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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기만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
[66]
클로비스와 함께 아리스텔라를 안고 나서, 뒤늦게 정신이 든 이자크는 도망치듯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형과 대화를 하고 싶다던 생각은 옛적에 날아가 버렸다. 그에게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 내가, 내가 또……! ’
이자크는 당혹스러웠다. 아무래도 그 마녀에게 단단히 홀린 것이 분명했다. 여자에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성에는 관심이 있었던 이자크는 창부인 어머니가 아버지를 유혹하는 것을 몰래 훔쳐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고급 창부였고, 공작인 아버지 외에도 몇이나 되는 귀족 남자들에게 정부로 삼겠다는 청을 받았다고 했다.
이자크의 어머니는 그리 아름다운 여성이 아니었다.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귀족 영애를 아내로 맞이한 귀족들이 어째서 어머니에게 목을 매는지 어린 이자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잠자리를 훔쳐보고 난 밤에는 이상한 꿈을 꾸고는 했다. 젖은 이불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새벽에 어머니 몰래 서투른 솜씨로 빨래를 하다가, 결국 이불을 엉망으로 만들어 혼이 나고는 했다.
훈련생이던 시절에 동기 친구들의 소개로 환락가에 가본 적이 있었다. 형형색색의 불빛과 화려하게 꾸민 여자들이 길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 이자크는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훈련소에서는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이자크가 여자 앞에서는 고개도 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고 여긴 친구들이 돈을 모아 사창가의 고급 창부를 불러 이자크와 한 방에 넣어주었다.
여자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소년에게 창부의 유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자크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와 버렸다.
문을 나서는 순간 창부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비웃음으로부터 도망치듯이, 정신없이 뛰어 환락가에서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격렬한 정사로 성녀가 기절해버렸다. 클로비스는 태연하게 옷을 걸쳐 입으며 잠든 아리스텔라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자크는 그럴 수가 없었다.
“ 참으로 희한한 성녀님이야. ”
“ ……. ”
“ 너는 이런 여자를 주인으로 삼은 거냐? 이자크. ”
클로비스의 말이 귀에 꽂히는 순간, 마치 사방에서 튀어나온 칼이 제 몸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두려웠다. 그 자리에 남아있다간 몸이 갈가리 찢겨나갈 것 같았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드는가는 차치하고라도.
‘ 그 여자는 마녀가 분명해. ’
아리스텔라의 달콤한 향기가 정신을 빼앗고 부드러운 피부와 체온이 욕구를 충동질해, 마치 그를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성기사단에 입단한 것은 로이드를 동경해서였지만, 성기사가 되어 가족과 연을 끊고 신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맹세한 순간부터, 평생 동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이자크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 로이드 단장님도, 이런 기분으로 성녀님을 안은 것일까. ’
기사단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성녀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동료를 마주 대할 만큼 이자크는 강하지 않았다. 그는 성녀가 두려웠다. 어째서 그런 여자를 주인으로 삼게 되었는지,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 확인을, 해볼까. ’
이자크는 성녀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문이 두터워 안의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 넓은 성녀의 방은,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성녀 아리스텔라는 여신 위그멘타르의 현신이며 이 신전의 주인이었다. 주인의 허락 없이 종이 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했기에, 문에는 자물쇠가 필요 없었다.
이자크는 주인의 허락도 없이 주인의 방에 숨어들었다. 들키면 틀림없이 성녀의 노여움을 사, 처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왜,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지? ’
신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내리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자크는 위그멘타르의 유혹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의식이 날아가 버린다. 살을 찢어내고 심장을 뜯어 먹혀도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버릴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 이자크……. ”
자신을 부르는 아리스텔라의 떨리는 목소리에, 이자크는 또다시 가슴이 술렁이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이 여자의 목소리는 제 정신을 빼앗고, 어째서 이 여자의 눈빛은 제 마음을 흔드는 것인가. 마녀가 아니고서야, 그저 시골에서 나고 자라온 평범한 여자가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홀릴 수는 없지 않은가.
“ 제게……. 저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
“ ……네? ”
“ 저에게, 형님에게, 로이드 단장님께, 무엇을 하신 겁니까? 저희들을 어쩌시려는 거냐고요! ”
침대 위에 아리스텔라를 눕히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제 몸을 위에 드리운 뒤, 이자크는 흉흉한 눈빛으로 아리스텔라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이자크의 모습을 보고 겁을 먹지는 않았다. 그녀를 위협하기에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 당신들 형제는, 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려고 하는군요. ”
“ 뭐라고요? ”
“ 당신이야말로, 저를 어쩌시려는 건가요? ”
아리스텔라는 살짝 이불을 끌어당겨 가슴을 가렸다. 알몸 상태인 것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자크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이 싫었다. 그녀를 능멸한 남자에게, 제 소중한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이자크. 저에게 무엇을 바라고, 제 방에 숨어들었죠? ”
“ 저는, 당신이……. 성녀님이, 저와 형님을 유혹해서……. ”
“ 당신과 형님을요? ”
클로비스가 억지로 차를 마시게 해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는 알몸으로 응접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와 몸을 섞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그멘타르가 난동을 부렸을 때의 기억이 없는 아리스텔라는 이자크와 관계한 것을 몰랐다.
아리스텔라는 그저 자신이 차를 마시고 이성을 잃은 사이에 집행관인 클로비스와 관계를 가졌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말인가.
“ 이자크. 설마……. 저와 클로비스 집행관님이, 그……. 하는, 걸 지켜보았나요? ”
“ 지켜보다니요. 함께 했지요. ”
그 대답에 아리스텔라의 몸이 움찔 굳었다. 함께 하다니.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두 명의 남자와 동시에 관계를 가졌다는 말인가. 아리스텔라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꿈속에서 겪은 정화의 의식은 현실이 아니었다. 여러 남자에게 범해진 전대 성녀의 기록을 읽었을 때도 제가 겪은 일이 아니니 흘려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라고는 해도, 실제 제 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안 순간의 충격은 차원이 달랐다.
“ 성녀님께서 피부를 붉게 물들이시고, 달콤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면서……. 그래요. 이 손으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
이자크는 아리스텔라의 손을 잡아 올려 제 뺨에 대었다. 두 번이나 몸을 섞었다고는 해도 아리스텔라는 이자크와 관계했을 때의 기억이 없었다. 손끝에 닿은 남자의 뺨은 분명히 뜨거운데, 이상하게도 아리스텔라는 그것을 ‘ 차갑다 ’고 생각했다.
“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
“ 저는 당신을 부르지 않았어요. ”
“ 아뇨.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를 유혹하시고, 저를……. 신전의 성기사로, 신에게 육신과 영혼을 바쳐 살아가야 하는 저를, 타락시키셨지요. ”
타락이라. 다른 신전의 사제나 성기사가 여자와 성관계를 가졌다면 그것은 부정한 짓이며 타락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신전에서, 음욕의 여신과 그를 섬기는 신의 종이 관계를 맺은 것을 타락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이자크. 저는 당신을 타락시킬 생각이 없어요. ”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아리스텔라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이 남자에게 제 안의 여신이 음욕의 여신이며, 그와 관계한 것은 부정이나 타락이 아닌 신과의 교감이라 한들 믿지 않을 것이다.
“ 당신은 저를 모욕하고, 저를 기만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축복을 내려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타락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 성기사의 몸으로 순결을 잃고, 성녀님에게 이런 짓을 하는데도 말입니까? ”
“ ……무엇을 두려워하시는 건가요? ”
조슈아는 아리스텔라를 안을 때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크리스는 제가 왜 이런 욕망을 느끼는지 몰라 당황해하면서도 그녀를 원한다며 안아왔다. 히페리온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녀의 명령을 따를 때는 망설임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케인도 그러했다.
이자크만이 아리스텔라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자와 관계를 맺어 순결을 잃은 성기사로서 죄책감을 느끼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인간이 극한의 공포를 느껴 이성을 잃고 발악하는 것처럼,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어떻게든 거기서 벗어나고자 아리스텔라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 저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이 두려운가요? ”
이자크가 헉 하고 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아리스텔라는 이불을 조금 더 끌어당겨 몸을 가린 채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이자크가 주춤하며 뒤로 조금 더 물러났다.
아리스텔라가 다가가면 이자크가 물러난다. 넓은 침대 위에서, 두 남녀의 위치가 슬슬 달라져 갔다.
“ 저를 안고 싶어서 제 방에 숨어들었던 게 아닌가요? ”
“ 아닙니다, 저는……. 신에게 정절을 바치기로 맹세한……. ”
“ 거짓말하지 마세요. ”
아리스텔라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이자크의 중심을 가리켰다. 옷 위로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만큼 우뚝 솟아오른 남자의 성기가 제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 서, 성녀님이. 옷도 입지 않고 계시니까……. ”
“ 제가 제 방에서 알몸으로 있는 게 무엇이 문제라는 거죠? ”
“ 복도를, 알몸으로 건너오셨지 않습니까! ”
“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었는걸요. ”
이자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시선을 둘 곳을 몰라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을 보고, 아리스텔라는 그가 한심한 한편 조금 가소롭게 느껴졌다.
남자란 그녀에게 무서운 존재였다. 특히 이자크처럼 힘이 좋은 기사는 더욱 그랬다. 커다란 손으로 제 몸을 부여잡고 강한 힘으로 이끌리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두려워했다. 제 힘으로 벗어날 수도 반항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두려웠다.
아마도 그녀가 느꼈을 그 감정을, 지금은 이자크가 느끼고 있는 것이다.
“ 성녀님은, 다른 남자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겁니까? ”
“ 그야 물론 부끄럽지요. 지금도 민망하고……. ”
아리스텔라는 이불로 몸을 감싸며 살짝 몸을 돌렸다.
“ 하지만 알몸을 보였다고 해서, 제가 타락했다거나……, 더럽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성의는 남자의 손으로 벗기지 않으면 벗을 수 없는 옷이다. 그러니 제 의지로 벗은 것이 아니었다. 의도치 않게 알몸을 보였으니 부끄럽긴 하지만 사실 수치를 느껴야 할 것은 아리스텔라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알몸을 보고 음심을 품는 남자 쪽이겠지.
“ 저와……. 형님과, 그런 짓을 하셔놓고……. ”
그것은 아리스텔라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 적어도 저는,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범하지는 않았어요. ”
위그멘타르가 아무리 음욕의 여신이라 한들 여인의 몸에 갇힌 이상 가녀린 여인 이상의 힘을 낼 수는 없었다. 강인한 기사인 이자크나 골렘을 상대로도 싸워 이긴 클로비스를 무슨 수로 범한단 말인가.
위그멘타르가 달려든다 하더라도 그녀를 밀쳐내고 돌아가면 위그멘타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위그멘타르를 거부할 수 있음에도 거부하지 않은 것은 이자크와 클로비스가 아닌가.
“ 성녀님이 유혹……, 아니. 성녀님이 명하시는 것을, 거스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
“ 당신은 저를 성녀로 인정하지 않잖아요.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닌가요? ”
이자크는 그녀의 신성을 의심했다. 클로비스와 마찬가지로. 미사에서 성기사들에게 축복을 내릴 때, 자신을 성녀로 인정하느냐는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이자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성녀를 신으로 섬기는 사제와 성기사라면 그녀의 유혹을,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자크가 정말 아리스텔라를 성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이자크. ”
아리스텔라가 이름을 부르자, 이자크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가녀린 아리스텔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인한 기사가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 당신은 저를 성녀로 인정하나요? ”
============================ 작품 후기 ============================
66, 67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