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93화 (9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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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93]

“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

진료실을 찾아온 아리스텔라를 마주한 조슈아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긴 갈색머리를 뒤로 묶고 안경을 낀 조슈아는 갑작스러운 성녀의 방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정중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미사 때에 늘 얼굴을 보기는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랜만이다. 장소가 진료실이기 때문일까, 새하얀 신관복을 입고 있는 조슈아는 정말 의사처럼 보였다.

‘ 이곳에서 치료를 하는 거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네. ’

조슈아는 아리스텔라를 진료대에 눕게 하고는 안색을 살피고 손목의 맥을 짚었다. 싱숭생숭한 기분 탓에 표정이 미묘할 뿐, 성녀의 몸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성녀를 걱정하는 로이드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녀의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돌려보내서는 납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손을 잡고 간단한 문진을 시작했다.

“ 성녀님, 어딘가 불편한 곳이 있으신지요? ”

“ 아뇨, 없어요. ”

“ 몸이 무겁거나, 머리가 어지럽거나 하지는 않으시고요? ”

“ 음……. 아뇨, 이제 괜찮아요. ”

새벽에 케인이 잠을 깨웠을 때는 기운이 하나도 없고 시야도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몸도 말짱하고 시야도 깨끗했다.

“ 무기력하거나, 기분이 우울하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

“ 우울한 건 아니에요. ”

형식적인 문진이지만, 아리스텔라의 손을 잡고 있는 조슈아의 손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리스텔라가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자, 안경 너머에서 조슈아의 연녹색 눈동자가 잠시 방황하다가 눈가를 부드럽게 하며 다른 한손도 마저 그녀의 손등 위에 겹쳤다.

“ 근심이 있으신 듯하군요. ”

조슈아의 말에 아리스텔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리스텔라는 조슈아로부터 로이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렸다.

“ 근심도 쌓이면 병이 됩니다. 혼자서 천천히 생각하며 속을 푸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

“ 조슈아……. ”

“ 괜찮으시다면, 성녀님의 고민을 제가 나눌 수 있을까요? ”

아리스텔라와 두 번, 아니 세 번이나 육체관계를 맺고도 여전히 사제다운 경건한 태도로 그녀를 대하는 조슈아다. 그는 아리스텔라에게 욕구가 쌓일 때면 주저하지 말고 다른 남자를 불러 욕구를 풀라고 말했다. 아리스텔라가 제아무리 음란한 모습을 보여도, 조슈아는 절대로 그녀를 경멸하지 않을 것이다.

‘ 조슈아라면, 털어놓아도 괜찮을지 몰라. ’

아리스텔라에게는 그녀의 상황을 인지하고, 객관적인 대답을 들려줄 제삼자의 조언이 필요했다.

대신관인 히페리온에게 시시콜콜한 연애상담을 하기는 어렵고, 성기사를 싫어하는 노엘이나 로이드를 맹신하는 이자크에게는 더욱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사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늘 조용히 지켜봐주는 조슈아라면, 자신을 향해 고백한 세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녀를 질책하지 않고 들어줄 것 같았다.

“ 조슈아……. ”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로이드와 조슈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달싹거리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보고, 조슈아는 아리스텔라가 로이드 앞에서 속내를 말하기 껄끄러워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 로이드, 성녀님과 상담할 동안 나가 있어주세요. ”

“ 저는 성녀님의 시종입니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

“ 듣는 귀가 많으면 성녀님께서 편하게 말씀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

마치 로이드가 성녀의 고민을 어디에 퍼뜨리기라도 할 거라는 듯한 어조에 로이드는 자존심이 상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건드리지 말라며 대화를 거부한 성녀가 조슈아에게는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 내게는 들려주기 싫다는 건가. ’

시종은 성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보필한다. 당연히 성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도 그여야 했고, 성녀가 가장 의지하는 것도 그여야 했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닐까 걱정하여 진료실로 데려왔다. 그런데 시종인 로이드에게는 내내 속내를 말하지 않던 아리스텔라가 조슈아의 상담에는 응하려는 것을 보고, 로이드는 속이 상했다. 그녀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의 신뢰조차 얻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

로이드는 자신을 향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아리스텔라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진료실을 나갔다. 노엘이 성녀와 단둘이 아니면 수업을 할 수 없다며 버럭 소리쳤을 때보다, 조슈아가 조용히 말한 한 마디가 더 강력했다.

달칵.

진료실을 나간 로이드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조슈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로이드가 자리를 피해주었기 때문인가, 그녀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편해 보였다.

“ 로이드 앞에서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인가 보군요. ”

“ 네……. ”

“ 로이드와 관계가 있는 일입니까? ”

조슈아의 질문에 아리스텔라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

어떤 말부터 꺼내면 좋을지 몰랐던 아리스텔라는 제 솔직한 심정부터 털어놓기로 했다.

“ 조슈아, 기억해요? 제가 정신이 나가서 당신을 찾아가 관계를 가졌던 날……. ”

그날 성녀는 여신 위그멘타르에게 의식을 빼앗겨, 기도실에서 반성을 하고 있던 크리스와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는 복도를 배회하다가 마주친 조슈아에게 다가와 관계를 요구했다.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착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무거웠던 아리스텔라의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 욕구를 참기 힘들면,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잖아요. ”

“ 예. 그리 말했습니다. ”

“ 하지만 저는, 그…….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어요. ”

그녀치고는 노골적인 단어 선정에 조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아리스텔라의 손을 꼭 잡았다. 제가 말해놓고도 부끄러웠는지,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붉히며 당혹스런 목소리로 말을 수습했다.

“ 그렇잖아요? 그런 건 결혼한 부부나, 연인끼리……,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하는 거잖아요. ”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나, 축제에서 만난 남녀가 애정 없이 흥미만으로 하룻밤 몸을 섞고 헤어지는 관계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그런 관계는 싫었다. 성녀라는 여자가 정욕에 미쳐 아무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린다니, 비록 그리 긴 인생은 아니었지만, 아리스텔라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성녀인 그녀가 명령한다면 사제와 성기사들은 거부하지 않고 따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마음 없이 육체관계만을 나누는 것은 싫었다.

“ 크리스도 로이드도, 그리고 케인도 저를 사랑한다고 마음을 전해왔어요. 그런데 저는, 제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어요. ”

“ 성녀님. ”

“ 바보 같죠? 제 마음인데……. 스스로 원해서 섹스하고 싶은 상대조차 고르지 못한다는 게……. ”

이제까지 아리스텔라의 삶에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동생이 태어나고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에는, 어리광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도와 세 사람이 먹고 살도록 일을 도와야 했다. 그 밖의 선택지는 없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연애와 결혼은 먼, 남의 이야기였다.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그녀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어머니도, 남동생도 그녀에게 남자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만 아리스텔라는 스스로 제 삶에서 욕심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집을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오고, 무뢰배들에게 납치를 당했다가 돌아온 후에는, 아버지의 빚을 갚고 어머니와 남동생을 편히 살도록 하기 위해 성녀가 되어 신전으로 들어왔다.

강요가 아닌 선택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늘 자신에게 하나뿐인 선택지가 주어졌다고 생각했고, 책임을 피하는 것을 혐오했던 그녀는 그 선택지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신전에 와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여러 개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차라리 마음의 무게가 달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로이드도 크리스도 케인도, 방식은 다를지언정 모두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명을 선택하고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일은 아리스텔라를 괴롭게 했다.

어쩌면 마음을 거절당한 두 사람보다, 그들을 실망하게 한 자신에 대한 혐오가 더 강할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는 선택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 누구를 선택하든 남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거예요. 저는 그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데……. 이런 상황을 만든 제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

“ 성녀님, 어째서 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 그…….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살며시 몸을 기울였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연녹색의 눈동자에 아리스텔라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사랑하는 사람은 꼭 한 사람이어야만 하는 건가요? ”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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