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84화 (8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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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마법을 배우다

[84]

조용하고 넓으며 신성한 공기로 가득 차 신성력이 안정되어 있는 북쪽 탑이 수업을 받기에는 가장 안성맞춤인 장소였으나,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무너지고 지하를 보수해야 하는 일로 잠시 북쪽 탑은 폐쇄되었다. 그래서 마법 수업은 남쪽 탑에 있는 돌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신성마법은 일반 마법처럼 파괴적인 술법은 없었으나 마법을 배우는 자가 초심자일수록 크고 작은 사고는 존재했다. 돌의 방은 신성력으로 가공한 단단한 돌로 방 전체가 둘러져 있어, 안쪽에서 어지간한 폭발이 일어나도 충격을 흡수하여 마법의 실패가 사고로 이어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공간이었다.

‘ 신전에는 신기한 공간이 많구나. ’

아리스텔라는 두리번거리며 돌의 방을 살펴보았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다른 신전의 벽면과는 달리 돌의 방에는 기이한 형태로 깎인 청회색의 돌이 방안을 채우고 있어, 마치 깊은 동굴 속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 천장에도 돌이 늘어져 있어서 마치 종유석 동굴에 온 것 같아요. ”

“ 충격을 흡수하는 용도입니다. ”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보고 로이드가 돌의 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 마법에 실패하면 불이 나거나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실패한 마법을 천장과 벽면의 돌이 흡수함으로써 시전자와 주위의 사람들은 안전하게 보호하는 거랍니다. ”

마법에 실패하면 불이 나거나 폭발할 수도 있는 건가. 노엘에게 신성 마법을 배우면 신전에 이것저것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 사제와 성기사들과 함께 즐기려고 생각하던 아리스텔라는 혹 제가 뭔가 실수해 사고를 치면 어떻게 하나 오싹해졌다.

“ 실수하면 큰일 나겠네요. 신전을 태워버리기라도 하면……. ”

“ 아니, 신성 마법으로는 그 정도로 파괴적인 술법은 나오지 않으니까요. 기껏해야 방이 흔들리는 정도랍니다. ”

“ 방이 흔들려서 천장의 돌이 무너져 내리면 어떻게 하죠? ”

진지하게 걱정하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저절로 피어오르는 것을 간심히 참으며, 로이드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녀님.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

“ 천장의 돌이 무너져 내린다니, 제가 그런 어설픈 수업을 할 것 같습니까? ”

날카롭게 끼어든 목소리에 로이드와 아리스텔라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 고수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젊은 사제가 서있었다.

조슈아보다 조금 짙은 녹색 눈동자. 동글동글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매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로이드를 확 쏘아보더니 아리스텔라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 오늘부터 성녀님께 신성 마법을 가르친 사제 노엘입니다. ”

“ 네. 잘 부탁해요, 노엘. ”

노엘과는 구면이었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것은 처음이다. 아리스텔라는 살며시 눈을 내리깔고 노엘을 향해 목례했다.

‘ 나를 시종에서 쫓아낼 때는 언제고, 갑자기 마술 수업이라니……. 성녀님은 대체 뭘 생각하시는 거람? 게다가 기사를 시종으로 데리고. ’

노엘은 기사 앞에서 자신을 망신 준 아리스텔라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신성 마법을 가르쳐보지 않겠냐는 히페리온의 제안을 받았을 때는 조금 의아한 기분도 들었지만, 이제야 성녀가 제 진가를 알아주었다는 마음에 기쁘게 제의를 받아들였다.

아리스텔라에게 무엇을 가르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수습사제일 적 작성했던 일기와, 크리스의 책상을 뒤져 그의 필기 노트까지 털어 수업 계획을 짜온 노엘이었다. 그런데 성녀가 로이드를 데려온 것을 보자 기쁨과 설렘으로 들떴던 기분이 찬물을 뿌린 듯 확 식어버린 것이다.

노엘은 기대감에 차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해왔는데, 성녀는 그가 성기사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이 자리에 데려온 것이 저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여겨 불쾌해했다.

‘ 성기사 따위가 대체 뭐라고……. 아니, 이젠 성기사도 아니지, 참. ’

노엘은 흠흠 목을 가다듬고는 로이드를 향해 말했다.

“ 수업을 시작할 테니 당신은 나가 계십시오. ”

“ 저는 성녀님의 시종입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려면 성녀님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있을 테니 제가 있는 것은 개의치 마십시오. ”

“ 만약의 상황 같은 건 없습니다! ”

만약의 상황이라니, 마치 노엘이 아리스텔라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로이드가 아무리 성기사치고는 뛰어난 신성력과 신성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고는 하나 노엘은 서품을 받은 정식 사제였다. 적어도 신성 마법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는 성기사와는 급이 달랐다.

노엘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

“ 이 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제 소관입니다. 성녀님께서 혹 실수를 하시더라도 제가 수습할 수 있습니다. ”

“ 하지만 마법이 아니라 물리적인 일일 때는……. ”

“ 제 말에 반박하지 마십시오! ”

신전의 기사단장이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기사의 신분도 잃어버린 평범한 남자가 아닌가.

성녀의 시종은 분명 영광된 자리임에 틀림이 없었으나 노엘은 성녀의 스승이었다. 따지고 보면 시종보다 더 급이 높은 것이다.

내내 평사제로만 지내다가 처음으로 대단한 지위에 오른 노엘은 내내 쌓여있던 열등감을 로이드에게 훈계하는 것으로 풀었다.

“ 노엘. 로이드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

“ 성녀님? ”

“ 로이드는 제 시종이고, 제 허락이 없이는 제 곁을 떠날 수 없는 게 당연해요. 로이드에게 할 말이 있다면 제게 말씀하세요. 그는 제 명령밖에 듣지 않으니까요. ”

노엘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할 말을 하는 아리스텔라를 보고 노엘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가 부르르 떨며 표정관리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여워하는 기색은 감춰지지 않았다.

“ 그럼 성녀님께서 이 자를 쫓아내……,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저는 시종이 감시하는 상황에서는 수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

감시라고 할 것도 없고, 로이드가 있다고 해서 수업을 하지 못할 것도 없으나, 노엘은 성기사였던 자와 한 자리에 있는 것이 불쾌했다.

그리고 성녀가 한 번 노엘의 앞에서 성기사를 택했던 적이 있기에, 그녀가 로이드 대신 자신을 택하는 것을 보면서 그때 받은 수모를 씻고 싶었다.

정작 그것이 수모라고는 아리스텔라도 로이드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나, 아리스텔라는 노엘의 유치한 복수심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의 뜻을 따라 로이드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 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로이드. ”

“ 예, 성녀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노엘을 향해서도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돌의 방을 나갔다. 방 안에는 아리스텔라와 노엘, 두 사람만이 남았다.

떼를 써서 로이드를 내보내긴 했지만, 막상 넓은 방 안에 아리스텔라와 단둘이 남게 되자 노엘도 조금 긴장이 되었다. 그는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흘긋 살폈다.

작은 체구에 길에 늘어뜨린 물빛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에 보라색의 눈동자. 살짝 달콤한 향기가 나는 붉은 입술. 옷차림까지 깨끗하게 정돈된 성의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대미사 때와 같았으나, 어쩐지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았다. 여전히 가녀린 몸에 순진한 얼굴인데, 예전처럼 어리바리하고 만만한 느낌이 없다.

“ 노엘. 제게 무엇을 가르쳐 주실 건가요? ”

“ 예? 뭐, 뭐를요? ”

“ 신성 마법의 수업을 하기로 하셨잖아요. 기초부터 가르쳐주시는 게 아니었나요? ”

“ 그, 그랬지요, 참. ”

노엘은 눈을 깜박거리며 머릿속으로 준비해온 수업 계획을 떠올렸다. 수습사제 시절에는 지겹게 들은 기초 수업인데도, 막상 성녀에게 가르치려고 하니 뭐부터 말하면 좋을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 어, 어쩌지? 뭐부터 가르치면 되지? ’

노엘은 열심히 준비한 수업계획이 날아가 버리자 당황했으나 성녀 앞에서 준비한 것을 잊어버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기세 좋게 로이드를 쫓아내 놓고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란 말인가.

“ 음, 일단 제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성녀님께서는 제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시면 됩니다. ”

“ 네, 알았어요. ”

긴장한 노엘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방법에 아리스텔라는 별 생각 없이 수긍했다.

◇ ◆ ◇ ◆ ◇

노엘은 돌의 방 중앙에 있는 푸른 마력석에 손을 짚어 방안의 불을 껐다.

“ 노엘? ”

“ 지금부터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

아리스텔라는 노엘이 갑자기 불을 꺼뜨리자 움찔 놀랐으나, 노엘의 말에 수긍하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신성한 공기로 가득 찬 신전 안의 공간은 어디서건 완전히 깜깜해지는 법이 없었다. 어둠에 눈이 익자 파르스름한 공기가 주위를 밝히는 것이 보였다.

노엘은 아리스텔라로부터 한발 떨어져 손을 모은 뒤, 손바닥 위에 작은 빛의 구슬을 띄웠다.

“ 와아……. ”

노엘의 머리색을 닮아 붉은색을 띤 빛의 구슬은 마치 어릴 적 축제에서 본 유리공예 장인이 유리를 녹이던 것을 연상하게 했다.

“ 만져 보시겠습니까? ”

“ 뜨겁지 않은가요? ”

“ 뜨겁지 않습니다. ”

보기에는 뜨거워 보이는데 괜찮을까. 아리스텔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노엘이 만든 빛의 구슬을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한 빛의 구슬은 마치 털로 뒤덮인 공 같았다.

“ 굉장해……. 무척 부드러워요. ”

아리스텔라는 신기한 듯 반짝이는 눈으로 빛의 구슬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노엘은 조금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간단한 빛의 술법에 감탄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다.

‘ 성녀님과 크리스는 한 살 차이였지. ’

아리스텔라나 노엘이나 크리스나 어차피 고만고만한 나이의 또래지만, 노엘은 수도원의 선배이자 연장자로서 크리스를 가르쳤다. 그러니 아리스텔라에게도 크리스를 대하듯 하면 될 것이다.

비교 대상이 생기니 한결 마음이 누그러진 노엘은 천천히 그녀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 이것을 키우면 방 안을 밝힐 수 있습니다. 성지 순례를 할 때 빛을 밝히는 마력석을 지참할 수 없다면 이런 식으로 빛의 구슬을 만들어 띄우지요. ”

“ 신성력은 뭔가를 빛내는 용도인 거군요. ”

“ 꼭 그 용도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빛의 속성을 띱니다. ”

생각해 보니 아리스텔라를 덮쳤던 촉수 괴물을 공격한 히페리온의 신성력도 흰 빛을 띠고 있었다. 로이드가 만든 빛의 구슬은 그의 머리색을 닮은 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청회색이었다. 어쩌면 사람마다 신성력의 색도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 내 신성력은 무슨 색일까? ’

아리스텔라는 빛의 구슬을 매만지며 제 신성력의 색깔은 무엇일지를 추측했다. 그녀의 신성력도 노엘의 것처럼 부들부들한 형태를 하고 있을까.

“ 정말 신기해요. 뜨거워 보이는데 전혀 뜨겁지 않다는 게. ”

“ 아주 간단한 술법입니다. 신기하게 여길만한 것은 아닙니다. ”

“ 하지만 무척 보드랍고 반짝거리는 걸요. 너무 예뻐요. ”

고개를 들자 노엘과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방안에서 붉게 빛나는 빛의 구슬 때문인가, 노엘의 얼굴이 붉어 보였다.

“ 흠흠, 그렇죠? ”

노엘은 내심 기뻤는지 어깨에 힘을 주고 등을 폈다.

============================ 작품 후기 ============================

84, 85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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