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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자의 열망
[76] 비겁한 자의 열망
파르스름한 빛이 가득한 복도 모퉁이를 돌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아리스텔라의 신성력이 정화한 곳은 모퉁이까지인지, 양쪽으로 뻗어있는 복도의 저편은 어둡기만 했다.
“ 성녀님.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
“ 음…. ”
로이드의 질문에 아리스텔라는 눈을 가늘게 하고 두 방향으로 뻗은 복도를 응시했다. 자세히 본다한들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뭐가 보일 리도 없을 테지만, 로이드는 지적하지 않고 아리스텔라가 가만히 안쪽을 살피도록 기다려 주었다.
“ 왼쪽으로 가요. ”
“ 예, 알겠습니다. ”
어차피 똑같은 길인데 무엇을 고민했던 걸까. 로이드는 의문이 남긴 했으나 또다시 괴물이 습격해올 것을 대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두 사람이 통로에서 마주친 것은 괴물도, 크리스도 아닌 대신관 히페리온이었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
“ 성녀님, 어째서 지상으로 나가지 않으시고…. 길을 헤매신 겁니까? ”
“ 크리스를 찾고 있었어요. 이곳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이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너져 내린 계단에서 아리스텔라를 붙잡고 함께 아래로 떨어진 것은 로이드였고, 떨어진 장소 근처에서 히페리온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그는 아직 지상에 있으리라 판단했다.
‘ 내가 너무 무신경했어. 만약 계단이 더 많이 무너져 내렸으면 대신관님이 떨어진 곳이 우리와는 다른 위치였을 수도 있는데. ’
아리스텔라는 조심스럽게 히페리온의 상태를 살폈다. 구김 하나 없이 깨끗한 그의 성의는 먼지투성이의 지하 통로를 지나왔음에도 새하얗기만 했다.
“ 이쪽 통로의 공기가 조금 더 농도가 짙어서…. 어쩐지 익숙한 사람의 신성력이 느껴지기에 찾아왔는데, 히페리온 대신관님의 신성력이었군요. ”
신전 안에서 사제가 머무는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신성력의 농도가 짙어진다. 신관 급이 되면 신성력의 특성을 감지하여 특정한 사제의 위치를 탐지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성력을 다루는 훈련을 거친 사제만이 다룰 수 있는 능력이었다.
히페리온은 사제 교육도 마법 훈련도 받지 않은 아리스텔라가 제 신성력을 감지하고 길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저도 크리스의 신성력을 감지해 이곳까지 왔습니다만, 이 부근에서 끊겨버렸습니다. ”
“ 신성력이 끊겼다는 뜻은…? ”
히페리온은 지하에서 괴물에게 삼켜진 아리스텔라를 구할 때도 그녀의 신성력을 느껴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크리스의 신성력을 감지할 수 없다면 상황을 둘 가운데 하나다.
크리스가 죽었거나, 신성력을 잃고 타락했거나.
“ 히페리온 대신관님. 설마 크리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겠죠? ”
“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할 수도…. ”
“ 그런 무서운 말씀은 하지 마세요! ”
아리스텔라는 두 손을 꼭 쥐며 통로 저편을 바라보았다. 분명 어둡기만 한 통로인데, 아리스텔라는 그곳에서 하얀 옷자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 크리스! ”
“ 성녀님? 어디를 가십니까! ”
아리스텔라가 갑자기 건너편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로이드가 그녀를 막아섰다.
“ 위험합니다. 혼자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
“ 하지만 저쪽에 크리스가 있는 걸요! ”
“ 예? ”
아리스텔라의 말에 로이드가 뒤를 돌아 건너편을 응시했다. 여전히 건너편은 어둡기만 했고,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저쪽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
“ 하얀 옷자락이 움직였어요. 크리스의 성의였다고요. ”
사제들은 모두 비슷한 성의를 걸치고 있지만, 정식 사제의 성의와 수습 사제의 성의는 모양이 조금 달랐다. 아리스텔라는 통로 끝에서 움직이는 하얀 성의를 가리켰다.
“ 보세요. 저기 있잖아요! ”
그러나 로이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녀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성녀의 신성력이 뛰어나 이 어둠 속에서도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는 것일까.
“ 히페리온 대신관. 건너편에 사람이 있습니까? ”
“ …. ”
로이드의 질문에 히페리온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표정으로 보아 무언가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로이드는 바짝 긴장해서, 아리스텔라를 히페리온 쪽으로 밀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히페리온 대신관, 성녀님을 부탁드립니다. ”
“ 로이드? 함께 가요! ”
“ 아닙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성녀님은 그곳에 계십시오. ”
건너편에 있는 것이 정말로 크리스라면, 그가 멀쩡한 상태라면,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를 데리고 건너편으로 건너갈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인상을 찌푸린 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성녀를 그곳으로 데려갈 수 없는, 혹은 데려가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적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히페리온이 입을 다문다는 것은 자신이 본, 혹은 짐작한 것을 성녀의 앞에서 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 크리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
로이드는 히페리온에게 눈짓으로 신호하고는, 어두운 통로 저편으로 뛰어갔다. 아까 자신을 덮쳤던 촉수 괴물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
성검을 패용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몸을 지킬 무기 정도는 들고 오는 것이 좋았을 텐데, 너무 제 실력만 믿고 나선 것을 로이드는 조금 후회했다.
―쉬익!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로이드는 몸을 옆으로 굴려 공격을 피했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랗고 둔중한 것이 벽을 후려쳤다.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은 그 충격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런 지하에서 지지하는 벽이 무너진다면 천장도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로이드는 일어나서 자세를 잡으며 제 신성력으로 빛의 구슬을 만들어 통로를 비췄다.
“ 이럴 수가…! ”
복도를 꽉 채운 커다란 것은 그를 공격했던 괴물처럼 끈적끈적한 액체를 떨구는 검붉은 촉수가 아니었다. 새하얀, 소년의 팔이었다.
아니, 소년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거인의 팔이었다.
로이드는 오싹하고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팔의 중심이 향하는 몸체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성녀의 시종. 반짝이는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진 소년이 로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지하 통로에서는 서있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소년이.
“ 성기사라서 그런가, 몸이 빠르네요. ”
“ 크리스…. ”
“ 제 이름을 알고 계셨네요? 로이드 단장―아니, 지금은 전 단장이셨지요? ”
긴 속눈썹을 드리운 눈꺼풀이 붉은 눈동자를 덮었다가 다시 올라갔다.
“ 성녀님이 걱정하고 계신다. 그분께 걱정을 끼친 것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려무나. ”
“ 하하…. 용서, 인가요? ”
빙긋 웃고 있던 눈이 삽시간에 차가워지더니, 로이드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나의 성녀님을 능욕한 버러지가, 감히 용서를 입에 담아? ”
우드득. 벽을 뚫고 나갔던 팔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거대한 팔이 주먹을 쥐고 로이드가 있는 자리를 내려쳤다.
“ 큭! ”
이번에도 로이드는 재빨리 몸을 굴려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기도 없는 상태로 크리스를 어떻게 상대하면 좋단 말인가.
적이라면 쳐부술 수 있지만 그의 주인인 성녀가 아끼는 크리스다.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거인이 된 그를 상대로 대체 어떻게 생포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리는데, 크리스가 분노한 듯 이를 갈았다.
까드득.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다른 한 쪽의 벽도 무너져 내려, 로이드는 재빨리 뒤로 피신했다. 뻥 뚫린 공간에 드러난 것은 엎드린 거인의 모습이었다.
‘ 저 정도로 몸집이 크니 이런 지하에서는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렵겠지. ’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순식간에 가까워진 손이 로이드의 몸을 움켜쥐더니 높이 치켜들었다.
“ 죽어…. 죽여 버릴 거야…! ”
“ 크윽…! ”
엄청난 힘이다. 몸집이 커진 탓인가, 로이드의 힘으로도 이 손아귀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무기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로이드가 정신을 놓으려던 찰나, 아리스텔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 멈추세요, 크리스! ”
아리스텔라의 외침에 로이드의 숨통을 조이던 손의 힘이 약해졌다.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몸을 조르던 손가락이 멀어져, 로이드는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 커헉! ”
“ 로이드, 괜찮아요? ”
“ 괜찮습니다, 성녀님……. ”
온몸을 꽉 조르던 힘은 굉장했으나 내상을 입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아까 전 괴물과 싸우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는 점일까. 로이드의 상처가 터져 흘러나온 피가 셔츠를 적시는 것을 보고 아리스텔라는 울상을 지었다.
“ 크리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
“ 성녀님은 왜 성기사만 편애하시는 거죠? ”
“ 저는 누군가를 편애한 적 없어요. ”
로이드는 아리스텔라가 무뢰배들에게 끌려가 능욕을 당하던 때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신전까지 아리스텔라를 호위하며 데려온 사람이기도 했다. 낯선 남자들보다 로이드에게 친근함을 느끼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이드를 특별 대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아리스텔라가 특별하게 생각했던 대상은 다름 아닌 그녀의 첫경험 상대였던 조슈아였다. 그가 아리스텔라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 마음에 묻어두었지만 말이다.
크리스도 아리스텔라의 시종이었고, 케인도 아리스텔라의 시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로이드가 아리스텔라의 시종이다. 처음으로 그녀 자신의 의지로 시종을 선택했으나 그것은 로이드를 편애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사도를 어긴 그에게 반성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아리스텔라를 강제로 범한 로이드, 기억이 없는 사이에 관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한 케인, 그녀를 모욕한 이자크. 아리스텔라는 이제까지 자신이 가까이했던 성기사들이 제게 크고 작은 죄를 지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을 편애라 여기지 않는다.
성기사가 아니라 사제라도, 이 신전의 누구라도, 성녀인 아리스텔라가 감싸 안아야 할 대상임에는 분명했으니까.
“ 이 신전의 모두가, 제게는 소중한 분들이에요. ”
어쩌면 조금 친근하게 느껴지고 낯설게 느껴지고, 마음이 잘 맞고 아니고의 차이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올 기회를 박탈하는 자격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 그러니 제발 이런 짓은 그만 하세요……! ”
지친 듯한 로이드를 끌어안은 채로 아리스텔라가 외쳤지만, 크리스의 얼굴은 점점 굳어갈 뿐이었다.
“ 그렇겠죠. 성녀님 곁에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
“ 크리스……? ”
크리스는 손끝으로 히페리온을 가리켰다. 사제들을 이끌어야 할 대신관 히페리온은 크리스를 성녀의 시종에서 물러나게 하고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케인을 그녀의 시종으로 임명했다. 왜 몰랐을까. 히페리온이 사제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 몸집도 크고 힘도 강한 성기사가 있고, 아름답고 다정한 사제도 있는데……. 멋진 남자가 그렇게나 많은데, 저 같은 풋내기를 봐주실 리는 없겠죠. ”
성기사들도 히페리온도, 전부 한통속이다. 사제들을 멀리하고 성녀를 독차지하기 위해 그들이 힘을 모은 거라고 크리스는 판단했다.
아니, 만약 성녀가 사제들의 손에 넘어간다 하더라도, 크리스는 수습사제였다. 신관들과 정식 사제들이 그녀의 곁에 버티고 서있는 한, 아리스텔라의 옆자리가 크리스에게 허락될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 이 신전의 모든 사제가 사라지면, 성기사가 사라지면……. ”
크리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리스텔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바쁘게 굴리면서도 실실 웃는 크리스의 얼굴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 그러면 성녀님은 저를 사랑해 주실까요? ”
“ 크리스! ”
뽀얀 얼굴에 반짝이는 금발. 동그란 눈에 밝고 귀여운 인상의 크리스. 그녀보다 한 살이 어린, 마치 동생과도 같았던 그 크리스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으면서, 그녀에게 다가서는 모든 것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추악한 비겁자가 있을 뿐이었다.
“ 저는 성녀님을 원해요. ”
그 말과 함께, 크리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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