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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자의 열망
[78]
크리스는 아리스텔라에게 마음을 고백한 후로, 그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끌어안고 몸을 만지고, 살을 섞으려고만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육체가 이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육체의 이끌림이 언제나 사랑인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텔라는 제대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크리스에겐 마음을 증명할 책임이 있었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마음을 짓밟고 몸을 취하려는 것의 어디가 사랑이라는 말인가. 아무리 아리스텔라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더라도, 크리스가 비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 이런 식으로 멋대로 행동하지 말고, 대화를 하자고요……! ”
“ 성녀님은, 성녀님은……!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
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붉은 벽이 꾸물거리더니 아리스텔라의 몸을 더듬던 하얀 손이 쏙 숨어버렸다.
멋대로 방에 숨어들어 몸을 만지고 억지로 안고서, 꼴도 보기 싫다는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도망친 비겁자.
사랑에 서투르다고는 하나 크리스를 배려하기엔 아리스텔라도 사랑의 초심자였다. 주인으로서 종을 대하는 것도, 여자로서 남자를 대하는 것도. 모든 것이 처음인 아리스텔라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감정은 너무나도 무겁기만 했다.
그래도 아리스텔라는 피하지 않았다. 여신 위그멘타르가 제 몸으로 저지른 짓에 대한 책임을 지려 했고, 육욕에 정신을 잃지 않도록 욕구를 풀면서도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이려 했다.
크리스는 그러한 노력을 했던가.
“ 겁쟁이……! ”
아리스텔라는 화가 났다. 하얀 손이 숨어버린 장소로 다가가, 꿈틀거리는 붉은 벽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 이 겁쟁이! 숨지 말고 나와요! ”
“ 흐윽, 흑……. 저를 보기 싫다고 하셨잖아요……. ”
“ 그럼 보고 싶게 만들라고요! 나를 사랑한다면서, 그런 것도 못 하나요? ”
싫다는 여자를 억지로 안을 용기는 있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망설이는 여자를 설득할 용기는 없다니. 그런 비겁한 변명이 어디 있는가. 아리스텔라는 용감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변명하는 일만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이었기에.
“ 나와요, 크리스! ”
아리스텔라는 큰 소리로 크리스를 부르며 벽을 두드렸다. 붉은 벽의 너머에서 심장 박동 같은 것이 들려왔다.
“ 제대로 내 눈을 보고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그리고……! ”
그것이 점점 빨라진다. 마치 제 심장처럼 크게 쿵쾅거린다.
“ 그리고 나한테, 제대로 고백하라고요! ”
쩌억.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고 생각했던 붉은 벽이 열리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금발의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지만, 가느다란 금발과 뽀얀 피부, 늘씬하면서도 쭉 뻗은 팔다리는 아리스텔라가 기억하는 크리스의 모습 그대로였다.
“ 크리스. ”
“ 흐윽, 흑……. ”
“ 크리스. 울지 말고 나를 보세요. ”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 크리스는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코끝이 발갛게 되고 뺨이 눈물로 얼룩진 것을 보니 정말로 한참을 울고 있었나 보다.
“ 정작 울어야 할 나는 참고 있는데, 뭘 잘했다고 울어요? ”
“ 흐윽! 잘못……, 했어요……. ”
“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죠? ”
아리스텔라는 울고 있는 크리스의 양 뺨을 감싸 들어올렸다. 그녀를 안을 때는 여인을 안기 충분한 남자의 몸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연약하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 역시 연하의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 크리스. 다시 한 번 말해보세요. ”
“ 성녀님……. ”
“ 나를 사랑하나요? ”
남자 사제가 여자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아리스텔라도 알고 있었다. 수습사제인 크리스는 여자를 가까이 할 일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그녀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 사랑해요, 성녀님……. ”
“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했어요? 날 괴롭히기만 하고……. ”
“ 흑, 그건……. 성녀님이 저를, 계속 괴롭혔으니까……. ”
그녀의 의식이 없을 때, 여신 위그멘타르가 아리스텔라의 몸을 차지하고 있을 때 크리스에게 뭔가를 했던 걸까.
“ 제가 모르는 사이에 당신을 괴롭혔나요? ”
크리스는 어깨를 떨며 흐느끼다가, 눈을 깜박여 눈물을 떨구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 아니에요. 성녀님은 저를 괴롭히지 않았어요. ”
“ 그러면 무엇이 당신을 괴롭게 했나요? ”
“ 제 마음이……. ”
크리스는 제 가슴에 손을 짚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욱신거리며 조여들자 또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고, 사제는 신의 종으로서 신의 사랑을 세상에 전파한다. 그것이 신에게 육신과 영혼을 바친 자가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인간의 모습은 신의 모습을 본 딴 것이고, 인간의 감정은 신의 감정을 나누어 받은 것이니, 인간의 사랑 또한 신의 사랑의 한 형태이리라.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괴로운 것일까.
“ 제 마음이, 타락해서……. 그래서 저를 괴롭게 한 거예요. ”
“ 타락했다고요? 어떻게요? ”
“ 성녀님을 바라보면, 가슴이 뛰어요……. 막, 심장이 터질 것처럼……. 괴로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
욕구를 자제하는 것은 사제의 아주 기본적인 덕목이었다. 아직 수습사제라고는 하나 크리스는 의식기간 내내 금식하는 것도, 밤을 새우는 것도 잘 인내했다. 기도 중에는 때로 미동조차 않고 몇 시간을 무릎 꿇은 그대로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괴롭긴 했지만, 지금처럼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리스텔라를 보면 자제가 되지 않는 것인가. 마치 심장이 가슴 밖으로 뛰쳐나가 혼자서 내달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참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안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 왜, 왜 이토록 괴로운 걸까요? 신께서 내린 사랑은 분명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
자신이 타락했기에 아름다운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크리스는 내내 괴로워했다. 아리스텔라의 사랑스러운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안으려 들면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찡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사랑하는 여인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크리스는 단 하나밖에 알지 못했다. 여신 위그멘타르가 가르쳐 준 육체의 쾌락. 아리스텔라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크리스는 그저 제가 알고 있는 단 한 가지 방법만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쾌락의 절정을 느낀 순간에도 그를 부정했다.
더는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없다. 그것을 깨달아버린 크리스는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폐쇄된 신전에서는 달아날 곳조차 없었으나, 크리스는 예전 아리스텔라와 밤 산책을 하다가 들어간 지하를 떠올렸다.
그 축축하고 깊은 어둠 속에 숨어버리면 아무도 크리스를 찾지 못할 것이다. 두려움으로부터, 제가 지은 죄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옹졸한 겁쟁이는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는 죄를 지은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안도했다. 죽음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만을 몇 번이나 되뇌며 깨고 잠들었다.
그러다 문득 제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어째서 자신은 케인처럼, 로이드처럼, 다른 성기사처럼 아리스텔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친 비겁자는 제 잘못을 제가 아닌 주변의 모든 것으로 돌려버렸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곁에는 멋진 용모와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자들이 가득했다. 그들과 나란히 서기엔 제 모습이 너무나 작고 초라한 까닭에 사랑받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아름답고 상냥한 여신은 다시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을까.
크리스는 이 신전의 모든 사제와 성기사를 죽이고 제가 유일한 종이 되기를 소망했다. 망상이 확신이 되는 순간, 첫사랑에 가슴을 앓던 소년은 무책임한 괴물에 마음을 잡아먹혔다.
“ 저는, 저는 역시 타락한 종이에요……. 성녀님. 타락한 종에게 벌을 내려 주세요……. ”
“ 당신은 처벌조차 남에게 미루는 건가요? ”
“ ……네? ”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얼마나 운건지, 퉁퉁 부르튼 입술은 사랑하는 여인의 입맞춤을 받고도 그대로 굳어있기만 했다.
“ 어떤 벌을 받고 어떻게 반성할지는 당신이 선택하세요, 크리스. ”
“ 성녀님……. ”
“ 제게 미움 받는 것이 싫다면, 제게 용서받도록 노력하세요. 그게 제가 당신에게 내리는 벌이니까. ”
도망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곁에 남아서.
“ 당신은 저의 종이잖아요? 그러니까 함부로 도망치면 안 돼요. ”
“ 제가……. 제가 성녀님의 곁에 있어도 되나요……? ”
“ 떠나도 좋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의 코끝에 제 코를 비비며 생긋 웃었다. 훌쩍거리던 소리가 차츰 잦아들더니, 무릎을 감싸고 있던 손이 내려와 가녀린 어깨에 얹어졌다.
“ 성녀님……. 저는 당신의 종. 영원히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 ”
크리스가 아리스텔라를 끌어안았다.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붉은 내벽이 무너지고, 징그럽게 꿈틀거리던 희고 붉은 촉수들이 녹아내렸다.
투둑. 투둑. 단단하게 감싸고 있던 껍질마저 조각나 빛으로 화하자, 파르스름한 빛으로 가득 찬 지하의 통로가 드러났다.
“ 성녀님! ”
내내 밖에서 아리스텔라를 부르던 로이드와 히페리온이 껍질이 무너진 것을 보고 그녀를 향해 뛰어왔다. 그리고는 아리스텔라를 안고 있는 크리스를 보고 움찔 놀라 물러섰다.
“ 성녀님. 설마, 정화를 하신 겁니까? ”
“ 헤헤. 제가 해냈어요…….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을 향해 미소 짓고는, 스르륵 눈을 감아버렸다.
타락한 종의 정화에 힘을 쏟느라 제 마음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한 초보 성녀는 저를 부르는 세 남자의 외침 속에서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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