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4 / 0219 ----------------------------------------------
신을 기만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
[64] 신을 기만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
꿈을 꾸었다.
아리스텔라는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신전의 공기는 파르스름한 빛을 띠기에 창문이 없는 방안에 갇히더라도 주위가 보이게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그곳은 암흑뿐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 여기는 어디일까. ’
어쩌면 위그멘타르의 신전이 아닐 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 폐쇄된 신전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리 없으니, 이것은 꿈일까.
아리스텔라는 어둠 속에서 살며시 손을 뻗어 제 몸을 만져보았다. 이상하게도 낯선 감각이었다. 거칠거칠한 피부,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마치 그녀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 꿈이니까,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
아리스텔라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어디에 길이 나있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걸었다.
“ 흐흑……. 흑……. ”
여전히 시야는 암흑뿐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디선가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제 울음소리는 아니었다. 누군가 곤경에 처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 거기, 누군가 있나요? ”
“ 흑……. 흐윽……. ”
아리스텔라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대답할 겨를이 없는 건지. 여자는 그저 흐느끼기만 했다.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것을 보니 근처에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손을 내밀어 휘저어 보아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 미안해……. 미안해……. ”
여자가 흐느끼면서 사과했다. 무엇에 대한 사과일까. 여자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이곳에서 울고 있는 것일까.
“ 내가,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
아리스텔라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여자의 흐느낌이 어딘가 이상했다. 처음엔 슬퍼하는 줄 알았던 그 흐느낌에 어쩐지 점점 이상한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절망, 혹은 공포가 섞여 있는 듯했다.
“ 제발, 제발……. 날 용서해줘……. ”
마치 거역할 수 없는 두려운 무언가를 마주하고, 잘못을 비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여자의 흐느낌은 잦아드는 일 없이, 점점 색스러운 신음이 섞여 들어온다.
“ 으응, 아……. 제발……. ”
겁에 질려 흐느끼는 것과 동시에, 쾌감을 느껴 달게 숨을 토하며 신음한다. 아리스텔라는 그 음성을 듣고 조금 부끄러워졌다. 이런 어둠 속에서 누군가 정사를 나누는 것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다. 실제로는 암흑뿐이라 보이지 않으니 엿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또 조금씩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아아, 아아아……. 그만……. ”
여자의 숨이 가빠졌다. 여자의 입에서 가느다란 교성이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뭔가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여자를 범하고 있는 건가. 추접스러운 소리가 점점 커져 간다. 아리스텔라는 말리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 어쩌지? 만약 강제로 당하고 있는 거라면 도와줘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데 방해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
만약 여자가 진짜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중이라면 제삼자가 방해하는 것은 몹시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여자의 색스런 신음이 들리기 전에 그녀가 겁에 질려 흐느끼던 것을 기억해냈다. 어쩌면 곤경에 처한 것일지도 모른다.
“ 저기……, 흡! ”
아리스텔라가 그녀를 구하려 말을 건네려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꿈에서 깨어났다.
◇ ◆ ◇ ◆ ◇
눈을 뜨기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매끄러운 입술의 감촉이었다. 숨결을 빨아들이듯 집요하게 파고드는 혀가 그녀의 입안을 어지럽혔다.
“ 흐응……, 콜록! ”
겨우 잠에서 깨어났을 뿐인데, 입술을 빼앗겨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게 된 아리스텔라가 작게 코로 기침하자, 입안을 헤집던 혀가 빠져나가고 입술이 떨어졌다.
“ 흐읏, 아……. ”
아리스텔라는 다시 작게 기침하며 눈꺼풀을 깜박여 눈물을 떨궈낸 뒤, 제 위에 몸을 드리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녀가 아는 남자를 닮았음에도, 그보다 훨씬 원숙하고 진한 인상의 남자. 폐쇄된 신전에 겁 없이도 쳐들어온 대담무쌍한 침입자.
“ 클로비스, 집행관님……? ”
“ 정신이 드신 것 같군요. 악몽을 꾸시는 것 같기에. ”
“ 대체 무엇을……, 엄마야! ”
아리스텔라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리다가 완전히 드러난 남자의 가슴팍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붉은 카펫 위에 성녀의 성의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아리스텔라는 뒤늦게 제가 알몸인 것을 깨닫고,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설마 내가 또……? ’
아리스텔라는 입을 가리고 눈을 감은 채 부르르 떨었다. 크리스나 이자크와 관계했을 때도 이성을 잃긴 했지만, 클로비스는 사제도 성기사도 아닌 완전한 외부인이다. 아리스텔라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 어, 어, 어째서……? ”
“ 여성의 유혹을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당신을 만족시켜드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만, 도중에 기절을……. ”
“ 꺄아아아! ”
클로비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부끄러운 진실을 가로막으려는 듯, 아리스텔라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뒤처리를 해준 것인지 몸이 찝찝하지는 않았지만, 아랫배와 음부가 심하게 시큰거렸다. 그 불쾌한 통증에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고 가늘게 신음했다.
“ 제가 당신을, 유혹했다고요……? ”
“ ……기억이 없으십니까? ”
클로비스의 목소리에 살짝 의아함이 섞인다. 클로비스는 아마 여신 위그멘타르가 뛰쳐나올 때는 성녀 아리스텔라의 의식이 잠들어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것은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들도 대부분 모르는 일이었다. 대신관 히페리온과 조슈아, 그리고 그녀의 시종인 케인 정도만 짐작하고 있었다.
“ 솔직히 놀라기는 했습니다. 성녀라는 분이 그토록 음란하실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거든요. ”
클로비스가 쿡쿡 웃는 소리가 그녀를 비웃는 것으로만 들려, 아리스텔라는 불쾌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가벼운 웃음소리였지만, 마치 아리스텔라에게 성녀의 자격이 없다고 경멸하는 듯한 차가움이 실려 있었다.
“ 그렇게 충직한 기사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로이드가 주인을 겁탈하는 죄를 범했다기에 궁금하기는 했습니다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 사실이 과연 외부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
“ 저와 있었던 일을 소문내실 건가요? ”
“ 글쎄요. 그건 성녀님께서 하시기에 달린 일이지요. ”
아리스텔라는 바닥에 흐트러진 성의를 끌어당겨 가슴을 거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뜨자마자 낯선 남자의 가슴팍이 보이는 바람에 놀라서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클로비스는 대충 옷을 걸쳐 입은 상태였다. 아리스텔라만이 알몸이었다.
“ 책임을 저에게 지우시는군요. ”
아리스텔라는 슬슬 화가 났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고 황망한데다, 제가 또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울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클로비스의 뻔뻔한 반응 덕분인가, 자신을 혐오하던 생각이 쑥 들어갔다.
“ 클로비스 집행관님. 저를 안은 것은 당신이 아닌가요? ”
“ 성녀님께서 유혹을 하셨지요. ”
“ 여자가 유혹하면 곧바로 덮치는 건가요? 당신의 의사는? 황성의 관리로서, 귀족으로서의 긍지와 신념은요? ”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신 위그멘타르는 음욕의 여신이고, 사제와 성기사들은 그런 신을 모시는 존재였으니까. 여신이 명령한다면 그들은 거절할 수 없다.
그러니 제 정신이 날아간 사이에 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는 크리스도 이자크도 처벌하지 않았다. 이자크는 아리스텔라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였기에 앙금이 남아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클로비스는 처지가 다르다. 그는 사제도 성기사도 아닌, 황궁에서 온 집행관이다. 여신 위그멘타르에게 영혼과 정신을 빼앗겨 홀릴 수밖에 없는 신의 종과는 달리, 클로비스는 그녀가 유혹해도 거절할 수 있는 외부인이었다.
“ 여성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신사의 마음가짐이 아니니까요. ”
로이드를 살리고 싶다는 아리스텔라의 청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그녀에게 진실을 캐물은 주제에, 클로비스는 참으로 뻔뻔했다.
아리스텔라는 가슴을 가리고 있던 성의를 치워버렸다.
“ 한 번 더 하실 셈입니까? ”
“ 아뇨. 이번에는 다른 부탁을 하려고요. ”
성녀가 남자와 관계를 맺는 일이 부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거절하면 되었을 일이다.
성녀의 몸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아리스텔라의 부도덕함을 문제 삼을 거라면, 똑같이 그녀의 유혹을 거절하지 않고 알면서도 선을 넘은 그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아리스텔라에게만 책임을 지우려 하는 것인가.
이 형제들은 참으로 뻔뻔했다.
“ 클로비스 집행관님. 이곳에 들어올 때 커다란 검을 가지고 오셨더군요. ”
“ 예. 둔탁해 보여도 제법 예리하답니다. 골렘의 다리를 베어낼 수 있을 정도로요. ”
흙과 돌로 이루어진 골렘의 다리를 부수는 것과 베어내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리스텔라는 응접실의 한쪽 벽에 놓인 클로비스의 검을 가리켰다.
“ 그럼 저 검이 얼마나 예리한지, 제 몸에 시험해 보시겠어요? ”
“ ……예? ”
“ 여성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신사의 마음가짐이 아니라면서요. 해보세요. 보고 싶네요. ”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무기도 들지 않은, 알몸의 여성에게 검을 들이댈 만큼 무뢰한은 아닙니다. ”
클로비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지만,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의 대답이 가증스럽게 들릴 뿐이었다.
“ 안아달라는 청은 들어주면서 죽여달라는 청은 들어줄 수 없다니, 결국 제 유혹이 문제가 아니라 클로비스 집행관님이 원해서 한 행동이었군요? ”
아리스텔라가 날카롭게 말하자 클로비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오늘 처음 만났을 뿐인데, 이 남자가 표정이 변하는 순간은 늘 한결같다. 마치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온 것처럼 익숙했다.
“ 알몸의 여자를 유린하는 것은 괜찮고, 검을 겨누는 것은 안 된다? 그렇게 자기 편의대로 말을 바꾸면서, 내게 책임을 지우려는 건가요? ”
클로비스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이 친절과 여유를 잃어도,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아리스텔라는 더 이상 클로비스 앞에서 떨지 않았다. 알몸인 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 당신이 원해서 나를 안은 주제에, 혼자만 책임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지 마세요! ”
============================ 작품 후기 ============================
64, 65화 연참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