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80화 (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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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진실

[80]

책임으로부터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의식이 없었다고 변명하며 제 추한 모습을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경멸당하는 것은 싫었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가 성욕을 느끼는 것도, 남자와 관계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도, 절정을 느끼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여신 위그멘타르의 음욕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여신의 현신인 성녀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자신을 혐오해서는 안 된다고.

아리스텔라가 제 욕망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상, 그녀의 종들도 주인의 모습을 받아들여주길 원했다. 정말로 그들이 성녀를 인간이 아닌 신으로 여긴다면,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자신의 행동도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주인 대접을 바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던 사람들이 음란한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경멸하는 시선을 보낸다면 부끄럽고 무섭고 슬퍼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 저는 당신에게 경멸당하고 싶지 않아요……. ”

“ 성녀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

쥐어 짜내듯 호소하는 목소리에, 로이드는 바닥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는 성녀님의 종. 당신을 숭배하고, 당신을 흠모하며, 경애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

“ 그, 그렇게까지 거창하게는 안 하셔도 돼요! ”

아리스텔라는 민망했는지 손을 저으면서 로이드에게 고개를 들도록 했다. 성기사의 지위를 잃었기에 무장 허락을 받지 못한 로이드는 여전히 간편한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아리스텔라가 처음 안기던 날과 마찬가지로.

“ 저기, 로이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

“ 예, 성녀님. ”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텔라의 작은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아리스텔라가 보여준 모습은 성스러운 여신의 현신 그 자체였음을 로이드는 잊지 않았다. 그녀의 몸 안에 깃든 것이 음욕의 여신이라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로이드의 눈앞에 앉아있는 아리스텔라는 여전히 가녀리고 아름다웠으며 자애로웠다.

그리고―

“ 아직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

갑작스럽고 엉뚱한 말로, 늘 그를 놀라게 한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아리스텔라에게는 그 잠깐의 시간이 무척 길고 무겁게 느껴졌다. 발치에 놓인 간이 테이블의 불빛이 흔들리는 것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로이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녀님. ”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리스텔라는 놀라고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 다음에는 침대에서 억지로 범하려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이라 생각해 속상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짧은 말에 담긴 진심을 간파하지 못할 만큼 불안한 상태도, 절망한 상태도 아니었다.

“ 그럼, 저기……. ”

사람의 진심은 눈빛에서 드러나고, 진심의 표현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아리스텔라는 열이 오르는 뺨을 톡톡 두드리고는, 수줍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 나를, 안고 싶은가요? ”

“ 성녀님……! ”

아리스텔라는 알고 싶었다. 크리스나 이자크에게 강제로 안겼을 때,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고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어째서 로이드에게 강제로 안겼을 때는 의식이 날아가지 않았던 것일까.

“ 저, 그때 로이드에게 안긴 기억이 날아가지 않고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거든요. 그래서……. ”

“ 제게 안긴 기억이요? ”

“ 네. 으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

끔찍한 기억이어야 할 텐데,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다리 사이가 젖어든다. 황당할 정도로 욕망에 솔직한 몸이라지만, 그렇게나 강렬한 쾌감을 느낀 것은 그저 아리스텔라의 몸이 성욕에 약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로이드와의 섹스를 잊는 것이 어려운 것은, 그때의 경험에서 느낀 무언가의 정체를,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 한 번 더 당신에게 안기면,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

그때처럼 로이드에게 안기며 쾌감을 느끼고 절정에 오르면, 두려움과 절망 때문에 초조해져 놓쳐버렸던 무언가를 다시 붙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 불완전한 욕망의 기억이 완전해지면,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거리며 콕콕 쑤시는 이 감각도 사라질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 아, 이건 명령이 아니니까요! 싫으면 절대로……, 흡! ”

주인과 종의 관계는 결코 동등하지 않으니, 성녀의 발언이 시종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뒤늦게 자신과 로이드의 처지를 깨달은 아리스텔라는 말을 수습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뜨거운 입술이 입술을 덮고 소리를 삼키듯 빨아들이면서, 커다란 손으로 가녀린 어깨를 안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 로, 로이드……. 으응……. ”

조금 주저하며 밀어내려던 작은 손짓은 각도를 바꾸어 깊게 입 맞춘 것만으로 멈추었다. 맑은 보랏빛의 눈동자를 눈꺼풀이 덮고 긴 속눈썹이 내려앉자, 로이드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촉촉한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 으응, 응……. ”

아리스텔라는 당혹스러운지 제 입안에 파고드는 로이드의 혀를 피하며 도망 다니다가, 마지못해 혀를 살짝 내밀어 그와 혀를 맞대었다. 작고 보드라운 혀를 혀끝으로 두드렸다가 제 것으로 얽어 끌어당기자, 아리스텔라의 아름다운 미간이 일그러지면서 따뜻한 숨이 흘러나왔다.

“ 후우……. ”

로이드가 몸을 일으켰다. 로이드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침대에 앉아있던 아리스텔라를 끌어안은 상태였기에, 두 사람은 조금 불편한 자세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바닥에서 일어난 그는 아리스텔라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위로 천천히 몸을 겹쳤다.

“ 로이드, 저기 억지로 따르진 않아도……. ”

“ 어째서 제가 억지로 따른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리스텔라를 사랑한다고 로이드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것은 신을 섬기는 종으로서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인을 가슴에 품은 남자로서 건네는 진심을 담은 고백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 입을 맞추며 몸을 섞는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품는 당연한 욕망이 아니었던가. 로이드는 아리스텔라의 뺨을 쓰다듬으며 웃어 보이고는 다시 입술을 겹쳤다.

“ 읏, 흐응……! ”

집요하게 혀를 뒤섞다가 그녀가 괴로워하면 입안을 탐하던 움직임을 멈추고 쪼는 듯한 입맞춤을 반복했다.

아리스텔라는 혀를 섞는 것보다 입술을 비비는 감촉이 기분 좋은지 로이드가 부드럽게 입을 맞춰올 때마다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그의 목 뒤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부서질 것처럼 가녀린 팔도 따스한 체온도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아리스텔라에겐 예전처럼 로이드를 거부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해서는 아닐지라도, 로이드라는 한 남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제 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준다. 그 사실만으로도 로이드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 하으응……. ”

겨우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따스한 한숨이 흘러 나왔다. 입맞춤만으로 흥분했는지 아리스텔라의 뺨이 빨갛게 물들고 눈가가 젖어 있었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났다.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그 향기가 어떻게 하면 짙어지는지, 로이드는 알고 있었다.

“ 성녀님. 제게 안긴 기억이 잊히질 않았다고 하셨습니까. ”

“ 네, 네에……. ”

“ 어째서 제게 한 번 더 안긴다면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 네? 그건……. ”

아리스텔라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조, 좋았으니까요……. ”

“ 기분이 좋으셨습니까? ”

로이드에게 강제로 안길 때만 하더라도, 아리스텔라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을 믿지도 않았다. 몸은 쾌감을 느껴도 마음은 그저 비참할 뿐이었다.

하지만 제 몸이 어째서 이런 욕망을 느끼는지를 깨닫고, 히페리온에게 연인 흉내를 내며 안아달라고 말한 순간부터 그녀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말했던 ‘ 사랑한다 ’는 고백을 듣고 나니 로이드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로이드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정말로 사랑을 나누는 연인처럼 안길 수 있지 않을까. 괴로워하지 않고, 수치스러워 하지도 않고, 제 안의 욕망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 ……네……. ”

부끄러워하면서도 솔직하게 대답하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은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의 아름다운 주인은 연약하면서도 강인했고, 수줍음이 많으면서도 담대했다. 남자를 어려워하면서도, 그녀를 사랑한다 말하는 남자의 고백을 도망치지 않고 들어 주었다.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된 자신은 얼마나 행복한 남자인가. 로이드는 벅차오르는 기쁨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진심을 행동으로 증명할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 앞으로도 잊지 못하게 해드리겠습니다. ”

자신만만하게 씩 웃어 보인 남자는, 양 뺨을 새빨갛게 물들인 여자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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