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87화 (8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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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들의 속사정

[87]

이제까지 아리스텔라는 그다지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가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 어린 시절 충분히 어리광을 부리지 못했던 아리스텔라는 누군가의 품에 안기거나 사랑받는 일이 낯설었다.

남자가 자신을 안아주는 일은 더욱 생소했다. 도리어 무섭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신전에 온 뒤로 온통 남자뿐인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아리스텔라는 조금씩 남자를 대하는 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성녀의 탄생을 맞이하는 대미사를 치르던 중 몸이 달아올랐을 때는 정말 당황했지만, 조슈아가 다정하게 안아주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첫경험을 치를 수 있었다.

남자가 몸을 만져주면 무섭고 떨리면서도 흥분되는 것을, 아리스텔라는 제 몸 안에 깃든 음욕의 여신 위그멘타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인처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아리스텔라의 주문에 응해준 히페리온이나, 간밤 자신을 따스하게 안아준 로이드와의 관계에는 단순한 육체적인 쾌락 이상의 것이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따스한 무언가가 꽉 차오르는 감각. 넓고 추운 방에 홀로 버려졌을 때 느끼던 적막함과 외로움과는 정반대의, 편안함과 따뜻함으로 온몸이 충만해지는 느낌. 이것이 이제껏 그녀가 겪지 못해 느끼지 못했던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판단했다.

넓고 따스한 품에 안기는 것도, 부드러운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부비는 것도, 아리스텔라는 좋아했다. 성욕을 참지 못해 몸을 섞는 것과는 달랐다. 그녀에게 호의를 가진 남자가 제 몸을 만져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양팔로 꽉 안아야 간신히 손이 맞닿을 만큼 커다랗고 탄탄한 몸. 예전에는 위축되어 제대로 바라보는 것조차 잘 하지 못했던 거구의 기사를 제가 먼저 끌어안을 수 있게 된 것을 보고 새삼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 성녀님……. ”

“ 로이드. 제가 이렇게 안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

“ 어, 어떠냐고 물으셔도……. ”

로이드는 당혹스러웠다. 로이드에게 달라붙지 말라며 냉정하게 돌아섰던 아리스텔라가 갑자기 그를 끌어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대로 그녀를 끌어안고 쓰러뜨려도 좋을까 눈치를 보았지만 어쩐지 그랬다가는 또 미움을 받을 것 같았다.

“ 무, 무척……. 두근거립니다. ”

“ 그것뿐인가요? ”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박이는 아리스텔라의 얼굴을 보자 로이드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이 가녀린 팔로 꽉 끌어안아 봐야 숨통이 졸릴 일도 없건만, 로이드는 마치 온몸이 사슬에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 그……. 흥분……도, 되고요……. ”

“ 저를 만지고 싶어지나요? ”

성녀는 왜 이런 것을 묻는 것일까. 그의 본심이 내뱉을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는 항상 그녀를 안고 싶었다. 어디에도 내보내지 않고 침대에, 제 팔 안에 가두고 마음껏 그 몸을 탐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그런 욕망을 솔직하게 고하면 성녀가 노여워하지 않을까. 아리스텔라를 안고 싶은 것 이상으로 그녀가 제게 웃어 보이길 원했던 로이드는 속내를 말하기가 어려웠다.

“ 만지고, 싶습니다……. ”

“ 흥분되니까 저를 만지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저를 좋아해서 만지고 싶은 거예요? ”

“ 성녀님! ”

로이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로이드의 힘에 밀려 손을 놓친 아리스텔라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 로, 로이드……! ”

“ 당신을 사랑하니까 만지면 흥분이 되고 안고 싶은 겁니다. 어째서 이런 것을 물으십니까? ”

몸에 손대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어깨를 붙잡아버렸다. 하지만 로이드는 주저하지 않고 자세를 맞추어 아리스텔라와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 신의 사랑은 하염없이 베푸는 은혜와도 같으나, 인간의 사랑에는 욕망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제가 성녀님께 용서를 빌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박탈당한 기사의 직위를 되찾기 위해서도 아니고,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

“ 제 마음이요……? ”

“ 성녀님이 저를 보며 미소를 짓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겁니다. 제 품안에서요. ”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감동시킬 수 있었을 텐데, 로이드가 강조한 <품안>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 가, 간밤에도 했잖아요……. 오늘은 안할 거예요. ”

“ 오늘은, 말씀이시지요? ”

“ 내일도 안할 거거든요? ”

“ 그래도 좋습니다. 내일도 성녀님의 곁에 있겠습니다. ”

“ 제가 당신과 잠자리를 갖지 않겠다고 하면요? ”

“ 괜찮습니다. 성녀님의 곁을 계속해서 지킬 수 있다면요. ”

“ 뭐예요. 아까 한 말이랑 다르잖아요……. ”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반응한다고 해놓고서 그녀가 원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겠다니. 이런 모순이 없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대답이 싫지 않았다. 그녀의 질문에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변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진심이 잘 느껴졌다.

사람의 진심을 담은 대답은, 그럴싸한 명분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마음을 흔드는 법이니까.

“ 저를 좋아해서 안고 싶은 거죠, 정말로? ”

“ 예. ”

“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 예. ”

아리스텔라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계속해서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왔다. 그것이 그녀의 의지가 아닌 제 안에 깃든 음욕의 여신 때문이라고는 하나, 기어이 참지 못하고 울면서 다리를 벌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아리스텔라는 더 이상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안기고 싶었다. 아직 그녀는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관계를 거듭하다 보면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 로이드……. ”

“ 예, 성녀님. ”

“ 눈 감으세요. ”

아리스텔라의 명령에 로이드가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녀보다 한참이 큰 로이드의 얼굴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말끔한 인상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가까이서 바라본 로이드는 몸을 쓰는 기사임에도 피부가 희고 매끈했다. 짙은 눈썹에 반듯한 이마와 남자다운 턱선. 전체적으로 큼직큼직하면서도 뚜렷한 이목구비는 마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아리스텔라는 침을 꼴깍 삼키고, 로이드에게 키스하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입술의 위치를 맞추고, 눈을 감고, 간밤에 느꼈던 뜨겁고 탄력 있는 입술에 제 입을 맞추려 할 때―

“ 성녀님? ”

갑자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아리스텔라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붉어진 얼굴로 허둥지둥 머리와 옷차림을 확인하고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케인과 이자크가 서있었다.

“ 케인, 이자크……. ”

“ 역시 성녀님이셨군요. 후원에 인기척이 있어 혹 침입자가 아닌가 순찰을 나온 참이었습니다. ”

“ 아, 저……. 산책을 하려고요……. ”

케인의 말에 아리스텔라는 우물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로이드와 키스하려던 모습을 보았을까.

이곳은 기사단의 후원이었다. 클로비스가 결계를 깨고 침입한 이후로 기사단의 성기사들은 두 부대로 나뉘어 교대로 미사에 참석하고, 신전 주위를 순찰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쪽에도 순찰을 나온 기사가 있으리라는 것을 간과한 로이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케인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이자크는 살짝 얼굴이 붉어진 것이 로이드와 아리스텔라가 무엇을 하려던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 알면 케인이 오지 못하도록 좀 말려줄 것이지. ’

한참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로이드는 불쾌한 기분이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아리스텔라의 옆에 서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 케인, 저기……. 그, 일은 힘들지 않은가요? 기사분들도 계속 이 넓은 신전을 순찰해야 하니까 힘드실 텐데……. ”

“ 성녀님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저희들의 임무이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 실력 있는 마법사가 들어오려 해도 깨지지 않도록 결계를 단단히 보완했다고 히페리온 대신관님이 그러시던 걸요. 이젠 괜찮을 거예요. ”

더는 사제들을 신뢰하지 않게 된 케인은 결계를 보수했다는 사제들의 말에도 조금도 주의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칠게 기사들을 몰아붙여 신전 안을 순찰하게 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에게 그런 점을 들어 불안해하거나 걱정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케인은 그녀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아리스텔라는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럼 후원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저희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녀님께서도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

“ 네? 음……. 저, 케인은 더 순찰을 돌려는 건가요? ”

“ 아닙니다. 저녁 순찰이 끝나면 연무장에 모여 훈련을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

“ 지금부터 또 훈련이요? 힘들겠다……. ”

미사와 회의, 성서 공부를 제외하면 사제들은 비교적 개인 시간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단체 생활을 하는데다 순찰과 훈련, 거기에 미사 참석까지 하느라 별로 쉴 틈이 없었다.

분명 휴식 시간은 존재하고 비번도 존재하며 늘어져서 쉬는 것보다 적당히 몸을 움직이는 편이 덜 피로하다는 것을 모르는 아리스텔라에게 성기사들의 스케줄은 사제들 이상으로 고단해 보였다.

‘ 이럴 때일수록 내가 힘을 줘야지! ’

아리스텔라는 돌아서려는 케인과 이자크를 불러 세웠다.

“ 지금부터 기사분들이 훈련을 하신다고 했죠? 제가 보러 가도 되나요? ”

“ 성녀님께서요? ”

“ 저는 검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기사분들이 어떻게 훈련하는지 알고 싶어서요. ”

사제들의 삶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성기사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아리스텔라도 알지 못했다.

신전의 성기사들은 성녀를 위해 일생을 바친 자들인데, 그들의 삶을 몰라서야 말이 되지 않지 않겠는가. 아리스텔라는 적어도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응원이나마 하고 싶었다.

“ 알겠습니다. 이 참에 로이드, 당신도 훈련에 참가하면 어떻습니까? ”

“ 내가? ”

“ 침입자를 막아낸 것도 결국 이자크였던지라, 성기사들이 나설 일이 없어 최근 많이 기강이 해이해진 것 같아서 말이지요. 전 기사단장과의 대련이 활력을 줄 것 같군요. ”

“ 좋아. 그렇게 하지. ”

로이드는 기사단장에서 물러나 성녀의 시종이 되었고, 케인은 부단장에서 단장으로 승진했으나 여전히 케인은 로이드에게 존대했고 로이드는 케인에게 하대를 했다. 그것을 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고쳐지지 않기는 했지만.

아리스텔라와 로이드는 케인과 이자크를 따라 기사들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내내 이자크가 아리스텔라에게 할 말이 있는 듯 그녀를 힐끔거리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하기 어려운 말이었는지 결국 그는 연무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리스텔라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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