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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진실
[79] 밤의 진실
아리스텔라가 눈을 뜬 것은 제 방의 침대 위에서였다. 언제 해가 떨어졌는지 창밖은 깜깜했고, 취침을 방해하지 않을 작은 등불이 간이 테이블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지하에서 올라온 건가? ’
크리스를 정화하고 로이드와 히페리온이 자신을 부르며 달려온 것을 본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무사히 돌아온 것일까. 어쩌면 지하에서 겪은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은 아닐까.
불안해진 아리스텔라가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이드가 천천히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 성녀님, 깨어나셨군요. ”
“ 로이드……. 저기, 크리스는요? ”
“ 히페리온 대신관과 함께 사제들의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
크리스는 무사히 돌아온 걸까. 기절한 자신을 데리고 히페리온과 로이드는 어떻게 지하에서 빠져나온 것일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말끔한 얼굴을 보고 하려던 말을 잊어 버렸다. 분명 지하에서 괴물과 싸우느라 상처를 가득 입었는데, 로이드의 상태는 멀쩡했다. 히페리온이 신성 마법으로 치료해준 걸까?
“ 로이드. 상처는요? 치료는 받았나요? ”
“ ……기억을 못 하시는군요. ”
로이드가 쓰게 웃으며 아리스텔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고운 이마가 드러났다. 그 정중하고 따스한 손길에서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상처가 깨끗하게 나았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 성녀님께서 타락한 크리스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죽음이 기운이 가득한 지하를 정화하면서 제 상처도 치유되었습니다. ”
마법을 사용하는 법을 모른다 하더라도 신성 마법이란 결국 신성력을 이용해 치료하는 것이다. 아리스텔라가 제 신성력으로 신전의 지하를 정화하면서, 크리스의 고갈된 신성력이 채워지고 로이드의 상처가 나은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 제가……. 제가 그런 일을 한 거군요. ”
로이드의 말을 듣고도 아리스텔라는 믿을 수가 없었다. 뭐 하나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초심자인 자신이 정화와 치유를 해내다니. 마법을 배운 적도, 사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아리스텔라로서는 제가 무슨 방법으로 신성력을 쏟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힘이 이루어낸 결과만이 그 과정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 성녀님께서 갑자기 큰 힘을 사용하느라 지친 거라고 히페리온 대신관이 그러더군요. 휴식을 취하면 자연히 회복될 거라고 합니다. 더 주무십시오. ”
“ 아뇨. 졸리진 않아요. ”
아리스텔라는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로이드가 넘겨둔 앞머리가 다시 앞으로 흘러내려 하얀 이마를 가렸다. 아리스텔라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기만 한 성녀의 방은 어둡고 고요했으나, 예전처럼 적막하고 쓸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작은 등물이 어둠을 밝히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로이드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기 때문일까.
“ 로이드는 계속 제 곁에 있었던 건가요? ”
“ 저는 성녀님의 시종이니까요. ”
“ 으응……. ”
크리스를 되돌리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분명 머리도 엉망이었고 옷도 반쯤 벗겨진 상태였는데, 지금은 옷차림도 정돈되어 있고 몸도 깨끗하고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빗어 내린 상태였다.
“ 제가 자면서, 혹시 이상한 소리를 하지는 않던가요? ”
“ 아니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
다행히 의식을 잃은 동안 여신 위그멘타르가 뛰쳐나와 이상한 짓을 하거나 야한 꿈을 꾸면서 잠꼬대를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리스텔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죽 그가 그녀의 곁을 지킬 것이다. 기사도를 어기고 시종이 된 남자가 음욕의 여신을 품은 성녀를 주인으로 섬길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주인으로서, 가장 가까이에서 제 곁을 지킬 남자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 로이드.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에게 말해야 할 것이 있어요.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했다. 여신 위그멘타르의 음욕은 인간의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아리스텔라는 여신에게 이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제 몸을 지킬 수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욕구의 충족과 마음의 안정이 그 방법이었다.
“ 예전에, 알몸으로 당신의 방에 찾아갔던 때 말인데요……. ”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지를 고민하던 아리스텔라는 모든 일의 시작이 된 사건의 뒷사정부터 설명하기로 했다.
첫 기도를 무사히 마치고 나와 보니 그녀의 시종이던 케인이 사라졌던 것과, 크리스가 사제들의 명령을 받고 그녀를 빈방에 가둔 것과, 크리스에게 안기려는 순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그에게 범해진 뒤였던 것. 그리고 케인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알몸으로 기사단까지 찾아왔다가 로이드와 맞닥뜨린 것까지.
설명을 듣고 난 로이드는 눈을 크게 뜨고 굳은 얼굴로 아리스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성녀님……. ”
“ 여, 역시 믿기 어려운가요? 그렇지만 거짓말이 아닌데……. ”
재앙의 여신 위그멘타르가 사실 음욕의 여신이고, 남자에게 안길 때에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 안의 여신이 깨어난다는 이야기는 문란한 생활을 일삼는데 참으로 편리한 변명처럼 들릴 것이다. 어쩌면 그녀를 더러운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로이드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부르르 떨더니, 아리스텔라에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 어째서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
“ 네? 그렇지만, 저기……. 로이드가 들으려고 안 했잖아요. ”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냉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버벅거리긴 했지만, 로이드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더라면 결국 오해 없이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로이드는 무척 분노하여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아리스텔라는 제게 일어난 황당한 일을 차분히 정리해서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냉정한 상태가 아니었다.
“ ……크윽! ”
로이드는 성급하게 아리스텔라를 몰아붙이고 강제로 범한 과거가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런 일을 겪고, 남에게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성녀라고는 해도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 뿐인 처녀였다. 제 안에 봉인된 것이 음욕의 여신이고, 쉽게 흥분하여 성욕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남자에 서투른 아리스텔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입에 담기까지는 또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 것인가.
“ 눈치채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 으음, 아뇨. 그렇다고 눈치채는 것도 부끄러운데요……. ”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멋대로 몸이 반응하는 것도 황당하지만, 그 황당한 상태를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도 부끄러웠다. 아리스텔라로서는 로이드가 그녀를 오해하는 것도, 눈치 빠르게 그녀의 속사정을 낱낱이 간파하는 것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 그리고 저……. 로이드가 추측한 것도,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요. ”
“ ……예? ”
손가락 끝에 머리카락을 감아 빙빙 꼬며 머뭇거리던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 케인……이랑도, 했거든요. 그땐 제가 기억이 없었지만, 그 이후에도……. ”
결국 그날 정사를 겪었던 것도 맞고, 케인과 관계를 가졌던 것도 맞았으며, 몸이 반응했다고는 하나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원해서 관계를 가진 것도 맞았다.
로이드가 이해한 방향은 이상했으나 그가 이해한 것 하나하나는 사실 틀린 것이 없었다.
“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또 생길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 생기겠죠……. ”
쾌락에 약한 몸은 적은 자극만으로도 금방 흥분해서 더욱 큰 자극을 얻으려 들 것이다. 그 욕구를 부정하면 정신이 날아가고, 긍정하면 제 수치스러운 모습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다가 신전의 모든 남자와 관계를 가져버리면 어떻게 하나. 그것이 아리스텔라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 로이드는 제 시종이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서, 제 그런 모습을 봐야 할 거예요. ”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은빛의 성기사에게, 짐승처럼 쾌락에 들떠 헐떡이며 벌거벗은 몸을 내보여야 하는 상황은 분명 또 찾아올 것이다.
“ 그러니까 하나만 명령을 내려도 될까요? ”
“ 명령……말입니까. ”
다른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것을 감내하라는 것일까. 로이드는 긴장한 듯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고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무엇이든,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
“ 제가 추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경멸하지 말아주세요……. ”
“ ……예? ”
결연한 표정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그는 자주색 눈을 깜박이며 아리스텔라에게 되물었다.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움찔거리다가 고개를 숙인 채 조금 빠르게 말을 뱉었다.
“ 제가 막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행동을 하더라도! 경멸하지 말아달라고요. ”
“ 성녀님. ”
“ 제가 주인으로서 명령하고 싶은 건, 그것뿐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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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80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