ 오늘도 당신에게 여신의 은총이 함께 하길.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오른손을 들어, 그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제가 먼저 축복을 드린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서요. ”
아리스텔라가 생긋 웃어 보였지만, 히페리온은 그녀에게 답례도 감사의 인사도 건넬 수 없었다.
“ 내일 뵈어요, 대신관님. ”
그 자리에 완전히 얼어붙어버린 그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다시 목례를 하고는 총총 걸음을 옮겨 로이드에게 다가갔다.
로이드는 아리스텔라의 행동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시종인 그의 처지로서는 성녀에게도 대신관에게도 뭐라고 할 수 없었는지, 어색하게 이쪽과 저쪽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따라갔다.
아리스텔라와 로이드의 뒷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도 한참 동안, 히페리온은 복도에 우두커니 선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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