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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자의 열망
[77]
이 신전의 주인은 성녀였고, 폐쇄된 신전에서 성녀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아리스텔라는 크리스를 버린 적이 없었으나 크리스는 그녀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상충되는 인식과 감정이 신성력에 결함을 일으켜 그를 무너뜨렸다.
감당하지 못한 사랑의 감정에 잡아먹힌 젊은 사제가 괴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 꺄아아악! ”
새하얀 촉수가 꿈틀거리면서 벽을 기어다니며 그녀에게 달라붙으려는 것을 로이드가 급하게 쳐냈다. 이어서 히페리온이 신성 마법으로 아리스텔라에게 접근하는 촉수를 터뜨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촉수를 터뜨려도, 촉수는 금방 재생해버렸다. 오히려 재생될 때마다 점점 질기고 단단해지면서, 붉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지하에 살던 검붉은 촉수 괴물은 얼마만큼의 파괴와 재생을 반복한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끔찍한 모습이 되어버린 제 첫 시종의 모습을 바라보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 로이드! ”
“ 성녀님, 다가가면 위험합니다! ”
촉수에 휘감긴 로이드를 쫓아가려던 아리스텔라를 히페리온이 저지했다. 로이드는 제 몸을 감아오는 붉은 빛의 촉수를 응시하며 이것을 대체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뇌에 빠졌다.
핵을 노리면 괴물을 잠재우는 것은 간단했다. 이전에 괴물을 처치했던 것처럼, 저 핵을 붙잡아 터뜨리면 괴물은 힘을 잃고 무너져 내려 시체로 변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크리스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능욕하는 죄를 지은 자신마저 받아들이지 않았나. 로이드는 크리스를 죽게 할 수 없었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크리스를……, 크리스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없나요? ”
“ 성녀님……. ”
“ 괴물이 되어버리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는 거예요? 방법이 있을 거 아니에요! ”
타락한 성녀를 정화하기 위해 사제들이 베푸는 정화의 의식은 거짓이었다. 타락한 존재를 정화한다는 것은 곧 신의 곁으로 되돌린다는 뜻. 이미 신의 은총을 잃고 괴물로 전락해버린 인간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방법 같은 것은 히페리온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아리스텔라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적어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아마 그때부터 이미 크리스는 타락한 상태였을 것이다.
히페리온은 크리스의 신성력을 좇아 들어온 지하 통로에서 갑자기 그의 신성력이 끊겼을 때, 이미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 성녀님. 물러나세요. ”
“ 히페리온 대신관님! ”
“ 크리스가 더 타락하기 전에, 제가 정화하도록 하겠습니다. ”
히페리온의 결연한 표정으로부터, 아리스텔라는 그가 타락한 크리스를 없애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읽어냈다.
“ 안 돼요! 크리스를 죽이지 마세요! ”
“ 하지만 성녀님. 이대로는 로이드가 위험합니다. 그리고 성녀님께서도……! ”
“ 그래도 안 돼요!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매달렸다. 크리스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법은 히페리온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래도 놔두었다간 크리스가 로이드를 죽일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도 크리스도 죽게 할 수 없었다.
‘ 내가 정말로 여신의 현신이고, 정말로 이들이 나의 종이라면, 어째서 내 뜻을 따르지 않는 거지? ’
아리스텔라는 자신 안의 여신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신전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위축되면서 여신에게 제 몸을 빼앗기고, 사제와 성기사들이 반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아리스텔라가 제 안의 여신 위그멘타르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때문일지도 모른다.
음욕의 여신이라고 하나 위그멘타르는 신이었다. 막강한 권능을 행사하는 신이 저를 따르는 인간 한 둘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 제가 크리스를 원래대로 되돌리겠어요. ”
“ 성녀님? ”
대신관인 히페리온은 할 수 없더라도, 성녀인 아리스텔라라면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신전 안에서 그녀는 인간이 아닌 신이었으니까.
아리스텔라는 로이드가 맞서 싸웠던 검붉은 촉수 괴물의 정체를 떠올렸다. 아마도 전대 성녀를 모시던 사제였을 것이다. 형체가 무너졌던 시체도 아리스텔라가 명복을 빌며 기도를 올리자 평온한 얼굴을 한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처럼 빛으로 돌아가기 전에 붙잡는다면, 크리스를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비키세요, 대신관님! ”
아리스텔라는 자신을 감싸려는 히페리온을 밀어내고, 저를 향해 뻗어오는 희고 붉은 촉수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 크리스! ”
꿀꺽.
가녀린 성녀의 몸을 휘감은 촉수들은 아주 간단하게 그녀의 몸을 삼켜버렸다.
“ 성녀님! ”
히페리온이 아리스텔라를 뒤쫓아 뛰어들기도 전에 퍽 하고 촉수가 터져나가더니, 히페리온을 향해 로이드가 날아왔다.
“ 윽! ”
거구의 남자를 몸으로 받아내기엔 역부족이었던 히페리온은 로이드와 함께 바닥에 엎어졌다.
바닥에 부딪히면서 쓸렸는지 등이 따갑고 머리가 울렸으나 제 몸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로이드를 밀어내고 히페리온이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촉수가 괴물의 몸 안으로 말려들어가 공처럼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 이런……! ”
희고 붉은 색이 뒤섞인 단단하고 거대한 공 같은 것이 복도를 가로막고 있었다.
“ 대신관! 성녀님을 구해야 합니다! ”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이드가 달려들어 공처럼 둥근 몸체를 부수려 했지만, 미끈한 체액을 내뿜으며 끈적하게 달라붙던 촉수와는 달리, 그것은 마치 방패와도 같았다. 로이드의 힘으로도, 히페리온의 신성력으로도 부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그것은 이상하게도 상당한 신성력을 띠고 있었다.
‘ 어째서지……? ’
신성력이라는 것은 그릇에 담긴 물과도 같아서, 오염되거나 증발해버리면 도로 정화하거나 그러모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신성력을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은 신성력을 완전히 잃어, 사제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몸체는 타락한 마수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청정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 설마, 성녀님이……? ”
◇ ◆ ◇ ◆ ◇
괴물의 입안에 삼켜진 아리스텔라는 제 몸에 달라붙은 크고 작은 촉수를 떼어내면서 크리스를 불렀다.
“ 크리스……! ”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어디선가 불쑥 솟아나온 손이 아리스텔라의 옷자락을 잡아 벌렸다.
“ 꺄아! ”
“ 성녀님……. ”
크리스의 목소리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것은 분명 크리스의 손이었다. 처음 아리스텔라에게 옷을 입혀주었던 그 손이 옷자락을 벌리고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민감한 곳을 건드리자 아리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가, 크리스의 손을 뿌리쳤다.
“ 이러지 마세요! ”
“ 성녀님……! ”
크리스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짓을 해 놓고서 대체 무엇이 그리도 원통하여 저렇게 울먹이는 소리를 내는 걸까. 아리스텔라는 또다시 저를 향해 다가온 촉수에 붙들려 정신을 잃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촉수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괴물의 입안에 들어오면 바로 핵이 보일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공간이 넓었다. 촉수 괴물이 그녀를 삼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단단한 공 형태를 취했다는 것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어디로 향해야 ‘ 중심 ’으로 갈 수 있는지를 몰라 당황했다.
“ 크리스, 어디 있어요? ”
“ 성녀님……! ”
그녀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밑에서 뻗어 나온 손이 아리스텔라의 발목을 붙잡더니, 종아리부터 무릎 안쪽을 지나 허벅지까지 슬금슬금 맨살을 스치며 올라왔다.
“ 꺄아! ”
“ 기분 좋게 해드릴게요. ”
남자의 손이 부드러운 입구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더니, 이내 손가락을 음순 사이에 끼우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 응, 아읏! 크리스, 그만……! ”
“ 왜요? 이렇게 만져주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
“ 좋아한 적, 없거든요? ”
성감대니까, 자극에 약한 몸이니까, 만져주면 흥분하고 쾌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텔라의 마음은 육체가 쾌락을 느낀다고 함께 기뻐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섹스는 쾌락이 강할수록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으니까.
사랑을 나누는 것은 서로의 마음이 만든 결과물이어야 했다. 그것이 비록 신에게 육신과 영혼을 바친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아리스텔라는 그러기를 원했다.
성녀로서 신전 생활에 익숙해지자 마음을 먹고 첫 기도를 무사히 마친 날, 크리스는 아리스텔라를 빈방에 감금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원한다고 말하며 그녀를 안았다. 성기사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겨우 한 시름 놓았다고 생각해 잠들었던 밤, 크리스가 아리스텔라의 방에 숨어들어 그녀를 안았다.
크리스가 진정으로 아리스텔라를 사랑한다면 어째서 그런 강제적인 방법을 취했을까. 사랑한다면 상대를 애틋하게 여겨 상냥하게 대하고 배려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나. 아리스텔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 크리스, 나를 원하나요? ”
“ 성녀님을 원해요. ”
“ 나를 사랑하나요? ”
“ 성녀님을 사랑해요. ”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크리스의 손끝을 몸을 비틀어 피하면서, 아리스텔라는 괴물의 중심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 그럼 내 눈을 보고 말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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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78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