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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들의 속사정
[88]
최고의 성기사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게, 로이드는 성검도 아닌 연습용 소드를 들고도 성기사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연무장 안에 울리는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에 처음에는 기가 질렸던 아리스텔라지만, 케인이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녀님. 로이드 전 단장은 이 기사단에서 가장 뛰어난 성기사니까요. ”
“ 하지만 목검도 아니고 진짜 검이잖아요. 다치지 않을까요……? ”
“ 오히려 목검보다 진검일 때에 더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요. ”
아무리 크게 다치더라도 어지간해서는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는 확신이 있는 목검과는 달리, 자칫하면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진검승부야말로 승부의 감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는 법이다.
로이드처럼 거구의 기사라면 스피드가 느리고 힘으로 승부하는 타입이 아닐까 했는데, 아리스텔라의 생각과는 달리 로이드는 상당히 재빨랐다. 날카로운 은색의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로이드의 검은 투박한 연습용 소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로이드는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성기사들의 검을 받아내고도 지친 기색이 없어 보였다.
‘ 굉장하다……. ’
처음 아리스텔라를 구해주었을 때는 경황이 없어 몰랐지만, 검술에 문외한인 그녀의 눈에도 로이드의 검술은 다른 성기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저만한 능력을 가진 남자로부터 성기사의 지위를 박탈하고 제 시종으로만 두는 것은 재능의 낭비일 것이다.
지은 죄가 있어 벌을 받는 중이니 당장은 무리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사제와 성기사들간의 골이 얕아지면 로이드의 기사단장 복귀를 추진해야겠다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 케인. 자네는 나서지 않는 건가? ”
마지막으로 덤빈 이자크를 힘으로 눌러버린 뒤, 로이드가 연무장 바닥에 검을 푹 꽂은 채 케인을 돌아보았다.
“ 지쳐있는 사람을 상대로 덤벼드는 것은 모양새가 안 좋지 않겠습니까. ”
“ 나를 상대로 서른 명을 밀어 넣고는 이제 와서 뭐라는 거야. ”
오랜만에 몸을 움직인 것이 기분 좋았는지, 로이드가 씩 웃으며 케인을 향해 손을 까딱했다. 케인은 잠시 로이드를 바라보다가, 아리스텔라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앞으로 나아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 그럼,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 ◆ ◇
훈련은 로이드의 전승으로 끝났다. 아리스텔라는 몰랐지만, 로이드는 대련의 끝 무렵에 케인이 일부러 손을 늦춘 것을 알고 있었다. 전 단장에 대한 예우일까, 아니면 아리스텔라 앞에서 진심으로 대련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전력승부를 하지 못한 것은 다소 찝찝했으나 기사 직위를 잃은 몸으로 어째서 전심을 다하지 않았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로이드는 빌려 쓴 검을 보관소에 맡기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니까 개운한걸. ”
“ 종종 오셔서 함께 훈련을 하시면 어떻습니까? ”
“ 아니, 그건 곤란해. 나는 성녀님의 시종이니까 늘 이분의 곁을 지켜야 하거든. ”
로이드가 아리스텔라를 쳐다보자,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붕붕 저었다.
“ 저는 괜찮아요. 앞으로는 훈련 시간에 맞춰서 자주 연무장을 방문할게요. ”
“ 성녀님? 하지만 저는……. ”
“ 제 옆에만 있으면 로이드의 실력이 녹슬지도 모르잖아요? 절 지키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하시고, 앞으로는 훈련에도 참가하도록 하세요. ”
조금 훈련을 쉰다고 녹슬 만한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성녀 앞에서 잘난 체를 하는 것도 멋이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은 환영이었던 로이드는 성녀의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훈련을 마치고, 기사단의 성기사들은 성녀에게 인사를 마치고 연무장을 나섰다. 마지막 훈련이 끝났으니 이제 씻고 잠들 일만 남은 셈이라, 성기사들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성기사들이 모두 나가고도 아직 땀에 흠뻑 젖은 채 연무장에 남아있는 인물이 있었다. 이자크였다.
“ 이자크.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요? ”
“ 예? 아, 저……! ”
그러고 보니 아까 후원에서 마주쳤을 때도 이자크는 그녀와 로이드를 힐끔거리며 입을 달싹거렸다. 뭔가 용건이 있는 것일까.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이자크는 말을 더듬다가 조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 그, 혹시 괜찮으시면……. 보는 눈이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
이자크는 아리스텔라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으로 물은 것이었으나, 이자크가 로이드를 몹시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리스텔라는 이자크가 말한 ‘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 ’가 로이드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 좋아요.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
“ 예? ”
“ 그럼 로이드, 이자크와 편히 이야기하세요. ”
“ 아, 성녀님!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와 이자크를 놔두고 연무장을 나왔다. 케인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연무장에서 나오니 벌써 밤이었다. 훈련을 시작할 때는 아직 저녁이었는데, 그새 해가 떨어진 모양이다.
낮과 밤은 무척이나 긴데, 새벽과 저녁은 참으로 짧다. 어째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는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조금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는 것에 한기를 느껴 양 어깨를 감쌌다.
“ 케인, 춥지 않아요? ”
“ 저는 괜찮습니다. ”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바람을 막아서듯 그녀의 옆에 섰다.
“ 성의가 얇아 추위를 타시는 듯하군요. 겉옷을 마련하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
“ 너무 따뜻하게 입고 있으면 마음이 풀어져서 해이해진다고 하던걸요. 이 정도가 바람을 맞으면 정신이 바짝 들어서 좋아요. ”
“ 여성에게는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
아리스텔라의 시종을 맡게 되었을 때부터, 여자를 대하는 데 서툴렀던 케인은 조금씩 여자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문학소설에 나와 있는 연애이야기야 차치하고서라도, 레이디를 대하는 매너나 교양 정도는 읽는 정도로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평민 출신의 아리스텔라는 귀족이 아니니 레이디라 부를 수 없겠지만, 이 신전의 주인인 그녀라면 충분히 그런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 성녀님. ”
케인은 망토 자락을 이끌어 아리스텔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로이드가 하던 것처럼 멋진 은빛의 망토는 아니지만, 케인의 망토는 그의 눈 색을 닮은 푸른색이었다.
“ 후후. 이렇게 하니까 어릴 적 생각이 나네요. ”
“ 어릴 적 생각이요? ”
“ 네. 숨바꼭질을 할 때면 옷장 속에 숨어들어가 아버지의 망토 속에 몸을 숨기곤 했거든요. 그때 생각이 나서요. ”
동생 프란시스가 태어나기 전, 아직 그녀의 아버지가 도박에 취하지 않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던 어린 시절. 그때는 아리스텔라도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아버지가 출근하면 옷장을 뒤져 망토와 모자를 꺼내 제 몸에 두른 뒤 거울 앞에서 “ 엇흠. ”하고 아버지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부녀의 연도 끊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아리스텔라에게도 분명 소중한 부모가 있었고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
“ 성녀가 되면 속세의 인연을 모두 끊어야 하니까, 이제 더는 가족을 가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니더군요. 이 신전의 모두가 제 가족이니까. ”
“ 이 신전의 모두가, 말입니까. ”
“ 우리는 모두 이곳에서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하잖아요? 한 집에 사는 식구들이니까, 가족이죠. ”
밝은 얼굴로 웃어 보이는 아리스텔라는 천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제가 돌봐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던 연약한 소녀는 어느새 어엿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햇빛과 달빛 아래서는 청초하기만 한 저 웃는 얼굴이, 어두운 방안의 등불 아래서는 얼마나 요염하게 흐트러지는지 또한 케인은 잘 알고 있었다.
“ 성녀님. 가족끼리는 입을 맞추고 살을 섞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
“ ……네? ”
“ 후원에서 로이드에게 키스하려던 성녀님의 모습은, 가족 간의 친밀함의 표시로 입맞춤을 나누는 표정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
“ 케인, 그건……! ”
들켰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지적해올 줄은 몰랐다.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붉히며 어깨를 감싼 케인의 망토를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 미안해요.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여서……. ”
“ 그런 게 아닙니다. ”
평생을 섬겨야 할 소중한 주인이다. 케인은 아리스텔라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명령한다면 어떠한 위험에도 뛰어들며 고행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텔라가 로이드에게 키스하려는 모습을 본 순간, 먼저 몸이 움직이고 말았다. 그녀가 당황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걸었다.
후원처럼 노출된 장소에서 성녀가 시종과 키스하는 것이 계율에 위반되기 때문은 아니었다. 케인은 그저, 아리스텔라가 로이드와 입 맞추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 성녀님께서는 저를 가족으로 여기시는 겁니까? ”
“ 네……? ”
“ 모시는 분께 인정받는 것은, 기사에게 큰 기쁨입니다. 성녀님께서 이 종을 가족으로 여겨주시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가족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
“ 케인……. ”
케인은 제 푸른 망토를 감싸고 있는 아리스텔라의 몸을 살짝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품안에서 작고 가녀린 몸이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감촉이 간지러웠다.
분명 성녀는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다. 케인은 성녀의 신성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욕망을 품는 자신을 숨기고 그녀에게 거짓을 고하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이제 두 번 다시, 아리스텔라를 속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기에.
“ 성녀님. 오늘 밤, 제가 성녀님의 방에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
“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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