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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관, 클로비스
[59]
재앙의 여신을 그 몸에 봉인한 성녀는, 신전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인간 세상에 <대 재앙>을 일으킨 여신 위그멘타르의 권능을 빼앗은 것은 평화의 신 헤시우스였지만, 그의 영향력은 어디까지나 위그멘타르라는 여신을 인간의 육신에 봉인하는 것까지였다. 성녀의 몸에 여신을 계속 가둬두는 것은 인간들의 몫이었다.
지독히 넓은 신전 안에 성녀를 감금하기 위해, 사제들과 신성 마법사들은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성벽과 결계로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을 보호했다. 그것은 안에서 성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밖에서 성녀를 노리를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역대 성녀 가운데는 고위 귀족은 물론 왕녀도 있었다. 한평생 신전 안에 감금되어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지 못한 그녀들은 신전에서 나가기 위해 병사를 일으키거나 적국의 수뇌와 결탁하기도 했다. 그런 충돌이 있을 때마다 신전의 결계는 더욱 단단해졌고 경비를 서는 골렘의 수도 늘어갔다.
단순히 방비의 견고함으로만 따진다면, 이 신전은 최강의 요새일 터였다.
‘ 그렇데 어째서 침입자가? 성녀님은 평민 출신이 아니었나? ’
누군가 성녀를 데려가기 위해 침입할 일도 없건마는, 이자크는 어쩐지 가슴이 심하게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 ◆ ◇ ◆ ◇
케인과 함께 정오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미사실로 온 아리스텔라는 미사실을 꽉 채우는 사제와 성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분명 제가 어제 축복을 내리기는 했지만, 설마 성기사들이 이렇게나 많이 정오 미사에 참석할 줄은 몰랐다.
‘ 나는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사를 빠지고는 했는데, 성기사들은 다들 준비를 이렇게 하고 나와 있었구나. ’
이렇게 빠짐없이 참석한 것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미사에 나오고 싶었을까 싶어 아리스텔라는 코끝이 찡해졌다. 동시에 성기사들보다도 불성실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부끄러웠다.
‘ 성녀로서 모범을 보여야겠어. 오늘은 실수하지 말아야지. ’
전날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축복을 내리고 미사를 치르느라 어떻게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도록, 아리스텔라는 케인을 자리로 보내고 단상으로 올라가 히페리온의 옆에 섰다.
“ 이 자리의 여러분께, 여신의 은총을. ”
아리스텔라는 제 앞에 모여 있는 여신의 종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네고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위그멘타르 신전의 전부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의 인원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으나, 그녀가 기억하는 세 사람은 자리에 없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전 기사단장 로이드, 아리스텔라의 노여움을 사 은총을 받지 못하고 쫓겨난 성기사 이자크, 그리고 지난 밤 그녀를 강제로 안고 사라진 크리스.
‘ 크리스, 설마 미사를 빠질 줄은 몰랐는데. ’
성녀와 성기사에게는 미사 참석이 의무가 아니었으나 사제에게는 당연한 일과였다. 몸져누울 정도의 부상을 입거나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사제들은 아무리 피로하고 몸이 불편해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계율이었다. 수습사제라고는 하나 크리스가 미사에 불참하는 것은 이상했다.
‘ 어제 내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일까? ’
아리스텔라가 그를 거부하는 것을, 신에게 받은 은총을 거두어 간 거라고 오해라도 한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에게 화가 나긴 했지만 그를 궁지로 몰아넣을 생각은 없었다. 아리스텔라에게 크리스는 여전히 동생처럼 사랑스럽고 친근한 상대였다. 오해가 있다면 깊은 대화를 나누어 풀고, 그녀를 곤란하게 한 일을 사과 받고 싶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아리스텔라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미사가 끝나고 크리스를 방으로 부르거나 그를 찾아갈 수는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아직 그와 단둘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미사 중에 얼굴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크리스를 바라보는 일에 다시 익숙해진 후에, 천천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크리스의 부재는 아리스텔라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 어째서 이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걸까. ’
본의 아니게 사고를 당해 시종에서 물러나야 했던 크리스를 다시 시종으로 삼겠다고 결심하자마자, 간밤에 그가 아리스텔라를 덮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로이드를 구하기 위해 성기사들의 협조를 구하러 기사단에 갔을 때도 이자크에게 오해를 받고 범해졌다.
의욕적으로 뭔가를 하려 하면 꼭 일이 꼬여버린다. 사실 제 안에 있는 재앙의 여신은 아리스텔라를 불행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몸에 갇힌 울분을 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는 조금 우울해졌다.
좌석의 반을 성기사가 채우는 정오 미사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깐 채 기도를 올리고 있지만 사제들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고 성기사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설렘이 가득했다. 하지만 대신관 히페리온에게는 사제와 성기사들의 상반된 분위기보다도, 제 옆에 서 있는 아리스텔라의 우울한 얼굴이 더욱 신경 쓰였다.
성기사에게 미사에 참석할 권한을 주기 위해 아리스텔라가 그들에게 축복을 나누어 주었을 때는, 솔직히 놀랐다. 고지식하고 계율을 철저하게 따지는 히페리온에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마 그 일이 그날 밤, 아리스텔라가 히페리온에게 사랑을 나누는 연인처럼 관계하기를 요구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면 분명 그가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신 위그멘타르가 아닌 성녀 아리스텔라를 품에 안아본 히페리온은 그녀의 뜻에 거스를 수가 없었다.
‘ 성녀님은 내 주인이시다. 그분의 의사를 거슬러서는 안 돼. ’
성녀는 여신의 현신이며 그가 섬겨야 할 주인이었다. 그러니 히페리온은 그녀의 말과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최대한 감정을 죽인 채 따라야 했다.
히페리온이 아리스텔라를 안은 것은 그녀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연인처럼 다정하게 끌어안고 쾌락을 공유하던 것도 그녀가 요구했기 때문이다.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종의 역할. 거기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될 여지는 없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 나는 종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 감정을 품는 순간 더는 이분을 모실 수 없게 될 테니까. ’
만약 성녀의 뜻을 거스르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터져 나오는 것은 사제의 계율이 아닌 겨우 억누르고 있던 집착과 탐욕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곁에 두라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 말아달라고 매달리게 될 것 같아서, 히페리온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순종하기로 했다. 그것이 자신의 믿음과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비잉.
돌연, 미사실 중앙에 있는 성령석이 크게 울렸다. 성가를 부르던 사제들의 노랫소리가 멈추었다. 성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이 일제히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히페리온을 바라보았다.
“ 대신관님? 이건……. ”
“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경보입니다. 신전의 정문을 지키는 골렘이 쓰러졌다는군요. ”
“ 네에? ”
침입자라니. 이곳에 침입할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은 이 신성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아니었던가. 물론 아리스텔라는 한 번 이 신전의 지하에서 검붉은 촉수 괴물에게 붙들려 유린당한 적이 있지만, 그 일 이후로는 전혀 습격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씩 안도하고 있던 차였다.
“ 성녀님. 미사를 멈추고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케인이 딱딱한 얼굴로 아리스텔라를 향해 말했다. 출진 명령을 내려달라는 뜻이었다.
이 신전에 침입하려는 적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엄중한 결계를 깨고 성문을 지키는 골렘을 격파하는 중이라면 신전의 성기사들만으로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아리스텔라는 제단으로 걸어가 덮개를 덮어 촛불을 꺼 버렸다.
“ 미사를 중단합니다. 사제분들은 결계를 점검하고, 저는 성기사분들과 함께 문으로 가겠습니다. ”
“ 성녀님? 위험합니다! ”
사제들은 싸움은 성기사들에게 맡기고, 아리스텔라는 안전한 곳에 숨어 있으라고 말했지만 아리스텔라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신전의 주인이었다. 침입자가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돌아가는 상황은 직접 보고 파악하고 싶었다.
“ 케인. 당신이 저를 지켜주세요. ”
“ 예. 알겠습니다. ”
◇ ◆ ◇ ◆ ◇
―쿠웅!
“ 우왓! ”
신전의 문을 지키던 골렘이 제 쪽으로 넘어지는 것을 깨닫고 이자크는 얼른 몸을 굴려 피했다.
돌과 흙으로 만든 골렘은 바닥에 쓰러지자 곧 형체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바닥에서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올라와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이자크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 콜록, 콜록! ”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코와 눈으로까지 들어오는 흙먼지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눈도 뜨지 못하고 한참을 콜록거리던 이자크는 무거운 무언가가 바닥을 끄는 소리를 듣고 검병을 강하게 거머쥐었다.
포탄을 맞아도 끄떡없는 골렘이다. 그 거대하고 강력한 골렘을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런 적을 과연 혼자서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 그 여자가 성녀든 마녀든, 상관은 없지만……. ’
신전의 주인에게 버림받았다 한들, 이자크는 아직 기사였다. 성녀는 그에게 은총을 내려주지 않았으나 그의 기사 직위를 박탈하지는 않았다.
성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서, 적의 침입을 허용할 수는 없었다.
“ 그쪽인가! ”
흙먼지 사이로 천천히 움직이는 인영을 파악하고, 이자크는 그 검은 인영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쳤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아니라, 마치 바위에 부딪친 것 같은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엄청난 힘이 이자크를 밀어붙여, 이자크는 밀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뒤로 나동그라졌다.
“ 크윽! ”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탓인가, 머리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흙먼지 때문에 시야도 잘 분별이 가지 않는데 현기증까지 나니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맞서지 않을 수도 없었다.
누운 채로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이자크는 적이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갑옷도 투구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골렘을 상대로도 이긴 남자다. 대체 얼마만큼의 실력자인 것인가.
저벅. 저벅. 남자의 발걸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자크는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조심스럽게 거머쥐었다. 양손으로 쥐어야 하는 성검으로는 재빨리 맞설 수 없다. 적이 가까이 오는 순간, 이것을 눈에 찔러 넣는다.
‘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만 더……. ’
적이 이자크를 향해 무거운 검을 내리꽂으려는 순간, 검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일어난 이자크는 침입자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죽이는 것은 무리일 테니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기라도 해야 했다.
정확하게 눈을 찌르려고 휘두르던 손은, 곧바로 붙잡혀 꺾여버렸다.
“ 으윽! ”
“ 실력 차가 확연한 경우에는 맞서려 들지 말고 도망칠 방법을 모색할 일이지. 훈련병 시절에 배운 것을 벌써 잊어버리다니, 가르친 보람이 없구나. ”
“ 어, 어떻게……? ”
이자크는 제 귀에 들린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한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멍청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신전의 결계를 깨고 성문을 지키던 골렘을 쓰러뜨린 침입자. 갑옷도 투구도 없이, 날조차 손질되지 않아 거의 둔기에 가까운 무거운 검을 휘두르며 들어온 남자는, 이자크를 닮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남자였다.
“ 클로비스, 형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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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올린다고 해놓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날이 더우니까 너무 늘어지네요ㅠㅠ
선작과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