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5 / 0219 ----------------------------------------------
신을 기만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
[65]
아리스텔라에게는 여신 위그멘타르의 의지가 밖으로 드러났을 때의 기억이 없었다. 위그멘타르는 아리스텔라의 몸으로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며 문란한 행위를 벌였다.
아리스텔라는 처음 그것을 깨달았을 때 너무 당혹스럽고 민망했지만,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리 의식이 없을 때라 하더라도 그녀의 몸이 벌인 일이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여신을 봉인하는 그릇이었다. 그러니 아리스텔라는 제 행동에 책임을 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형제는 어떠한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아리스텔라에게 책임을 지워 자신은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여신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성기사 이자크야 백보 양보해서 이해한다 하더라도, 클로비스는 처지가 달랐다.
“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에서, 그 여신의 현신인 성녀가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 부정하다는 것을 알면서, 이리 간단하게 계율을 깨고 관계를 맺을 정도로 자제력이 약한 게 누구죠? ”
“ 음……. 그러네요. 확실히 거부하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만. ”
클로비스는 눈을 깜박이며 턱을 쓰다듬더니, 어깨에 걸치고 있던 옷을 털어 제대로 입었다. 단추를 잠그고 조끼의 매듭을 묶고, 목에 크라바트를 감았다. 알몸의 아리스텔라를 버려두고, 그 혼자만이 말끔한 모습으로 변해 간다. 아리스텔라는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럼 이제 제가 부정한 행위로 순결을 잃은 성녀님을 책임지면 되는 걸까요? ”
“ 당신에게 순결을 잃은 게 아닌데요. ”
“ 아, 그랬지요. 참. 그럼 이제 저도 로이드처럼 감옥에 갇히는 거려나요? ”
클로비스는 로이드의 일을 떠올린 듯 피식 웃었다. 그 뻔뻔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리스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음부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 클로비스 집행관님. 당신은 이 신전에서 세 가지 죄를 범했어요. ”
테이블 위에는 두 잔의 차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클로비스가 아리스텔라에게 억지로 먹인 빈 잔. 다른 하나는 그가 타놓기만 하고 입에도 대지 않은 한 잔. 분명 차를 탔을 때는 뜨겁게 끓는 물이었는데도, 찻잔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정식 방문 절차를 밟지 않고, 결계를 부수고 문을 지키는 골렘을 파괴한 죄. ”
“ 이 신전의 결계와 경비가 얼마나 철저한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
아리스텔라는 그 잔을 들어, 클로비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귀공자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클로비스는 체격마저 이자크와 비슷했다. 어깨가 조금 더 넓고, 인상이 원숙하다는 것 정도가 차이일까.
“ 저를 속이고 진실을 말하게 하는 차를 억지로 먹여 취조하려 한 죄. ”
“ 집행관으로서 제게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지요. ”
―촤악!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의 얼굴에 그대로 찻물을 뿌려버렸다. 진실을 말하게 하는 차. 본래라면 입에 머금고 삼키게 해야 했을 터지만,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의 입에서 진실을 듣고 싶지 않았다.
“ 그리고 마지막. ”
“ 당신을 범한 죄라고 말하실 셈입니까? ”
최대한 누그러뜨린 말투였으나, 클로비스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머리카락에서 찻물이 떨어져 턱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하얀 크라바트를 적셨다. 말끔한 귀공자는 다 식은 차에 흠뻑 젖어버렸다.
“ 아뇨. ”
이 남자와 골치 아프게 입씨름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인정이 중요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외부인이 아닌가. 떠나면 잊어버릴 사람이다.
“ 성녀가 여신의 현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신을 기만한 죄입니다. ”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 성녀는 여신의 현신이기에, 여신을 모시는 사제와 성기사는 그녀에게 복종한다. 신의 뜻을 따르는 종으로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녀의 의사는 사제의 계율보다 위에 있기에, 설령 성녀가 음욕에 타락하여 사제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위그멘타르는 음욕의 여신이다. 음욕의 여신을 몸에 봉인한 아리스텔라가 제 의지와는 달리 음란한 짓을 저지른다고 해서 그것이 그녀의 신성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그저 아리스텔라의 마음을 혼란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니 클로비스와 관계한 것을 탓해봐야 의미 없는 일이다.
위그멘타르를 붙잡아 화를 낼 수 없는 아리스텔라가 클로비스를 꼬집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그녀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였다.
“ 성녀님. 저는 성녀님을 기만한 적이 없습니다. ”
“ 당신은 저를 성녀가 아니라 여자로 보았고, 제 행동을 부정한 것이라 폄하했어요. 그리고 저와의 일을 외부에 알리겠노라 협박하셨지요. ”
“ 그건 당신이 먼저……. ”
“ 신은 제 앞에서 변명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
인간인 이상 실수를 하는 것도, 죄를 저지르는 것도 당연했다. 잘못을 저지른 인간이 신을 찾아와 용서를 빌고 회개하면 신은 그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며 변명하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반성하려 들지 않는 자에게는 크게 노여워했다.
아리스텔라는 이자크도 크리스도 용서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클로비스는 그에 한발 더 나아가, 책임을 그녀에게 떠넘겼다. 여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여신의 현신인 성녀의 신성을 부정했다. 그것은 이 신전과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 모두를 모욕하는 것과도 같았다.
아리스텔라는 신전의 주인으로서,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일을 모욕한 자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어디 한 번 사제들 앞에서, 성기사들 앞에서 제 신성을 부정해 보세요. ”
“ ……. ”
클로비스는 제 눈앞의 성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보다 한참이 작은 성녀는 의복을 걸치지 않아 가녀린 맨몸을 드러낸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처음 그가 다가갔을 때 보였던 경계심이나 두려움, 당혹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 앞에서 두려워하며 몸을 떨던 소녀도, 음염한 미소를 지으며 간드러진 신음으로 유혹하던 여인도 아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지만 그녀의 모습은 조금도 외설스럽지 않았다.
제 품안에서 분홍빛으로 물들어 윤이 나던 피부는 새하얀 색으로 돌아온 지 오래였다. 맑고 깨끗한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
‘ 같은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
이번에는 클로비스가 당혹스러워 했다. 이 여자가 정말로 잠들기 전, 제 품에 안겨 신음하던 요염한 여인과 동일인물이라는 말인가. 위험할 정도로 색스러운 몸짓으로 그를 유혹하고, 제 동생까지 유혹하여 정신없이 범해지면서도 쾌락에 울던 여인이 맞단 말인가. 클로비스는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두 가지 상반된 존재를 한 몸에 담아내는 그녀의 완전함이야말로 신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실례했습니다. ”
클로비스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클로비스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며, 신을 사칭하는 사기꾼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 성녀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로 신전에 들이닥친 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부디 저의 무례함을 용서하시길. ”
이자크는 성녀가 마녀라고 말했다. 어쩌면 정말로 마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순간, 그가 성녀의 앞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는 것은 연기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집행관으로서 오랜 세월 일해 온 그가 느낀, ‘ 사람을 벗어난 존재 ’에 대한 경외와도 같은 것이었다.
◇ ◆ ◇ ◆ ◇
“ 후우우……. ”
로이드에 대한 재판은 다음날로 미루기로 하고, 아리스텔라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직 알몸인 상태였다.
‘ 그 사람에게 옷을 입혀달라고 하고 싶지 않아. ’
아리스텔라가 머무는 중앙 건물은 한적한 편이고, 시종인 케인은 기사단장으로서 성기사들을 돌보기 위해 서쪽의 기사단으로 돌아갔으며, 사제들은 결계 보수와 새로운 골렘의 지도를 위해 바쁘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잠들고, 내일 아침 케인이 오면 옷을 입혀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제 막 어둑어둑해졌을 뿐이라 잠들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오늘은 너무도 지쳐버렸다. 아리스텔라는 일찍 잠들기 위해 벗은 성의를 화장대 앞의 의자에 걸쳐두고 침대로 다가갔다.
“ 아! ”
강한 힘에 이끌려 아리스텔라는 그대로 침대에 처박혔다. 부드러운 시트가 충격을 완화해 아프지는 않았으나 설마 제 침실에 누군가 있으리라 예상치 못한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 누, 누구……? ”
“ 하……. 알몸으로 복도를 건너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
방금 응접실을 나올 때 보았던 남자와 비슷한 얼굴이 보이자 아리스텔라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가 누군지 헷갈릴 만큼 경황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 이자크……. ”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도 감사합니다!
***
0류우0 님, artemisiaefolia 님, dfhyg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