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89화 (89/219)

0089 / 0219 ----------------------------------------------

오늘 밤만은, 오직 당신의

[89] 오늘 밤만은, 오직 당신의

“ 성녀님. 오늘 밤, 제가 성녀님의 방에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

“ 네? ”

가족이 되는 것은 싫다고 말한 남자가, 한밤중에 방에 찾아오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아리스텔라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케인이 자신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요구할 줄은 몰랐다. 아리스텔라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렸다.

“ 케인. 저기, 저는……. ”

“ 저와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은, 싫으십니까? ”

“ 아, 아뇨. 싫은 건 아닌데요……. ”

케인과 관계하는 것은 싫지 않았다. 기억이 없을 때 여신 위그멘타르에 의해 케인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아리스텔라는 케인에게 자신이 자신의 의지를 가질 때 관계를 맺기를 요구했다. 분명 아리스텔라는 스스로 케인을 받아들였고, 그와 성관계를 가진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지난 밤 로이드와 관계를 가졌다. 그 전날에는 이자크와 관계를 가졌다. 이런 식으로 매일 밤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다는 건 아리스텔라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히페리온에게 연인처럼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요구한 그녀였다. 욕구를 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것도 아니고, 제 스스로 여러 남자를 받아들이는 일에는 저항감이 있었다.

“ 성녀님께서 거부하신다면, 다시는 성녀님께 삿된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 ”

“ 사, 삿된 마음이라니요……. ”

아리스텔라는 흠칫거리며 케인의 눈치를 보았다.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케인의 눈빛은 욕망에 이글거리던 다른 남자들의 눈빛과는 달리 무척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평온함이 아닌, 깊이를 알 수 없는 적막함과도 같았다. 그 안쪽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 아리스텔라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 당신을 안고 싶습니다. ”

“ 케인……! ”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귀끝까지 붉어졌다. 로이드에게도 들은 말인데, 이런 말은 아무리 들어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리스텔라는 머뭇거리다가 케인의 손을 잡았다.

“ 지,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요……? ”

한심한 일이다. 안기고 싶으면 안기고 싶다고, 원치 않으면 원치 않는다고 거절하면 될 것을. 어째서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로이드나 케인처럼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단호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 오늘 밤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답을 들려주십시오. ”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 ◆ ◇ ◆ ◇

로이드와 함께 방으로 돌아온 아리스텔라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문득 공기가 따스한 것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황량할 정도로 넓고 살풍경한 방안은 늘 차갑고 적막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곳의 공기가 더는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 성녀님. 불은 이 정도면 될까요? ”

“ 아, 네. 고마워요, 로이드. ”

로이드가 침대 옆의 사이드테이블에 작은 조명등을 켜고 침대를 정리해 주었다. 어젯밤에 두 사람이 몸을 섞었던 침대는 깨끗하게 세탁한 시트로 감싸여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 케인이 찾아오면, 또 여기서 밤을 보내게 되는 걸까. ’

조슈아와, 히페리온과, 크리스와, 케인과 이자크, 그리고 로이드까지. 이제까지 침대에서 몸을 섞었던 남자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아리스텔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성녀님, 추우십니까? 난로를 켤까요? ”

“ 아, 아니에요. ”

제 안에 있는 음욕의 여신을, 욕망을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정욕에 미쳐 이성을 잃어버리기 전에 자신의 의지로 남자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지만 이제까지 제가 겪은 일들을 떠올리자, 아리스텔라는 어쩐지 소름이 끼쳐서 침대에 누울 수가 없었다.

“ 로이드, 오늘 수고 많았어요. 저는 쉴 테니까, 당신도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하세요. ”

“ 성녀님이 주무시는 것을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

“ 아, 아니에요. 괜찮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

케인이 밤에 찾아온다고 했는데, 혹여 로이드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오늘은 관계를 하지 않겠다고 로이드에게 말했다. 그런데 케인이 찾아오는 모습을 보이면 그가 어떻게 생각할까.

아직 마음이 혼란한 상태였던 아리스텔라는 우선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로이드를 내보내는 길을 택했다.

“ 혼자서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

“ 아……. ”

아리스텔라의 잠든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를 부릴 수는 없다. 로이드는 아리스텔라에게 밤 인사를 하고, 용건이 있으면 침대 맡의 종을 울려달라며 당부하고는 아리스텔라의 방을 나갔다.

로이드가 나가고, 겨우 혼자가 된 아리스텔라는 의자에 앉아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나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고 커다란 그림자가 들어온 탓에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히익! ”

“ 접니다, 성녀님. 케인입니다. ”

“ 케, 케인! 왜 노크도 없이……. ”

“ 죄송합니다. 로이드가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들어오느라……. ”

케인은 방문을 닫고 다가와 아리스텔라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아리스텔라는 가슴이 천천히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렇게 바로 올 줄이야. ’

오늘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저 로이드에게만 한 말은 아니었다. 조금씩 제 안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한 아리스텔라는 가급적 참을 수 있을 때까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을 셈이었다. 민감하고 자극에 약한 그녀의 몸은 누군가 만져주는 것만으로 쉽게 느끼고 흥분해 버린다. 욕구를 자제하기 위해서는 남자와 거리를 두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가 대답을 망설인 탓에 케인은 이 한밤중에 그녀의 방까지 찾아왔고, 아리스텔라는 제 방에 방문한 남자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돌려보내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 어쩌면 좋담……. ’

아리스텔라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는 것을 본 케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 성녀님, 기억하십니까? 제가 처음으로 이 방을 방문했을 때를. ”

“ 네……. ”

욕구를 억지로 참으며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보니 조슈아의 방이었다. 두 번이나 몸을 섞고도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는 조슈아의 태도를 보고 상처받아 울면서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로운 시종으로 케인이 그녀를 찾아왔다.

“ 생각해 보니 우리, 만나자마자 그런 관계가 되었네요. ”

아리스텔라가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그때는 여신 위그멘타르가 정신을 지배해 케인을 유혹했고, 케인은 그녀를 범한 일을 함구했다. 그래서 한동안 아리스텔라는 제가 케인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몰랐다.

“ 예. 그리고 그 다음에 제가 찾아뵈었을 때는, 저를 저 거울 뒤에 숨겨 주셨지요. ”

케인이 가리킨 것은 화장대 옆에 있는 전신 거울이었다. 좌우에 커튼이 둘러진 거울 뒤에는 성인 남자 하나가 숨을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아리스텔라는 그곳에 케인을 밀어 넣고, 그와 몸을 밀착한 채 함께 숨어 있었다.

“ 성녀님. ”

케인의 커다란 손이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짚었다. 아리스텔라는 작게 몸을 움츠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케인을 바라보았다. 그날 거울 뒤에 숨어 있다가 빠져나왔을 때, 케인은 충동을 참지 못하고 아리스텔라에게 키스했다.

“ 으응……. ”

케인은 허리를 굽혀 아리스텔라에게 키스했다. 그때처럼 급작스러운 입맞춤은 아니었다. 아리스텔라는 케인을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입술을 벌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거부하는 기색을 보이자 케인은 무리하게 혀를 밀어 넣지 않고 그녀의 입가를 핥고 떨어졌다.

아리스텔라의 입술은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이 붉고 촉촉한 입술과, 부드럽고 따스한 몸과, 요염하게 흐트러지는 표정과 신음소리를 대체 몇 사람의 남자가 알고 있을까. 케인은 조바심이 났다.

“ 요전에는 이자크와 밤을 보내셨지요. ”

“ 네, 네……. ”

“ 어제는 혼자 주무셨습니까? ”

“ 아뇨. 로이드와……. ”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는 그녀 안의 음욕의 여신이 남자를 유혹해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침실에 숨어든 이자크에게 자신을 만족시켜보라며 제안한 것도, 로이드에게 한 번 더 안아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리스텔라였다. 자신의 의지로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지금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기 위해 찾아온 케인을, 아리스텔라는 내치지 못하고 있다.

“ 성녀님. 제가 당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

“ 케인……. ”

차라리 거절한다면, 그러면 포기할 수 있다. 감히 종이 주인에게 음욕을 품는 것을 용서치 않겠다며 노여워하고 그를 내친다면, 케인은 한평생 제 마음을 숨기고 살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스스로는 이 감정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 저는 여성의 심리를 헤아리는 데에 서툴러서……. 확실히 말씀해주지 않으시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

선택을 타인에게 미루는 모습이 비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케인은 제 마음의 행보를 아리스텔라에게 결정해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 아, 아니에요.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싫지 않아요. 케인이 만지는 건, 오히려……. ”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린다.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만져주면 두근거리고 흥분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로이드가 만져줄 때도, 케인이 만져줄 때도 두근거리고 흥분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녀가 아무 남자에게나 사랑을 느낀다는 뜻일까.

여신 위그멘타르가 자신의 몸으로 저지른 행동에, 아리스텔라는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짓을 뒤집어쓰는 양 불행한 척을 했다.

하지만 제 의지로 서로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는 지금은 어떠한가. 사실은 여신 위그멘타르가 아니라, 아리스텔라 자신이 엄청난 음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나는 헤픈 여자인 걸까? ’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조금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케인을 거절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 케인. 제가 이상한 걸까요? ”

“ 무엇이 말입니까? ”

“ 저는 당신이 저를 만지는 게 싫지가 않아요. 로이드도, 그리고 이자크도 그날 밤에 저를 만지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았어요. ”

조슈아나 히페리온과 잠자리를 가졌을 때도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가지고 싶다고 말해놓고 한 사람이 아닌 여러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서 전부 좋은 기분이 들어버린다니, 아리스텔라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일이었다.

연인간의 관계는, 부부간의 관계는 분명 두 사람만의 것이어야 할 텐데.

“ 어쩌면 저는……, 저는 정말로 음란한 여자가 되어버렸는지도 몰라요. ”

“ 성녀님. ”

“ 지금은 케인을 받아들이면서도, 내일은 또 다른 남자를 받아들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당신은 괜찮은가요? ”

“ 성녀님. 지금 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신 말씀,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시지요? ”

케인의 질문에 아리스텔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 이 순간 당신께서 저만을 생각해 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

“ 케인, 응……! ”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숨 한 조각까지 빨아들이겠다는 듯이 격렬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 작품 후기 ============================

89화부터 91화까지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