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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관, 클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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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응접실이군요. ”
“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곳이라고 해요. 이렇게 일찍 오실 줄 몰라 준비한 것이 없어 죄송합니다. ”
“ 천만에요. 멋대로 침입한 무뢰한을 이리 친절하게 맞이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입에 발린 말을 하면서, 클로비스는 응접실의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 앉으시죠, 성녀님. ”
클로비스는 의자를 조금 빼내 아리스텔라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공작가의 후계자라고 하던데, 과연 귀족이기 때문일까. 거만한 듯 보이면서도 매너가 좋다. 아리스텔라는 답례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클로비스는 성녀가 여신의 현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신성 제국에서 교황청의 권위란 황제에 버금가는 것이고, 신에게 버림을 받아서는 백성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클로비스 역시 매주 미사에 참석하여 신을 경배하는 행위를 보이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으니까.
애초에 재앙의 여신 위그멘타르가 지상에 내렸다는 천벌, 「 대 재앙 」도 신의 노여움이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자연 현상이었다.
지진과 가뭄으로 식량부족에 시달린 인간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느라 인구가 줄었다. 곳곳에 시체가 쌓이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이들이 썩은 시체를 먹어 연명하니 전염병이 돌아 또다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저 인간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자연재해가 연달아 일어나는 바람에 생긴 악순환일 뿐이다. 신의 저주 같은 것이 아니라고 클로비스는 생각했다.
애초에 신을 인간의 몸에 봉인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클로비스는 성녀와 신전의 사제들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아리스텔라를 대했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 클로비스는 테이블 위의 찻주전자에 물을 부었다.
“ 아, 차라면 제가 탈게요. ”
“ 아닙니다. 성녀님은 여신의 현신이신데, 차 대접 따위를 하실 분이 아니지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
“ 하, 하지만 클로비스 집행관님은 손님인데……! ”
엄밀히 말하자면 처형을 집행하러 온 것이었으니 손님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클로비스는 외부인이었다. 당황하며 찻주전자를 잡으려는 아리스텔라의 손을 붙잡아 그녀의 무릎에 되돌리고는, 클로비스가 싱긋 웃었다.
“ 여신의 신전에 초대해주셨으니, 답례라 여겨 주십시오. ”
클로비스는 찻잔 두 개에 거무튀튀한 덩어리 같은 것을 하나씩 넣고는, 주전자의 뚜껑을 열고 붉은 마력석을 퐁당 떨어뜨렸다. 붉은 마력석을 머금은 주전자 안에서 부글부글 물이 끓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어머, 벌써 물이 끓은 건가요? ”
“ 야외에서 불을 지피기 어려울 때 물을 끓이기 위한 것인데, 실내에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군요. ”
클로비스가 아리스텔라와 그의 찻잔에 끓는 물을 따랐다. 찻잔에 떨어뜨렸던 거무튀튀한 덩어리가 끓는 물에 잠기더니 선명한 노란 빛을 띠면서 점점 커졌다.
“ 와아……! ”
그것은 물속에서 피어나는 꽃이었다. 화차라고 하던가, 순식간에 물을 끓이고 거무튀튀한 덩어리가 아름다운 노란 꽃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아리스텔라는 클로비스가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저희 지방의 특산품이랍니다. 성녀님의 취향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
“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예뻐요. ”
아리스텔라는 찻잔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을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뜨거운 물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라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찻잔을 들어 향기를 음미하고는 입으로 후후 불러 차를 마셨다. 차가 뜨겁다고 해서 입으로 부는 것이 실례임을 모르고 한 행동이었으나 성녀가 평민 출신임을 아는 클로비스는 그녀가 무심코 저지른 실례에도 여유로운 표정을 잃지 않았다.
“ 이렇게 향기로운 차를 마시는 건 처음이에요. ”
“ 마음에 드신다니 영광입니다. ”
살며시 눈을 내리깔고 웃어 보이는 클로비스는 확실히 이자크와 닮은 얼굴이었지만, 인상은 전혀 다르다.
처음 성문에서 골렘을 쓰러뜨린 것을 보았을 때는 무거운 검을 들고 있어서 마치 용병처럼 보였는데, 지금 이렇게 깔끔한 차림으로 차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귀족처럼 보였다.
“ 성녀님께서는 이 신전에 오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 네. 그래서 아직 신전 생활이 어색해요. 아무래도 남자분들이 제 옷을 갈아입혀 주시니까……, 어머나! ”
아리스텔라는 제 입에서 대뜸 부끄러운 말이 나오자 깜짝 놀라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흐음. 남자분들이 성녀님의 옷을 갈아입혀 주신다고요? ”
“ 아, 그게 말이에요! 이 신전의 성의는 여자의 손으로는 입고 벗을 수 없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목욕도……, 힉? ”
아무리 형을 집행하기 위해 황성에서 온 사자라고는 하나 클로비스와는 초면인데, 지금 자신이 초면인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싶어 아리스텔라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아리스텔라가 신전 문화에 서툴고 귀족들의 교양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도,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느니 목욕을 한다느니 하는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실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자꾸 멋대로 말이 튀어나오는 것인가.
“ 성녀님.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저는 성녀님께 진실을 듣고 싶은 것이니까요. ”
“ 클로비스 집행관님……? ”
“ 카루스 엔타타. 거짓을 삼키고, 진실을 피워내는 꽃이라고 하지요. ”
클로비스는 손끝으로 찻잔의 테두리를 슥 훑으며, 씩 웃어 보였다.
“ 저희 지방의 보물입니다. ”
그의 말과 표정에서 방금 제가 마신 차에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효력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아리스텔라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클로비스의 시선을 피했다.
“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성녀님. ”
“ 앗, 으……. ”
“ 제가 받은 보고로는 전 기사단장 로이드가 성녀님을 납치하여 강제로 범했다고 합니다만. ”
“ 나, 납치는 아니에요! 제가……. 제가, 로이드의 방으로 찾아갔으니까……. ”
“ 성녀님께서 찾아가셨군요. 무슨 이유로? ”
“ 도움을, 도움을 청하려고……. ”
클로비스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로이드의 감형을 요구할 생각이긴 했지만, 모든 사정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집행관의 태도에 따라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말하고,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지 몇 번이고 되뇌었는데, 진실을 말하게 하는 꽃차를 마셔버리는 바람에 제 뜻대로 말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 그렇다면 로이드는 도움을 청하러 온 성녀님을 겁탈한 중죄를 저질렀다는 거군요. ”
“ 겁탈이라니요……. ”
“ 신전 사제들이 로이드가 기절한 성녀님의 옷을 벗기고 강제로 범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거짓이 있습니까? ”
“ 옷은, 처음부터……. 벗고 있었어요. ”
“ 옷을 벗고 로이드의 방으로 찾아가셨다고요? ”
클로비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면서, 그가 놀라운 듯이 되물었다. 아리스텔라는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였다.
진실을 말하게 하는 꽃차라니, 이런 것을 예고도 없이 먹이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조사를 위해서라 한들 아리스텔라는 죄인이 아닌데, 클로비스의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 지금 너무 무례하신 것 아닌가요? 저는 차를 대접하신다기에 마신 것뿐인데……. ”
“ 낯선 남자가 내주는 차를 의심도 없이 마신 성녀님이 경솔하셨습니다. 제가 차에 엉뚱한 것을 탔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
“ 그런……! ”
“ 그렇게 순진하게 남을 믿으시니 곤욕을 치르신 거겠지요. 성녀님께 악의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겠습니다. ”
태도는 정중했으나 클로비스의 표정은 거만했다. 아리스텔라는 제가 신이라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래도 이 신전의 주인인데 외부인인 클로비스가 너무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 이자크의 형이라고, 하셨지요……? 정말, 닮으셨네요. ”
“ 배는 다르지만 형제니까요. 인상이 비슷하여 말하지 않으면 동복형제로 오인받기도 한답니다. ”
“ 얼굴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성격, 말이에요. ”
아리스텔라의 말에 클로비스의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놀라움이 아닌, 불쾌함을 담은 반응이었다. 아리스텔라는 남자의 얼굴에서 친절함이 사라지자 조금 두려움을 느꼈으나, 말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이자크는 아리스텔라의 말을 듣지 않고 막무가내고 화를 내며 창고에 그녀를 밀어 넣었지만, 클로비스처럼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못하도록 차를 마시게 하고, 유도심문을 해서 원하는 결론이 나오도록 의견을 종용하는 것은 훨씬 질이 나쁘다.
“ 저는 로이드의 처형을 바라지 않아요. ”
“ 성녀님을 강제로 범한 남자를, 용서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 용서도 하지 않아요. 저는 로이드에게 반성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기회를 주고 싶은 거예요. ”
“ 책임이라. 강제로 범한 여인에게 질 책임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
풋 하고 비웃는 소리가 들려, 아리스텔라는 울컥 화가 나서 클로비스를 쏘아보았다.
“ 저를 평생 지키기로 약속한 기사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기사도 아닌가요? ”
“ 그야 그렇지요. ”
클로비스는 찻잔을 들어 아리스텔라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가 마신 것이 한 모금뿐이라 아직 본심을 다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차를 더 마신다면, 아직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까지 술술 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차를 마시지 않았다.
“ 제게 이러시면 후회하실 거예요. ”
“ 흐음, 후회요? 제가 말입니까? ”
신전의 사제도, 성기사도 아닌데. 황성의 집행관이자 귀족인 클로비스를 평민 출신의 성녀가 어떻게 후회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클로비스에게는 덜덜 떨면서도 굽히지 않고 그에게 반항하려 드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이 그저 귀엽고 가소로울 뿐이었다.
“ 성녀님께 이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러네요. 어차피 당신을 지키는 기사에게 순결을 잃은 몸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요? ”
“ 네? 뭐를……, 흡! ”
클로비스는 찻잔을 기울여 꽃차를 입에 머금은 다음, 아리스텔라에게 입을 맞췄다.
“ 으으응! ”
아리스텔라는 차를 마시지 않으려 했지만, 클로비스의 커다란 손이 뒷덜미를 꽉 붙잡고 고개를 고정한 뒤 혀를 밀어 넣어 입안을 자극하자, 결국 어쩔 수도 없이 꽃차를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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