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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58화 (5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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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관, 클로비스

[58] 집행관, 클로비스

“ 으음, 추워……. ”

옷도 걸치지 않은데다 이불도 덮지 않고 자버렸으니 새벽 공기가 차가울 만도 했다. 아리스텔라는 엄습하는 한기에 신음하다가 일어났다. 시간은 아직 새벽이었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건지 어두운 하늘의 한쪽 구석이 파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 아……. ”

아리스텔라는 제가 알몸인 것을 깨닫고 무심코 가슴을 가리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엉망으로 구겨진 시트와 다리 사이에서 끈적거리는 액체의 느낌으로 간밤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 크리스가 나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

아마도 아리스텔라가 크리스와 관계한 것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분명 그날 크리스가 그녀를 방에 가두었을 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도 지금처럼 알몸이었다. 그리고 다리 사이가 욱신거리는 느낌도 그때와 같았다.

‘ 케인이 오기 전에, 목욕을 해야겠어. ’

남자가 입혀주지 않으면 성의를 입을 수 없다. 몸을 가릴 방안이 없으니 우선은 목욕을 해서 제 몸에 남아있는 정사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먼저였다.

음부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리스텔라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성녀의 방에 딸린 욕실은 그녀 혼자 목욕하는 욕실이라기엔 불필요할 정도로 넓었다. 깨끗하고 넓은 욕실. 커다란 욕조에는 늘 따스한 성수가 가득 채워져 있어, 언제 들어가든 그녀가 편히 목욕할 수 있도록 자동으로 정화를 하고 있었다.

“ 후우……. ”

아리스텔라는 살며시 욕조로 들어가 몸을 담갔다. 따스한 물이 온몸을 감싸자, 차가운 공기에 바짝 긴장했던 피부가 젖어들면서 피로가 사르르 풀렸다.

아리스텔라는 욕조에 등을 기대며 크리스와의 일을 떠올렸다.

<저한테 그런 짓을 하셔놓고……!>

처음 아리스텔라를 빈 방에 가두면서 크리스가 분노하여 외쳤던 말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밤 산책을 하다가 아리스텔라가 사고를 당한 일로 처벌을 받은 것이 아닐까 넘겨짚었었다. 하지만 그때 자신을 끌어안은 크리스는 분명 사랑하는 여인에게 욕정하는 남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 케인과 욕실에서 관계를 가졌던 것처럼,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크리스에게도 같은 짓을 했을지도 몰라. ’

예전이었다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니 억울하다 여겼겠지만 히페리온의 말을 듣고 난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리스텔라는 여신 위그멘타르의 현신이었고, 성녀를 섬기는 사제와 성기사들은 그녀의 종이었다.

만약 아리스텔라가 성욕에 미쳐 정신을 잃고 크리스를 유혹했다면, 수습사제라고는 하나 신의 종으로서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스로서는 그에게 성관계를 요구해놓고 막상 저가 안으려 할 때는 그를 거부하고 매도하는 아리스텔라의 태도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착하고 상냥한 크리스가 갑자기 돌변하여 억지로 그녀를 안으려 들 만한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 대체 내 몸으로 크리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

아리스텔라는 자신 안의 여신 위그멘타르가 원망스러워졌다. 여신을 몸에 봉인한 성녀의 몸으로 감히 신을 원망하는 행위가 무례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어깨를 감싸 안고 몸을 웅크렸다. 속상하고 원통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리스텔라가 제 안의 음욕의 여신을 잠재우지 않는 한 같은 일은 몇 번이고 일어날 것이다.

멋대로 사제나 성기사를 유혹하여 성관계를 가져놓고, 그들이 다가오면 몸서리치며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성녀 아리스텔라가 곧 여신 위그멘타르와 동일한 존재일 텐데, 제가 한 일이 아니라 제 안의 여신이 한 일이라며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가해자는 숨어버리고 피해자들만 남아버렸네. ’

사고는 위그멘타르가 쳤는데 그 뒷수습을 해야 하는 건 아리스텔라였다. 이것이 신을 모신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막중한 책임인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는 떨리는 한숨을 뱉어 속을 진정시킨 뒤 고개를 들었다.

‘ 조금 진정이 되면, 이번에야말로 크리스를 만나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보자. 크리스를 유혹한 것이 내가 아니라 여신 위그멘타르라는 것을 알면 놀라겠지만, 상냥한 크리스라면 분명 이해해줄 거야. ’

아리스텔라는 그녀의 순진하고 다정한 시종을 잃고 싶지 않았다. 본의가 아니라 한들 크리스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분명히 자기 자신이다. 크리스가 그녀를 강제로 안았다고 해서 신전에서 내칠 수는 없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함부로 내치지 않고 보듬어주기로 결심하지 않았는가.

크리스와의 오해를 풀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던 아리스텔라는 뺨을 찰싹 두드려서 정신을 바로잡은 뒤, 욕실에서 나왔다.

◇ ◆ ◇ ◆ ◇

기사단의 기사들은 다들 비까번쩍하게 광을 낸 갑주를 차려입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며 흡족해 했다. 무장해제 명령이 철회되어 갑주를 입고 성검을 차 성기사다운 차림으로 있을 수 있다는 점도 한몫을 하긴 했지만, 그들이 가장 기뻐하는 이유는 미사에 참석해 성녀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제들만 신을 찬양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성기사에게는 넘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미사에 참석하게 되다니, 다른 신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제 첫 미사에 참석했을 때는 그저 가슴이 벅차올라 제대로 기쁨을 표현할 수 없었지만, 두 번째인 오늘은 비로소 자신들이 성녀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 실감이 나 들떠서 차림새를 가다듬는 것이다.

“ 야. 나 오늘 좀 멋지지 않냐? ”

“ 수염이나 깎고 말해. 성녀님 앞에 나서는 일인데 지저분하게 그게 뭐냐. ”

“ 야! 이건 멋으로 기른 거거든? ”

기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가운데 이자크는 휴게실 구석의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신을 찬양하기 위해 열리는 미사에는 신의 은총을 받은 이들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성녀에게 축복을 나누어 받은 대부분의 기사는 정오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성녀에게 내쳐진 이자크는 미사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 성녀님은 왜 남들 앞에서 내게 그런 걸 물어보신 거지. ’

아리스텔라를 성녀로 인정하느냐니, 그것은 일개 성기사인 이자크가 감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 간에, 이 신전의 주인은 아리스텔라였다. 이자크는 그녀에게 진짜 성녀가 아니라 마녀라며, 모두를 속이고 있는 거라며 폭언을 퍼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제들 앞에서 성녀가 음란한 마녀라며 그와 성관계를 맺은 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이자크가 속내를 감추며 긍정을 하지 못하도록 진심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그녀의 신성함을 부정하는 것도, 거짓말로 긍정하는 것도 할 수 없었던 이자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보처럼 어물거릴 수밖에 없었고, 아리스텔라는 그의 그런 모습에 분노하여 미사실에서 그를 쫓아냈다.

성기사는 본래 미사에 참석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동료들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 성녀에게 내쳐졌다 ’는 사실을 이 신전의 모두가 알고 있는 이상, 이자크는 설 곳이 없었다. 누구도 그에게 욕을 하거나 해코지를 하진 않았지만 이자크는 이 신전에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전 기사단장 로이드와 마찬가지로.

“ 어이, 이자크. ”

이자크의 동기이자 룸메이트인 에른스트가 그를 불렀다. 이자크는 고개를 들어 에른스트를 보았다가, 한껏 멋을 낸 친구를 보니 괜히 빈정이 상해서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 뭐, 왜. ”

“ 너……. 그, 뭐냐. 같이 안 가도 되겠어? ”

“ 내가 같이 가서 뭘 해. 어차피 들어갈 수도 없는데. ”

대미사는 성령석을 통해 다른 신전에도 중계가 되기 때문에 미사실 밖에서 기사들이 경비를 서야 했지만, 평소 미사는 보는 사람이 없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 예전에는 성녀의 모습을 혹시라도 볼 수 있을까 하여 경비를 자원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정식으로 미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으니 굳이 미사실 밖의 경비를 자처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

에른스트는 이자크가 혼자 기사단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미사실 밖에서 경비라도 서면서, 성녀의 환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어 말을 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삐딱한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성녀에게 내쳐진 이자크가 괜히 심술이 돋아서 소중한 제 주인의 앞에서 무례한 언동이라도 보이면 큰일이다.

다혈질에 맹목적인 이자크는 훈련생이던 시절부터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사고를 친 전적이 있었다. 동기인 에른스트는 이자크를 잘 알고 있기에, 그를 걱정하면서도 선뜻 조언을 할 수가 없었다.

“ 그래. 그럼 쉬고 있어라. ”

이자크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고, 에른스트는 휴게실의 문을 나섰다. 미사 참석은 의무가 아니었으나 휴게실에 남으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제 주인인 성녀와 함께 미사를 보는 영광된 기회를 날려버리는 멍청이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이자크는 홀로 휴게실에 남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늘 동료끼리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휴게실이 조용했다. 그를 두고 미사를 보러 가버린 동료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혼자만 버려졌다는 기분이 들어 자존심이 상한 이자크는 괜히 애꿎은 벽에 주먹질을 했다.

“ 젠장! ”

눈을 감으면, 창고에서 제 품에 안겨 울며 허리를 흔들던 요염한 여인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이자크는 그 음란한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속에서 뭔가 울컥 치솟아 올라 몸서리쳤다.

성녀라는 여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자를 유혹하다니. 그 가증스러운 태도에 혐오와 멸시가 일어야 했을 텐데도 이자크는 아리스텔라를 혐오할 수가 없었다.

성녀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매음굴의 창녀보다도 못한 음란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이자크의 눈에는 그녀가 전혀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제 몸에 닿았던 살의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이 떠오르고, 귀를 기울이면 끊어질 것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열락의 기쁨을 표현하던 것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그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사주를 받고 들어온 마녀가 분명했다.

그날의 아찔한 경험 이후로, 이자크는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려워졌다. 오늘도 휴게실에 나와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혼자 있으면 알몸의 아리스텔라가 그와 살을 맞대며 신음하던 그때의 기억이 자꾸 떠올라 몸이 뜨거워졌다.

기사로서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마음속에 계속 음심이 차오르는 것을 혈기왕성한 젊은 기사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 그만, 그만! ”

또다시 귓가에 그녀의 색스러운 신음이 들리는 것 같아, 이자크는 강하게 고개를 털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한곳에 머물러 있으니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면 좀 나아지겠지. 이자크는 검술 연습이라도 할 요량으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기사단 정 중앙에 있는 성령석이 밝게 빛나며 크게 울렸다.

“ 어? ”

그것은 침입자가 발생할 때에 울리는 경보였다. 몇 겹이나 되는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는데다 마법으로 만든 골렘이 경비를 서는 이 신전에 어떤 간 큰 침입자가 쳐들어온단 말인가. 황당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나 기사단의 성기사들이 미사 참석으로 모두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이자크밖에 없었다.

골렘은 분명 강력하지만, 의지가 없이 정해진 규칙대로 행동하는 인형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만약 침입자가 교묘한 술수를 쓴다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그럴 때는 반드시 사람이 지시를 해야 한다.

이자크는 성검을 챙겨들고, 성령석이 반응하는 신전의 정문으로 뛰어갔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

59화는 낮 중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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