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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실종자
[74]
“ 정말 끝이 없네요……. ”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이 무척 넓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지하실마저 이렇게 넓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폐쇄되기 전에는 지하실도 평범하게 사제들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다고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복도를 로이드가 만들어낸 탁구공만한 불빛에 의지하며 걸어가는 것은 아리스텔라는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디서 갑자기 괴물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또다시 바닥이 무너지거나 하진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로이드에게 찰싹 달라붙어 따라가고 싶었지만, 빛을 만들어내는 마법은 집중력을 요한다고 하니 매달리거나 달라붙거나 하면 그가 성가셔할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로이드로부터 한 걸음 정도 떨어진 상태로 그를 따라갔다.
지하의 복도는 지상의 신전과는 달리 벽돌로 지어진 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길고 어두운 통로를 걸으며, 아리스텔라는 지금 자신들이 지나고 있는 위치가 지상의 어디쯤일까를 가늠해 보았다.
“ 지상은 그렇게 밝은 햇살이 비치고 청량한 기운으로 가득했는데, 이곳은 어둡고 습하네요. ”
“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었다고 하니까요. 아마 제대로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
신전의 청소는 요정들이 하고 있다지만 폐쇄된 지하까지 청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서일까,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아리스텔라는 무심코 소매로 코를 막았다.
“ 하지만 폐쇄된 상태라면 먹을 것도 없을 텐데, 괴물은 어떻게 여기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걸까요? ”
“ 글쎄요. 먹이를 먹지 않고도 생존이 가능한 마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
성기사는 사제를 호위하고 성전에 참여하여 신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주 임무지만, 로이드는 아직 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신전에서 근무할 때는 때로 신전에 숨어든 범죄자들을 쫓아내거나, 간혹 마수가 성역에 침범했다는 소식을 받으면 성기사들을 이끌고 가 마수를 퇴치했다.
“ 어쩌면 지상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곳으로 빠져나가 사람을 사냥한다거나……. ”
이 폐쇄된 신전에서 사냥할만한 먹이라고 한다면,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일 것이다. 괴물을 이대로 남겨둔다면 신전의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리스텔라는 오늘 이곳에서 꼭 괴물을 퇴치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하지만 로이드 혼자만으로 괜찮을까. ’
히페리온은 신성 마법으로 괴물을 쫓아낼 수 있었다. 아마도 지하에 사는 괴물이니 빛에 약할 것이다. 로이드가 아무리 강하다고는 해도, 성검조차 지니고 있지 않은데 과연 괴물을 상대로 이겨낼 수 있을지 아리스텔라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 로이드. 만약 괴물을 발견하면 맞서 싸우지 말고 우선……. ”
“ 성녀님, 잠시 소리를 낮춰 주십시오. ”
로이드의 말에 아리스텔라가 입을 다물었다. 복도 끝 모퉁이에서 쉬익, 쉬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괴물이 저곳에 있는 것일까.
“ 제가 보고 오겠습니다. ”
“ 로이드? 잠깐만요! 가지 마세요! 습격을 받으면 어쩌려고……. ”
“ 조용히. 성녀님께서는 이곳에 계십시오. ”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구석에 숨게 하고는, 그녀에게 빛의 구슬을 넘겨주었다.
“ 잠시만 숨어 계십시오. 제가 괴물을 쓰러뜨리고 오겠습니다. ”
“ 안 돼요. 위험해요……! ”
“ 당신의 시종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
아리스텔라의 손을 잡아 올려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춘 뒤, 로이드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 로이드! ”
커다란 남자의 뒷모습이 어둠에 삼켜지고, 잠시 후 뭔가 퍽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벽이 크게 울렸다. 설마 로이드가 괴물의 공격을 받은 것인가. 꿈속에서 거대한 촉수가 사제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했던 기억이 떠올라, 아리스텔라는 갑자기 오싹해졌다.
“ 로이드! ”
“ 성녀님! 오지 마십시오……크악! ”
“ 로이드!! ”
로이드의 비명을 듣고 다급해진 아리스텔라는 그가 넘겨준 빛의 구슬을 움켜쥐고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갑자기 뭔가 붕 하고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 아리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바닥에 엎드렸다. 뭔가 두꺼운 것이 머리 위로 슉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 아윽! ”
몸을 일으켰다가 또 뭔가 날아올까 두려워서, 아리스텔라는 바닥을 굴러 벽에 몸을 붙인 뒤 주먹을 펴서 빛의 구슬로 복도를 비춰보았다. 그녀의 허리굵기만한 굵은 촉수가 벽에 달라붙은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 꺄아아! ”
“ 성녀님! ”
아리스텔라를 향해 기어오는 굵은 촉수를 남자의 팔이 낚아채서 크게 휘두르자, 벽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면서 거대한 촉수괴물이 뒤집어졌다.
“ 흐윽, 로이드……! ”
“ 성녀님, 물러나세요! 가까이 오시면 위험합니다! ”
아리스텔라는 천장과 바닥을 오가며 긴 팔다리를 휘적거리는 촉수의 움직임을 피해 벽 모퉁이에 숨어 괴물의 모습을 파악했다.
촉수에 삼켜졌을 때는 무서워서 제대로 바라보는 것조차 하지 못했지만, 로이드의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에서까지 두렵다고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검붉은 색의 긴 촉수가 다발로 엮여, 마치 굵은 밧줄을 한데 엉켜 묶어놓은 듯한 모습니다. 털뭉치 같기만 한 저런 촉수에게도 약점이 있을까.
히페리온이 있었다면 신성 마법으로 공격했을 텐데,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아리스텔라로서는 괴물의 약점을 공략할만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 아! ”
로이드가 그의 허리를 감싼 긴 촉수를 끊어내고 바닥을 굴러 빠져나오자, 괴물은 가느다란 촉수를 하나로 묶어 굵은 줄기를 만들어 그를 향해 휘둘렀다.
―퍽!
벽과 바닥에 휘둘러지며 촉수가 부딪칠 때마다 철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끈적한 액이 사방으로 튀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드의 움직임을 쫓기가 힘들었는지 괴물은 온몸의 촉수를 하나로 엮어 긴 밧줄처럼 만들었다. 여러 갈래로 뻗어있던 촉수가 한데로 묶여 안쪽이 드러난 순간, 아리스텔라는 촉수다발 틈새로 보이는 붉은 빛을 눈치챘다.
붉은 점막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마치 심장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 부분이 핵일까. 붉은 핵이 크게 꿈틀하자 가느다랗던 촉수가 크게 팽창했다.
“ 로이드! 촉수다발 사이에 붉은 핵이 있어요! ”
“ 저쪽이군요……! ”
로이드는 자신을 향해 후려치는 긴 촉수를 자세를 낮춰 피한 다음, 그대로 괴물을 향해 뛰어들어 붉은 핵이 드러난 틈새로 손을 밀어 넣었다.
―키에에엑!
괴물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크게 몸부림쳤다. 로이드가 괴물의 핵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가하자, 괴물은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벽에 제 몸을 들이받았다.
“ 크윽! ”
“ 로이드! ”
“ 괜찮습니다, 성녀님! 오지 마십시오! ”
거대한 촉수와 벽 사이에 끼어버린 로이드는 촉수의 꼬리가 제 목을 졸라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끝에 강하게 힘을 주어 괴물의 핵을 터뜨려 버렸다.
―푸확!
손안에서 크게 꿈틀거린 그것이 뜨거운 액체를 뿜으며 터져버리자, 로이드의 목을 조르던 촉수에 힘이 빠져 스르륵 풀려버렸다. 마치 조각조각 끊겨버린 밧줄처럼 기다란 촉수다발이 중심이 되는 핵을 잃고 바닥에 떨어져 꿈틀거렸다.
“ 이건……! ”
몸을 감싸던 촉수 다발이 떨어져나가자, 점액질로 범벅이 된 살덩이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태가 많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히익……! ”
“ 성녀님, 보지 마십시오! ”
로이드는 그제야 제가 터뜨린 것이 사람의 심장임을 깨달았다. 체액 때문에 온통 미끈거리는 탓에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온통 피로 물들어 붉게 변해버린 제 손을 바라보았다가, 로이드는 진저리를 치며 주먹을 꽉 쥐었다.
‘ 설마하니, 신전 지하에 있는 괴물이 사람이었을 줄이야……. ’
로이드는 반쯤 녹아내린 시체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확인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긴 하지만, 주름이 가득한 중년의 얼굴이었다.
성녀의 옛 시종이었던 크리스라는 청년은 금발에 붉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는데, 시체의 머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듬성듬성 남아있는 머리털은 검은색이었다. 안구는 녹아내렸는지 남아있지 않은 것 같지만, 적어도 크리스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로이드는 시체를 벽의 한쪽으로 밀어놓은 뒤, 아리스텔라가 끔찍한 것을 보지 않도록 웃옷을 벗어 덮어놓았다.
“ 성녀님. 이제 괜찮습니다.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서 나오십시오. ”
“ 네, 네에……. ”
간신히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린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채찍으로 맞은 것처럼 여기저기 상흔이 남아 있었다. 벽에 긁혔는지 등은 벗겨져 있었고, 촉수에게 목을 졸린 자국마저 그대로 남아있었다.
“ 로이드! 상처가……! ”
“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 어떻게 걱정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
제가 안전하게 뒤로 피해있는 동안 로이드가 목숨을 걸고 괴물과 싸웠다는 것이 뒤늦게 실감이 나서, 아리스텔라는 울상을 지었다. 크리스를 찾아 지하를 탐사해보자고 말한 것은 자신인데, 계단이 무너지는 바람에 길도 모르는 지하에 버려진 그녀를 지켜준 것이 로이드였다. 그 무섭고 끔찍한 촉수 괴물을 상대로 맨손으로 싸워 이기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 리가 없다. 아리스텔라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로이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 로이드. 앉아 보세요. ”
“ 예? ”
아리스텔라가 입고 있는 성의는 그녀의 몸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먼지투성이인 바닥을 굴러도 여전히 깨끗한 그 옷은 칼에 찔려도 찢어지거나 닳아 헤지는 법이 없었다.
로이드가 시키는 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자,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에게 고개를 더 숙이게 하고는 치마를 걷어 올렸다.
“ 서, 성녀님? ”
“ 지혈을 해야 하는데, 치마를 찢어낼 수가 없어서……. 잠시만 이대로 있으세요. ”
아리스텔라는 치맛자락으로 로이드의 몸에 튄 괴물의 체액과 피를 닦아냈다. 히페리온처럼 신성 마법으로 사람을 치료할 수 있었다면 로이드의 상처도 치료해줄 수 있었을 터인데,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한심스럽기만 했다.
‘ 돌아가면 대신관님께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해야겠어. ’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결심을 다지며 로이드의 몸을 제 옷으로 닦아주었다. 성스러운 성의는 괴물의 체액과 피가 달라붙었음에도 더러워지지 않아, 옷자락을 털면 다시 깨끗하게 되돌아왔다.
“ 서, 성녀님……. ”
“ 미안해요, 로이드. 제가 상처를 건드렸나요? 많이 아픈가요? ”
“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가 움찔거릴 때마다 제가 상처를 건드리는 것인가 싶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손에 힘을 빼고 피를 닦아냈지만, 사실 로이드가 움찔거리는 이유는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펄럭거리며 움직이는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다리 때문에 눈을 둘 곳이 없어 눈을 감은 것까지는 어떻게 해냈지만, 부드러운 성의가 제 몸 위로 움직일 때마다 달콤한 체향이 흘러나오는 것만은 막을 방도가 없었다.
“ 이제, 이제 괜찮습니다! ”
“ 어머나! ”
로이드가 갑자기 일어나자 아리스텔라는 뒤로 물러나려다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 성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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