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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실종자
[75]
로이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은 덕분에 아리스텔라는 미끄러지는 것을 면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로이드의 몸에 묻은 괴물의 체액과 피를 닦아내느라 치마를 걷어 올린 상태에서 소매가 잡아당겨지자, 옷자락이 벌어지면서 아리스텔라의 맨몸이 드러났다.
“ 꺄아아! ”
“ 성녀님! ”
손을 놓으면 아리스텔라가 넘어질까 봐, 로이드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그녀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슴에 따스하고 보드라운 것이 닿았다. 그녀를 안았던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나 로이드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 아읏, 로, 로이드……. ”
“ 성녀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넘어지실까 봐, 손을 붙잡는다는 것이 그만……. ”
“ 아니, 그건 아는데요……. 조금……. ”
아리스텔라의 말에 로이드는 한쪽 눈만 살며시 떠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로이드의 가슴에 기댄 채 양 뺨을 붉히는 아리스텔라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보아도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변해간다. 로이드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일까.
“ 그, 이것 좀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
아리스텔라가 울상을 지으면서 제 아랫배를 찌르는 육중한 남근을 쓰다듬자, 로이드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 죄, 죄송합니다! ”
“ 어, 어떻게 하죠? 제가 도와드려야 하나요? ”
“ 아닙니다!! ”
순진한 얼굴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 말에 또다시 머리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로이드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몰염치하게 고개를 빳빳이 쳐든 제 분신을 원망했다. 자신을 걱정해서 몸을 닦아주던 상냥한 성녀를 상대로 추접한 욕망을 품다니, 부끄럽고 민망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 그……. 괴롭지 않으세요? ”
“ 괘, 괜찮습니다! ”
전혀 괜찮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리스텔라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녀를 겁간한 일로 처형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혔던 처지가 아닌가. 로이드는 이를 악물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쾅!
“ 꺄아아! 로이드? ”
“ ……후우. 이제, 괜찮습니다. ”
안 그래도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데 머리에서까지 피를 흘리는 주제에 어디가 괜찮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로이드의 표정은 비장했다. 아리스텔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 추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
“ 아, 아뇨. 저야말로……. ”
아리스텔라는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추슬러 올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잡아당길 때는 미동조차 없던 성의가 남자가 잡아당겼다고 이렇게 간단히 벗겨지다니. 정말이지 이 성의는 불편하기 이를 데가 없다.
“ 로이드. 저기……. 옷을 좀, 입혀 주실 수 있나요? ”
“ 예? 제가 말입니까? ”
어차피 시종을 맡은 이상 앞으로는 성녀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 또한 자신의 역할이었으나,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각오는 되어있어도 그녀의 옷을 갈아입힐 마음의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 제가 스스로 입을 수가 없어서요……. ”
“ 아, 그……. 그렇, 지요……. ”
그렇다고 그녀를 헐벗은 채로 돌아다니게 둘 수도 없었다. 이렇게 어두운 지하에서조차 성녀의 맨몸이 그의 정신에 미치는 파급력은 상당했다. 저 색정적인 모습을 뒤로 하고는 도저히 집중해서 싸울 수 없을 것 같았다.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로이드는 최대한 아래를 보지 않은 채로, 아리스텔라의 손이 이끄는 대로 옷자락을 잡아당겨 여며주었다. 그가 잡아당길 때는 마치 처음부터 벗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던 허술한 옷이, 깃 모양을 맞춰 여며주자 자석으로 된 것처럼 딱 달라붙었다.
‘ 성의라는 것은 원래 이런 옷인 건가. ’
사제들도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지만, 남자의 옷에 관심이 없었던 로이드에게 아리스텔라의 성의는 신기할 뿐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단정한 차림으로 돌아온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보니 아플 만큼 팽팽해졌던 분신도 겨우 조금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 그런데 설마 괴물의 정체가…….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
“ 성녀님께서 찾으시던 크리스라는 수습사제는 아닙니다. 이 신전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얼굴이더군요. ”
“ 설마 외부인일까요? 아니면……. ”
꿈속에서 성녀에게 정화의 의식을 베풀던 사제들을 쫓아내고, 그녀를 범하던 괴물은 분명 아리스텔라를 ‘ 성녀님 ’이라고 불렀다. 그 괴물이 부른 것은 자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그녀는 앞도 보이지 않고, 다리도 불편했으니까.
아리스텔라의 몸 안에 잠들어 있는 여신 위그멘타르는 대대로 성녀들의 의식을 빼앗아 사제들과 난교를 벌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리스텔라가 꾼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어쩌면 그녀의 안에 잠들어 있는 여신 위그멘타르가 경험한, 아리스텔라보다 더 이전에 이곳에 있었던 전대 성녀들의 기억은 아닐까.
‘ 그렇다면 저 사람은, 전대 성녀와 함께 이 신전에 배속되었던 사제나 성기사일지도 몰라. ’
이번에는 결계에 무언가 미흡함이 있어 집행관 클로비스가 결계를 부수고 들어오긴 했지만, 본래 이 신전의 경비는 상당히 견고하다고 한다.
어지간한 소도시 하나 규모의 크기를 자랑하는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은 한 나라에서 군대를 몰고 쳐들어와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라고 로이드는 설명했다. 그러니 이 지하에서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 또한 신전 안의 사제나 성기사였던 자라 이해하는 쪽이 타당할 것이다.
“ 설마 크리스도……? ”
만약 어떠한 이유로 인해 사람이 괴물로 변할 수 있는 거라면, 크리스는 괴물에게 잡혀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라 괴물 그 자체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로이드를 공격하던 끔찍한 촉수 괴물을 떠올린 아리스텔라는 갑자기 소름이 끼쳐서 부르르 떨며 고개를 털었다.
“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
“ 미안해요, 로이드. ”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로이드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다. 한 마리, 아니, 한 사람을 잠재우는데도 이렇게 큰 상처를 입지 않았나. 만약 이 지하에 같은 괴물이 더 있다면, 만약 크리스가 괴물이 되어버렸다면, 로이드 혼자서는 그를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에게 도망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위험하니 크리스를 버리고 우리끼리라도 이 지하를 벗어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 크리스를 구해야 해.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셔츠로 덮여 있는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살덩이가 뭉쳐 있는 듯한 형태이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전대, 혹은 전전대의 성녀를 따르던 사람이겠지.
“ 성녀님.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성녀님께서 볼만한 것이 아닙니다. ”
“ 저 때문에 이런 모습이 된 사람이에요. ”
죽은 남자의 주인은 자신 안의 여신을 품고 있던 이전 대의 성녀겠지만, 성녀가 여신의 현신인 이상 전대 성녀 또한 그자에게는 성녀의 다른 모습일 뿐, 다른 존재는 아닐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조심스럽게 시체를 덮은 로이드의 셔츠를 벗겨내었다.
괴물의 모습일 때는 너무나도 무서웠고, 처음 시체를 보았을 때는 너무나도 끔찍했다. 그러나 성녀를 따르던 종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고 죽게 한 것이 미안해서 가슴이 아팠다.
‘ 이런 모습으로 죽게 해서 미안해요. 이제는 이런 지하에서 괴로워하지 말고 부디 평안해지길. ’
아리스텔라는 사제인지 성기사인지도 모르는 남자의 명복을 빌며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성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성스러운 흰 빛이 시체를 감싸 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녹아버린 살덩이 같던 시체가 점점 온전한 사람의 형체를 갖춰가더니, 편안하게 눈을 감은 초로의 남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어서 남자의 몸이 하얀 빛에 감싸이더니, 공기 중에 흩어졌다.
남자의 시체가 누워 있던 자리에는 깨끗해진 로이드의 셔츠만이 남아 있었다.
“ 이럴 수가……! ”
로이드는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 눈을 깜박였다. 어둡기만 한 신전의 지하에 파르스름한 푸른빛이 가득 찼다. 지상의 신전에는 성스러운 기운이 가득하기에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폐쇄된 방일지라도 주위를 분별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은 이 어둡기만 한 지하가 그런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고 습하기만 했던 지하의 공기가 달라졌다. 낡은 지하의 벽돌을 파르스름한 빛이 비추고, 청량한 공기가 폐 속까지 시원하게 씻어내는 것 같았다.
‘ 이것이 성녀님의 힘인가……. ’
생명과 평화의 신 헤시우스는 성녀는 당대의 처녀 가운데 가장 신성력이 강한 여인의 몸에 여신 위그멘타르를 봉인했다고 한다. 비록 신성 마법도 쓸 줄 모르고 성검도 다루지 못하지만, 아리스텔라의 신성력만큼은 대신관 히페리온 이상일 것이다.
통로 끝에서 갈라지는 길이 어둡기만 한 것을 보면 그녀가 정화한 구역은 이 통로 하나뿐인 듯했지만, 이 정도로 간단하게 공간을 정화하는 것을 로이드는 본 적이 없었다.
“ 시체가……. 사라졌네요. ”
기도를 마친 아리스텔라가 로이드의 셔츠를 주워들고 일어났다.
“ 신의 품으로 돌아간 거겠지요. 평온한 얼굴이었습니다. ”
“ 그러면 좋을 텐데…….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은발의 성기사는 아마도 아리스텔라의 말 한 마디에 기꺼이 목숨을 걸 것이다.
이 남자를 절대로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도.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이 신전 안에서만큼은 행복하게, 평안을 누리도록 만들 것이다. 그것이 수많은 사제와 성기사를 종으로 부리는 여신의 현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책무라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 당신에게 위험한 일을 맡겨서 미안해요. 로이드, 크리스를 찾을 때까지 조금만 더 힘을 내요. ”
“ 물론입니다. 성녀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제가 곁에 있는 것이니까요. ”
셔츠를 건네자 로이드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옷을 입었다.
“ 그럼 갈까요? ”
아리스텔라는 생긋 웃으며 로이드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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