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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마법을 배우다
[83] 신성마법을 배우다
이 신전에 온 뒤로, 아리스텔라는 잠드는 것이 불편했다. 넓은 방안에 혼자 잠드는 것이 어색해서이기도 하지만, 불안함을 안고 잠들 때는 늘 이상한 꿈을 꾸고는 했다.
지금은 그것이 그냥 꿈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 않았던 어떠한 미래 혹은 제 안에 있는 여신 위그멘타르가 경험한 전대 성녀의 기억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불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모르는 남자에게 겁탈당하는 꿈을 꾸는 것이 기분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오늘은 드물게 기분 나쁜 꿈을 꾸지 않고 개운하게 눈을 떴다. 히페리온에게 안겼을 때도 꿈을 꾸지 않고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던 기분이 든다. 이자크와 잠자리를 가졌을 때도 그랬다.
‘ 설마 남자와 밤을 보내야 꿈을 꾸지 않고 편히 잘 수 있는 건 아니겠지? ’
무서운 예감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아리스텔라는 제 몸을 감싼 단단한 팔을 쓰다듬었다. 로이드가 그녀를 안고 있었다.
“ 성녀님. 깨어나셨습니까? ”
졸린 기색이 전혀 없는 로이드의 목소리에, 아리스텔라는 흠칫 놀라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 로이드.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어요? ”
“ 해가 뜰 적부터……. ”
“ 네? 그럼 저를 깨우지 않고……! ”
시종이 주인을 깨울 수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리스텔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로이드의 팔을 베고 누운 채였다. 아무리 체격 차이가 있다고는 하더라도 이래서야 팔이 저리지 않을까.
아리스텔라는 미안함과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로이드도 따라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들었다.
“ 로이드……. ”
“ 예, 성녀님. ”
그의 팔을 베고 잠든 아리스텔라를 깨우지 않기 위해 내내 가만히 있느라 로이드도 아직 알몸이었다. 침대 위에서 그의 몸을 보았을 때도 민망했는데, 이렇게 밝은 햇살 아래서 바라보니 더욱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돌리며 이불로 몸을 가렸다.
“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
보통의 연인이라면 하룻밤을 함께 보낸 뒤에는 무슨 말을 할까. 아침 인사를 건네며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일까?
어릴 적에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또래 친구와 깊은 교류를 하지 않았던 아리스텔라는 연인이나 부부가 어떻게 일상을 공유하는지 알지 못했다.
‘ 진짜 연인 사이도 아니니까,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
그렇게 격렬하게 몸을 섞으며 사랑을 나누고는, 아침이 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인과 시종의 관계로 되돌아간다. 아리스텔라는 그 점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아리스텔라에게 성의를 입히기 위해 다가온 로이드의 표정은 평소보다 산뜻했다. 그것이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 만족한 남자의 얼굴이라는 것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그저 로이드의 컨디션이 좋은 것 같다고만 생각했다.
‘ 나는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로이드는 기분이 좋은 것 같네. ’
로이드가 깨끗하게 개인 성의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아리스텔라는 몸을 가린 이불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로이드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 잠든 아리스텔라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쌕쌕 숨을 내쉴 때마다 가볍게 오르내리던 어깨를 안고, 두근거리는 가슴의 고동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니, 이전이라면 상상조차 못했을 일이다.
기사도를 어긴 벌로 직위를 잃었음에도 자신이 이런 행운을 누려도 되는지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로이드는 여전히 그녀에게 용서를 비는 중이었고, 자신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야 했기에 가능한 한 속내를 내비치지 않으려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평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 로이드, 눈 감으세요. ”
“ 예? ”
날이 너무 밝아서 벗은 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자신은 이렇게 심란한데 로이드 혼자 개운한 표정인 것이 억울해서, 아리스텔라는 심술을 부렸다.
“ 크리스는 눈을 가리고 제게 옷을 갈아입혀 줬거든요. 그러니 로이드도 그렇게 해야 해요. ”
크리스가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준 것은 이곳에 온 첫날뿐이고, 아론이나 조슈아나 케인이나 히페리온은 그녀의 착의와 탈의를 도울 때 한 번도 눈을 가린 적이 없었으나 아리스텔라는 그 점을 말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기로 했다.
“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
줄곧 성녀의 곁에는 다가가지도 못하다가 한 번 그녀를 안고는 내내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 그간 시종이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 로이드가 알 턱이 없었다. 로이드는 아리스텔라가 억지를 부리는 줄도 모르고 얌전히 눈을 감고 그녀의 어깨에 성의를 둘렀다.
간밤에 안아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만지는 그녀의 몸은 참으로 가녀렸다.
이 작은 몸으로 어떻게 자신을 구해내고 괴물이 된 크리스를 정화한 것일까.
로이드는 무서운 꿈을 꾸고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떨기만 하던 가엾은 아리스텔라가 어느새 어엿한 성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아쉬워졌다.
가느다란 팔에 소매를 끼우고, 보드라운 가슴 위로 천을 덮어 여며주자 옷섶이 착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신성력으로 지어진 옷이기 때문인가, 확실히 그가 입고 있는 평범한 옷과는 달랐다. 허리띠를 묶는 것까지 마친 로이드는 눈을 뜨고, 새하얀 성의를 입고 있는 아리스텔라를 내려다보았다.
“ 아름다우십니다, 성녀님. ”
“ ……보통 눈을 감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서 헤매는데, 로이드는 그런 것도 없네요. ”
“ 헤맬 리가 없지 않습니까. ”
크리스가 처음 아리스텔라의 옷을 갈아입힐 때는 여자의 몸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도 몰라 여기를 짚었다 저기를 만졌다 수난을 겪었지만, 밤새 그녀의 몸을 탐했던 남자는 눈을 감고도 사랑하는 여인의 몸을 완벽히 그려낼 수 있었다.
로이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아리스텔라 앞에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겠다 말했으나 타고난 자신감은 숨길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자신만만해지는 것은 남자의 본능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리스텔라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잘 보이고 싶은 남자의 태도를 거만함으로 오해하고 말았다. 전날까지 제게 전전긍긍하던 남자가 하룻밤을 보냈다고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 그녀는 로이드로부터 홱 몸을 돌려 문가로 향했다.
“ 성녀님? ”
“ 제게서 한 발짝 떨어져서 따라오세요. 옆에 달라붙는 건 금지하겠어요. ”
“ 예? 예……. ”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아리스텔라가 어쩐지 화가 난 것 같다고 판단한 로이드는 얼른 제 행동에 무례한 점이 있었는지를 되짚어 보았으나 걸리는 부분이 없었다.
알몸의 그녀를 빤히 쳐다본 것도 아니고, 옷을 갈아입히면서 엉큼하게 몸을 더듬었던 것도 아니며, 옷을 차려입은 그녀에게 칭찬의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함께 밤을 보냈다고 추근거리며 달라붙지 않고 당당하고 남자다운 태도로 일관했다.
‘ 이상하다. 잘못한 점이 없는 것 같은데. ’
어쩌면 표정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그녀에 대한 사심을 내비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쾌하게 여긴 것일까. 로이드는 앞으로는 더욱 철저하게 표정 관리를 하며 그녀의 시종으로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아리스텔라의 뒤를 따랐다.
◇ ◆ ◇ ◆ ◇
“ 신성 마법을 배우고 싶으시다고요? ”
“ 네. 저는 제 신성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전혀 모르거든요. ”
정오 미사를 마치고 대신관의 사실을 찾아온 아리스텔라의 요청에 히페리온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 저는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체력이 강한 것도 아니니, 성서를 연구하거나 고행을 버티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서요.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면 사제분들이나 성기사분들께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
크리스를 정화한 것은 분명 그녀의 신성력이 그에게 감응한 것이었으나, 아리스텔라는 제가 어떻게 크리스를 정화했는지 알지 못했다.
성녀로서 신전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사제의 계율을 따르며 절제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음욕의 여신을 품은 몸으로 절제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조슈아처럼 치유 마법을 쓴다거나, 히페리온처럼 강력한 정화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면 만약 어제처럼 위험한 괴물이 나타나 누군가 상처 입더라도 괴물을 물리치고 다친 사람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은 신성력으로 옷도 지어낼 수 있었는데. ’
뭔가 유용한 물건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아리스텔라는 제 신성력으로 사제와 기사들이 함께 즐길 수 있을 법한 물건이나 기구를 만들어 이 황량한 신전을 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성녀님께 신성 마법을 교육할 만한 사제라……. ”
“ 꼭 뛰어난 분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어차피 저는 초심자니까, 기초부터 배워야 하잖아요? ”
히페리온처럼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인 만큼 그에게 배우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히페리온은 이 신전의 대신관이다.
‘ 사제와 성기사를 모두 통솔해야 하는 대신관님께 개인 교습의 시간까지 내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부탁이겠지. ’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판단하고는 히페리온에게 다른 사제를 소개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고, 그 바람에 히페리온은 더욱 고민에 빠졌다.
조슈아는 치유 마법에 능했다. 그의 치유능력만은 히페리온 이상이었으나, 그의 마법 구사력은 노력보다는 재능의 영역이었기에 조슈아가 아리스텔라를 잘 가르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게다가 조슈아와 성녀가 친한 것이 내심 보기 불편했던 히페리온은 선뜻 조슈아를 추천할 수가 없었다.
‘ 조슈아 신관을 제외하면, 이 신전에서 가장 월등한 수준의 신성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아론 신관인데. ’
아론은 사제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관이었다. 사제에 한정한다면, 히페리온보다는 아론에 대한 인기가 더 높았다. 그런 그에게 성녀의 교육을 맡긴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그는 성녀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성녀와 성기사가 만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으로 접촉 방법을 차단할지도 모른다.
성녀가 사제와 성기사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고 입장을 밝히고, 사제들이 그것을 어떻게든 뒤집으려고 벼르고 있는 것을 아는 이상, 히페리온은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성녀의 교육 담당이 된다는 것은 신전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과 비슷한 급의 신관에게 맡긴다면 권력이 한쪽에게로 쏠릴 위험이 있었다. 그랬다가는 대신관인 자신조차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얻게 될 테니, 차라리 평사제에게 맡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고 히페리온은 생각했다.
게다가 성녀는 마법을 배운 적이 없는 초심자가 아닌가. 그녀 스스로도 반드시 뛰어난 사제일 필요는 없다 말했으니, 능력이 있는 신관보다야 이제 갓 정식 사제가 된 젊은이를 붙여주는 편이 그녀가 대하기도 불편하지 않아 차근차근 기초부터 배우기에 좋을 것이다.
“ 그렇다면 성녀님, 노엘 사제에게 신성 마법을 배워 보시면 어떻습니까? ”
“ 노엘이요? 전에 제 시종이 될 뻔 했던? ”
“ 예. ”
붉은 고수머리를 길에 땋아 늘어뜨린, 강아지 같은 인상의 사제였다. 그녀가 성기사들을 이끌고 미사실로 쳐들어갈 때 새파랗게 질려서 기겁하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케인을 시종으로 두겠다 말했을 때, 분해하던 얼굴도.
“ 네, 좋아요. ”
아리스텔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강한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밀고 나갔지만, 이제 와서 되짚어보면 노엘에겐 실례가 되는 행동을 했다. 노엘도 이 신전의 사제이며 그녀를 따르는 종인 이상 안 좋은 감정을 오래 품게 할 수는 없었다. 이 기회에 사과하고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좋겠지.
“ 노엘 사제는 크리스의 수련원 선배로, 친한 사이랍니다. ”
“ 어머, 그거 잘 됐네요. ”
크리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해 흔쾌히 노엘을 자신의 교육 담당으로 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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