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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92]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 성녀님. ”
침대에 몸을 누인 채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던 아리스텔라는 케인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설핏 잠이 깨었다. 하지만 몸은 아직 피로했다. 간밤의 정사가 너무 격렬했던 탓에, 아리스텔라는 눈조차 뜨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칭얼거렸다.
“ 으응……. 케인, 조금만 더……. ”
“ 성녀님께서는 더 주무십시오.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
“ 네……. 아니, 네? ”
돌아가 보겠다는 케인의 말에 깜짝 놀란 아리스텔라가 반쯤 눈을 뜬 채로 몸을 일으켰다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 아읏! ”
“ 성녀님, 조심하십시오. 그렇게 갑자기 몸을 일으키시면……. ”
“ 아니, 케인이 간다고 하니까……. ”
아리스텔라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은 달빛조차 없어 어둡고 고요했다. 신전 안을 채우는 성스러운 푸른빛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케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 제가 성녀님의 방에 머물렀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봐서는 곤란하니까요.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 보겠습니다. ”
“ 아……. ”
해가 뜨면 로이드가 그녀를 깨우기 위해 방문할 것이다. 로이드에게 관계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내놓고 케인과 하룻밤을 보낸 것을 들키면 분명 상처받을 것이다. 기사단으로 가는 도중에 또 누군가와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케인을 곤란하게 하는 것도 싫었다.
“ 그러네요……. 들키면, 안 되니까……. ”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케인과 몸을 섞은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거늘, 아리스텔라는 자신을 위해 진실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 곤히 주무시는데 잠을 깨워 죄송합니다. 일어나셨을 때 제가 없으면 당황하실 듯하여……. ”
“ 아뇨. 깨워줘서 고마워요. ”
케인의 말대로 눈을 떴을 때 그가 이미 돌아간 뒤였다면, 정말 쓸쓸했을 것이다. 마음을 나누는 섹스를 원했던 아리스텔라는 관계 후에 바로 멀어지는 것을 싫어했다.
간밤 케인은 정사의 뒤처리를 해준 뒤에도 멀어지지 않고 아리스텔라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거친 피부도 흉터가 가득한 몸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아무리 부드러운 침대 시트일지라도 사람의 체온과 심장소리만큼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몸단장을 한 케인은 아리스텔라에게도 성의를 입혀 주었다. 간밤에 성의를 입고 잠든 성녀가 알몸이어서야 로이드가 눈치챌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케인……. ”
조심해서 돌아가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리스텔라는 좀처럼 케인에게 작별인사를 건넬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쉬운 눈빛을 읽었는지, 아리스텔라의 옷자락을 여며주려던 케인은 잠시 손을 멈추고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 앗……! ”
케인의 입술이 아리스텔라의 가슴 첨단을 감싸 촉촉한 혀가 젖꼭지를 핥았다. 아리스텔라는 몸을 움찔거리며 케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직 머리를 묶지 않은 탓에, 손가락에 케인의 금발머리가 감겨왔다.
“ 케인, 아……. 아응……. ”
뾰족하게 선 젖꼭지를 희롱하던 입술이 점점 위로 거슬러 올라오더니 입술에 닿았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나른한 한숨을 빨아들이듯이 입술을 겹친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몸을 살며시 이불 위에 누이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겨 넘겨주었다.
“ 하아, 하아……. ”
“ 그런 표정을 지으시면, 제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만. ”
“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
곤란한 듯이 미소 짓는 케인의 얼굴에 부끄러워진 아리스텔라가 몸을 돌리려는 것을 제지하고, 케인은 그녀의 옷자락을 제대로 여며주었다. 졸음과 피로함과 흥분이 뒤섞여 몽롱한 표정을 짓는 아리스텔라의 눈가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케인은 몸을 일으켰다.
“ 쉬십시오, 성녀님. ”
“ 케인……. 조심해서, 돌아가요……. ”
“ 예. ”
문가까지 배웅하고 싶었지만, 아리스텔라에게는 몸을 일으킬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침대의 커튼을 내리고 멀어지는 케인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아리스텔라는 아쉬운 듯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이 넓은 방안에 혼자 남겨진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고 제 입술을 매만졌다. 아직도 케인의 입술 감촉이 남아있는 듯했다.
‘ 난 정말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
크리스와 로이드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케인 또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그녀를 여자로 바라보고 안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다른 남자와의 관계야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아리스텔라로서는 자신에게 진심을 보이는 세 남자를 어찌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녀와 사제 혹은 성기사의 신분이니 겉으로 드러내놓고 연애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모르는 척 다른 남자에게 안기면, 분명 셋 다 상처를 받을 것이다.
사랑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앞으로도 자신에게 진심으로 다가오는 남자가 생기면 거절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한다면 다른 이들의 마음을 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남자와 자진해서 잠자리를 가지는 제 모습을 더는 인정할 수 없었던 아리스텔라는 마음에 결착을 짓기로 결심했다.
‘ 하지만 대체 누구를 선택하면 좋지? ’
그녀를 무뢰배들로부터 구해주었던 은인인 로이드, 그녀의 시종으로서 가장 편한 상대였던 크리스, 충성을 맹세하고 첫키스를 나누었던 케인. 세 사람 모두 아리스텔라에게는 소중한 이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아리스텔라는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한심함을 한탄하며 고뇌하던 사이, 날이 밝아졌다.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내리쬐는 것을 느낀 아리스텔라는 반짝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케인이 나설 때는 그를 배웅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몸이 어느새 개운하졌다. 잠시 쉰 정도로 이렇게 금방 회복이 되는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제 몸이 빨리 기운을 차린 것을 신기해하면서 사이드테이블에 놓인 작은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했다.
빈틈없이 꼭 여민 옷차림에 단정한 머리카락, 말끔한 얼굴은 잠들기 전과 같았으나 입술은 조금 붉었다. 키스의 여운 때문일까. 아리스텔라는 손등으로 다시 입술을 슥슥 문지르고는 침대 맡의 종을 울렸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대롱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방문이 열리고 시종인 로이드가 들어왔다.
“ 성녀님. 간밤엔 편히 주무셨는지요? ”
“ 네……. ”
로이드를 거절해놓고 케인과 섹스한 일에 마음이 켕겼던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어쩐지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사실 로이드와 아리스텔라는 연인 사이도 무엇도 아니니, 그녀가 케인과 몸을 섞었다고 해서 로이드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아리스텔라는 로이드를 바라보는 것이 어색했다.
“ 성녀님.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잠자리가 불편하셨습니까? ”
“ 아뇨, 괜찮아요. ”
“ 하지만 표정이……. ”
“ 괜찮다고요. 제게 신경 쓰지 마세요. ”
시종이 주인의 안색을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신경을 쓰지 말라니, 말해놓고도 억지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로이드를 피하고 싶었던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 그럼 목욕을 하시겠습니까? 준비를 돕겠습니다. ”
“ 아, 아니에요! ”
로이드가 아리스텔라의 성의를 벗기려 하자, 아리스텔라는 당황하여 로이드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 성녀님? ”
미사 준비를 위해서는 성수로 몸을 정화해야 한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정확히는, 다른 남자와 정사를 치른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분명 케인이 깨끗하게 뒤처리를 했으니 흔적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을 텐데도 그랬다.
“ 오늘은 미사를 빠지면 안 될까요? 기분이 좋지 않아서요. ”
“ ……알겠습니다. 그럼 아침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지요. ”
어제 아침에도 아리스텔라는 기분이 나빠 보였다. 하지만 오후에는 기분이 풀렸다. 어쩌면 그녀는 오전에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아침으로 나온 것은 따끈따끈한 버섯스프와 달콤한 파인애플을 곁들이고 새콤달콤한 과일소스를 뿌린 햄버그, 칼집을 내 사이사이에 치즈와 다진 감자와 삶은 달걀을 넣고 구운 소시지, 토마토와 월계수 잎으로 만든 샐러드였다.
채식 위주의 간소한 식단을 본 로이드는 아리스텔라가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영양부족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사람이 이것만 먹고 살 수는 없다며 요리장을 닦달해 풍족한 아침 식사를 준비했으나, 아리스텔라가 빈 속에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양이었다.
대식가에 한 번도 배탈이 난 적이 없는 로이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저 요리를 전부 먹었다가는 내내 소화가 되지 않아 움직이기 고단해질 것 같았던 아리스텔라는 결국 반쯤 먹고 상을 물렸다.
“ 미안해요, 로이드. 더는 못 먹겠어요. ”
“ 성녀님……. ”
아리스텔라는 아침에는 이 정도만 먹으면 충분하다는 의미로 상을 물린 것이지만, 로이드는 그녀의 기분이 저조하기 때문에 식욕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어째서 이토록 기운이 없는 것일까. 로이드는 아리스텔라가 걱정스러웠다.
“ 성녀님. 혹시 몸이 불편하신 것이 아닙니까? ”
“ 네? ”
“ 최근 이런저런 일로 마음고생이 심하셨으니까요. 아무래도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
“ 그, 그런 거 아니에요! ”
불편한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리고 마음이 불편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지금 그녀의 눈앞에 무릎을 꿇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있다.
하지만 그를 비롯해 그녀에게 고백해온 남자들 중에 누구를 연인으로 삼아야 할지 고민 중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아리스텔라는 로이드를 설득할만한 변명을 마련하지 못했고, 결국 로이드의 손에 이끌려 조슈아를 찾아가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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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두 챕터명이 추상적인 듯하여 소제목을 조금 더 직관적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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