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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86화 (8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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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들의 속사정

[86] 그 남자들의 속사정

수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노엘은 크리스가 문가에 서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 뭐야, 크리스. 그런 곳에 서 있고. ”

“ 노엘 사제님이 오시기를 기다렸어요. ”

크리스는 그날 지하에서 아리스텔라가 정화해준 이후, 미사가 끝나면 조슈아를 찾아가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한 번 고갈되었다가 다시 채워진 신성력이 안정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에, 혹 그의 몸 안에 있는 신성력이 겉돌다 빠져나오거나 균열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슈아는 그의 신성력을 안정시켜주었다.

오늘도 분명 치료를 받기 위해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 했더니 문가에 버티고 서있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다. 노엘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크리스에게 물었다.

“ 나를 기다렸어? 무슨 일 있나? ”

“ 노엘 사제님, 제 책상 서랍 건드리셨죠? ”

“ 뭐? 아니야! ”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크리스의 태도에 지레 찔린 노엘은 괜히 소리를 높이며 부정했다. 갑자기 성녀의 마법 선생이 되어 수업 준비를 하느라 크리스가 치료를 받으러 간 사이, 그의 책상을 뒤져 필기해둔 노트를 참고하여 수업 준비를 했다.

정작 그 참고해서 만든 수업계획서는 도루묵이 되어버렸지만.

“ 손대셨잖아요. 성서 사이에 끼워둔 필기노트가 제일 위에 올라와 있는데요. ”

보통 거기까지 주의해서 보는 건가? 노트 순서는커녕 물건을 어디에 놓았는지도 잊어버리기 일쑤라 늘 크리스에게 제 물건을 어디다 두었는지를 묻는 노엘로서는 크리스의 날카로운―사실 날카로운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지만―눈썰미를 피해갈 수가 없었다.

“ 흠흠. 미안하다. 수업 준비를 하려다보니 기초 마법 이론이 생각이 안 나지 뭐냐? 그래서 네 것을 좀 보고 참고하느라……. ”

“ 그럼 썼다고 말씀을 하셨어야죠. 이렇게 몰래 다시 넣어놓고 아무 말씀도 없으시면 어떻게 해요? ”

“ 야, 너 그거……. 고작 노트 좀 봤다고 너무하는 거 아니야? ”

“ 고작 노트라고요? 성녀님께 가르칠 마법 이론의 수업 준비가 고작이라는 소리가 나올 일인가요? ”

그건 그랬다. 제아무리 기초적인 마법 이론 수업이라도 수습사제를 가르치는 것과 성녀를 가르치는 것은 책임의 무게도 다르고, 선생이 갖는 지명도와 위치도 달랐다.

제 공을 쌓는데 크리스의 필기노트를 사용하고 입을 싹 닫는 것은 치졸한 짓이리라. 노엘은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크리스에게 물었다.

“ 미안하다, 크리스. 내가 급하게 수업 준비를 하느라……. 뭐, 노트는 잘 썼다. ”

“ 제게 신세를 지셨네요, 노엘 사제님. ”

생글생글 웃으면서 크리스는 노엘에게로 다가왔다.

크리스는 노엘보다 어리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키가 컸다. 노엘은 붉은 고수머리에 초록색 눈, 크리스는 반짝이는 금발에 붉은색 눈. 두 사람은 형제가 아닌데도 하얀 얼굴에 동글동글한 인상이 닮아 있었다.

다만 노엘은 까칠한 태도에 비해 속이 허당이고, 크리스는 천진한 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꼼꼼하다는 것이 차이일까.

노엘과 크리스는 같은 수도원의 선후배 사이로 신전에서도 한 방을 쓰는 사이였다. 서품을 받고 정식 사제가 되면 개인실을 쓸 수 있지만, 노엘은 크리스와 한 방을 쓰는 것을 원했다.

대외적인 이유는, 크리스가 노엘에게 동생 같은 후배라서 계속 옆에서 돌봐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노엘은 청소도 잘하고 정리정돈도 잘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크리스가 자신을 챙겨주는 것이 편해서 그와 한 방을 쓰는 것이다.

말을 잘 듣고 착실하며 군소리 없이 제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크리스는 노엘에게 만만한 동생과도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만만한 동생이 어쩐지 위협적으로 느껴져, 노엘은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 뭐야, 왜 그래.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있어? ”

“ 성녀님을 가르치려면 수업 준비를 하는 것도 그렇고, 옆에서 자재를 옮기고 책을 빌려올 조교도 필요하잖아요? ”

“ 응? 그……런가? ”

시종에서 물러난 크리스에게는 성녀의 곁에 다가갈 명분이 없었다. 미사 때에도 수습사제인 그는 맨 뒷자리에 서서 멀리서 그녀를 바라볼 뿐, 가까이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전처럼 밤늦게 성녀의 방에 숨어들었다가는 또 크게 화를 낼 것이다.

미사 참석 정도를 제외하면 아리스텔라의 스케줄은 고정되어있지 않아 산책을 하거나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정도였다.

만나고 싶으면 그녀를 찾아가면 되었을 일이지만, 공적인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감히 수습사제주제에 성녀를 찾아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크리스로서는 성녀가 저를 불러주지 않아 애가 탔다.

어떻게 하면 다시 그녀를 만나, 그날 자신을 정화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오해를 풀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노엘이 그녀의 마법 선생이 되었단 이야기를 듣고 내심 설렜던 것이다.

“ 그러니까 노엘 사제님. 저를 조교로 삼아주세요. ”

아리스텔라를 가까이서 보고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크리스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 ◇ ◆ ◇

수업을 마치고 돌의 방을 나온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와 함께 남쪽 탑을 나왔다. 분명 수업은 무사히 끝났고 아리스텔라는 빛의 구슬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어쩐지 아리스텔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 성녀님. 마법 수업이 힘드셨습니까? ”

“ 아뇨. 어렵지 않았어요. ”

사제들처럼 제 신성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더 연습을 해야겠지만, 타고난 신성력이 월등한 아리스텔라는 요령을 알자 어렵지 않게 빛의 구슬을 만들어냈다. 조금 더 익숙해지면 더 커다란 빛의 구슬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때는 구슬이 아니라 공이 될까.

“ 그렇다면 수업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노엘 사제의 태도가……. ”

“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

아리스텔라가 고개를 돌려 물어보자, 로이드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녀가 특별히 얼굴을 찌푸리거나 긴장하는 태도를 보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새로운 술법을 배웠는데도 그녀의 안색이 밝지 않다는 것은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신성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원하던 지식을 얻고 기뻐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 아닙니다. 제 기분 탓인가 봅니다. ”

생각해 보니 아침에 로이드와 함께 방을 나설 때도 아리스텔라는 기분이 나빠 보였다. 내내 자신 때문에 고생하고, 지하에서 크리스를 정화하느라 과도하게 신성력을 사용했다고 하니 피로해서 기분이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분전환을 하는 것이 좋을까.

“ 성녀님. 바로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보다, 산책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

“ 그러네요. 날이 좋은데. ”

내내 불쾌한 기색이 가시지 않던 아리스텔라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역시 기분이 우울했던 것이 분명하다.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데리고 자신이 평소 휴식을 취할 때 시간을 보내는, 기사단의 후원으로 향했다.

신전의 관리와 청소는 모두 골렘이 하고 있으니 사람이 관리하는 신전처럼 아름다운 조각상도 없고 꽃이 만발해있지도 않았지만, 기사단의 후원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정원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는 주의였던 로이드는 이 연못을 좋아했다.

“ 와아……. 연못에 꽃이 피어 있네요. ”

“ 예. 저 하얀 것이 수련입니다. ”

아리스텔라를 닮은 새하얀 연꽃이 연못 위에 피어 있었다. 하늘이 비치는 수면 위에 떠 있는 동그란 잎사귀와 새하얀 꽃잎. 시원한 바람에 작게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섞여왔다.

“ 아름답네요. 신전 안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

“ 살풍경한 장소가 많지만, 찾아보면 아름다운 장소도 많습니다. 중앙 정원에는 분수도 있고, 사제들의 구역에는 더 큰 연못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 정말요? 보고 싶네요. ”

“ 다음엔 그곳으로 산책을 가지요. ”

로이드와 아리스텔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연못가를 거닐었다. 물 냄새와 풀잎 냄새, 꽃향기가 신전의 청량한 공기와 어우러져 불쾌한 기분을 씻어내는 듯했다.

아리스텔라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정리하며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 로이드. ”

“ 예, 성녀님. ”

“ 로이드도 저를 보면, 가슴을 만지고 싶어지나요? ”

“ ……예? ”

이건 또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황당한 얼굴로 되묻는 로이드를 보고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 저를 사랑해서 안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저를 보면, 그……. 몸을 만지고 싶어진다거나, 하지 않는 건가요? ”

“ 서, 성녀님. 그것은……. ”

마음이 이끌리는 곳에 몸이 이끌리는 법이니, 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두면 만지고 싶고 안고 싶은 것이 본능이었다. 그녀에게 용서를 비는 중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녀 앞에 나설 수 있었다면, 로이드는 벌써 몇 번이나 아리스텔라를 안았을 것이다.

작고 따스하며 부드러운 몸은 만지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기도 하고 훈련 후에 갑자기 시원한 바람을 맞았을 때처럼 상쾌하기도 한, 편안한 해방감.

이제까지 여자란 번거롭고 성가신 존재라고만 생각했던 로이드에게 아리스텔라는 말 그대로 여신이며 성녀였다.

사실은 간밤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이 달아오른다고 하면, 그녀는 수치심을 느껴 노여워하며 그에게 벌을 내릴까.

“ 성녀님. 죄를 지은 몸으로 말씀드리기는 송구합니다만, 여성의 동의 없이 신체에 손을 대는 행위는 큰 결례입니다. 다시는 성녀님의 허락 없이 무례한 짓을 하지 않을 테니 그런 질문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허락 없이는 만지지 않겠다니, 그러면 허락이 떨어지면 만지겠다는 뜻인가.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에게 그녀의 몸을 만지고 싶은지를 물었으나, 로이드는 그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예의와 명령으로 인해 손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질문에 핑계를 대며 돌려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아리스텔라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 허락 없이는 만지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죠? ”

“ 성녀님? ”

아리스텔라는 한 발짝 다가와 로이드의 앞에 섰다. 아침에 그녀로부터 달라붙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로이드로서는 어떻게든 아리스텔라와 몸이 닿지 않게 하느라 허리를 뒤로 빼고 뻣뻣한 자세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 로이드, 저한테 손대면 안 돼요? ”

“ 예? 예……?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고 생긋 웃더니, 팔을 벌려 그를 꽉 끌어안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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