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55화 (5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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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55]

몸을 감싸는 따스한 물과 촉촉한 공기에 나른하게 한숨을 쉬던 아리스텔라는 남자의 단단한 손이 제 어깨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케인의 얼굴이 보였다.

“ 으응……. 케인? ”

“ 죄송합니다. 잠시 자세를 고쳐드리려 한 것뿐인데, 깨워 버렸군요. ”

“ 괜찮아요. 제가 깜빡 잠들……, 어머나! ”

아리스텔라는 제가 알몸인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가슴을 가렸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리며 욕조의 물이 작게 일렁였다.

두 사람은 욕조에 들어와 있었다. 절정을 느끼고 잠들어버린 아리스텔라의 뒤처리를 하고 몸을 닦아주기 위해 케인이 그녀를 욕실로 데려와 씻기고 있었던 것이다.

신성 마법을 구사하는 사제라면 굳이 목욕을 시키지 않아도 마법으로 그녀의 몸을 정화할 수 있지만, 신성력이 약한 케인으로서는 직접 아리스텔라를 씻기는 수밖에 없었다.

‘ 으아아. 어쩌면 좋아……. ’

아리스텔라는 케인에게 뒤처리를 맡겨놓고 팔자 좋게 잠들어버린 자신의 무책임하고 나태한 행동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시종이라지만 제 손으로 뭔가 하기는커녕 일을 시켜놓고 늘어져 있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 저기, 케인. 미안해요. 나머지는 제가……. ”

“ 아닙니다. 다 끝났습니다. ”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젖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정리해서 넘겨주고, 타올로 몸을 감싸 가슴을 가려주었다. 젖은 타올을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좋지 않지만, 아리스텔라가 알몸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때문이었다.

“ 고, 고마워요……. ”

케인의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손길은 자상했다. 아리스텔라는 케인에게 답례 인사를 하고, 겨우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목욕 시중을 들었을 때는 그가 갑자기 옷을 벗는 것을 보고 눈을 둘 곳을 몰라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 케인의 몸은 갑옷을 입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척 크고 단단해 보였다.

남자의 맨몸을 그다지 본 일이 없긴 하지만, 장신이라도 늘씬한 히페리온이나 호리호리한 조슈아와는 달리 케인은 정말로 건장해 보였다. 탄탄한 근육으로 된 갑옷이라고 할까, 군데군데 잔 흉터가 가득했고 가슴에는 커다란 칼자국이 나 있었다. 셔츠 너머로 만지기만 했던 상처를 목도하고 아리스텔라는 작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 보기 흉한 모습을 보였군요. 가리도록 하겠습니다. ”

“ 아니, 아니에요! ”

케인이 타올로 제 몸을 가리려 하자,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케인의 가슴에 손을 짚었다.

“ 성녀님? ”

“ 그……. 케인이 많이, 아픈 것 같아서요. ”

“ 오래된 흉터입니다. 이제는 아프지 않습니다. ”

제 상처를 보고 아픔을 떠올린 것인가. 상냥하고 순진한 사고방식이다. 케인은 머뭇거리면서 제 상처를 쓰다듬는 아리스텔라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기실 상처를 입어도 크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대로 목숨을 잃기 때문이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 적은 있어도 상처가 아파서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병사는 부상을 입었을 때가 아니라 무사히 생환하여 상처의 치료를 받을 때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몸에 난 것이 아니라도, 눈앞에 상처를 입은 몸이 보이면 마치 제가 상처를 입은 것처럼 오싹하고 고통스러웠다.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시종인 케인의 몸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 치료로……. 없앨 수는 없는 거겠죠? 이 흉터. ”

“ 성녀님께 보이기에는 흉측한 몸입니다만, 제게는 전사로 살아온 세월을 상징하는 영광의 흔적입니다. ”

“ 휴, 흉측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저……. ”

흉터를 볼 때마다 케인이 상처를 입었을 때의 고통을 떠올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케인이 이 흉터를 자신의 긍지로 여긴다면 그것을 보며 그녀가 아픔을 느끼는 것 또한 실례일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살며시 고개를 숙여, 케인의 가슴 흉터에 입을 맞췄다.

“ 이제 이곳에서는 당신이 다칠 일은 없을 거예요, 케인. ”

“ 성녀님……. ”

성녀의 몸에 봉인된 여신은 재앙의 여신이라 들었는데, 어째서 그녀는 이토록 상냥한 것일까.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자애로움에 감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웠다.

‘ 어쩌면 사제들이 말한 재앙의 여신이라는 것도, 일반적으로 말하는 재앙과는 그 의미를 달리하는지도 모르지. ’

로이드의 일로 사제를 불신하게 된 케인은 그렇게 생각하여 아리스텔라의 ‘ 또 다른 모습 ’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처음 아리스텔라와 욕실에서 관계를 가졌을 때는 케인도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서 제대로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아리스텔라가 요구하고 허락한, 오늘의 경험을 그녀와 교감한 ‘ 처음 ’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욕실에서 나온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몸을 닦고 성의를 입혀 주었다. 새하얀 성의를 입은 아리스텔라는 제 품에 안겨 달콤하게 울던 여인이 아니라 고고하고 우아한 성녀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리스텔라가 머리를 빗기 위해 화장대 앞에 앉자, 케인이 브러시를 집어 들었다.

“ 제가 빗겨 드리겠습니다. ”

“ 네? 케인이요? ”

시종이라고는 하지만 기사인데, 여자의 머리를 빗기는 방법을 알고 있을까. 아리스텔라는 조금 의아했지만 케인이 이미 브러시를 들고 가버렸기에 바로 앉아 손을 무릎에 올리고 등허리를 폈다.

케인은 가볍게 브러시를 쥔 채로, 아리스텔라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사락사락. 결 좋은 물빛의 긴 머리카락 사이로 브러시가 흘러내릴 때마다 그녀의 촉촉한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성수는 바닥의 카펫에 떨어져 진한 물방울 자국을 남겼다가, 금방 사라져버렸다.

“ 케인도 은근히 섬세하네요. ”

“ 제가 말입니까? ”

“ 케인은 기사니까, 빗질 같은 것은 잘 못할 줄 알았거든요. 후후. 여자 머리를 빗겨본 경험이 많은가 봐요. ”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의외의 구석에 감탄하여 기분이 좋아 말을 건넸지만, 케인은 아리스텔라가 말한 ‘ 여자 머리를 빗겨본 경험 ’을 신전에 오기 전 그가 여자들과 문란하게 놀았으리라고 오해하여 한 말이라고 생각하여 강하게 부인했다.

“ 결단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

“ 네, 네? ”

“ 신전에 오기 전까지 저는 성기사가 아니었지만, 황궁 기사단에도 엄연히 규율이 존재합니다. 문란한 생활을 일삼는 자는 처벌을 받습니다. 저는 맹세코 기사의 위엄을 잃는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

또 뭔가 말을 잘못한 건가. 아리스텔라는 혼란스러웠으나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하려고 애썼다.

‘ 여자 머리를 빗질하는 건 기사의 위엄에 해가 되는 행동인 걸까? ’

여자 시중이나 드는,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케인에게 기사답지 못한 행동을 시키고 있는 것일까.

아니, 하지만 그녀에게 머리를 빗겨주겠다고 말한 것은 케인 자신이 아닌가.

아리스텔라는 결국 케인이 말하는 ‘ 기사의 위엄 ’과 ‘ 여자 머리를 빗겨주는 일 ’의 상관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 띄웠다.

“ 성녀님. 빗질이 끝났습니다. ”

“ 아, 네. 고마워요……. ”

빗질이 끝나 머리카락은 차분하게 정리되었으나 머릿속엔 의문만이 남았다. 이미 몇 번이나 케인과 대화가 통하지 않아 난감했던 아리스텔라는 괜히 또 질문했다가 케인이 오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몸을 섞고 목욕을 하면서 시간이 꽤 흘렀는지, 어느새 창밖이 어두웠다.

“ 그럼 주무실 준비를 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

“ 아, 케인! 잠깐만요. ”

보통은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각이지만, 케인과 섹스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던 아리스텔라는 아직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지금 바로 누우면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 아직 잠이 오지 않아서 그러는데……. 잠시 바람을 쐬고 와도 되나요? ”

“ 밤 산책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

전에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크리스와 밤 산책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밤에는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케인과는 대화가 잘 통하지 않으니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무리였다.

“ 안 될까요……? ”

“ 아닙니다. 어디로 뫼실까요? ”

케인이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묻자, 아리스텔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창밖의 어두운 밤하늘을 보고 말했다.

“ 별을 보고 싶어요. ”

◇ ◆ ◇ ◆ ◇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은 무척 넓었다. 중앙에는 성녀가 머무르는 큰 건물이 있고, 사방으로 뻗은 회랑으로 각 방향의 탑이 연결되어 있다. 그 주위를 다시 두터운 성벽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밖으로는 결계가 둘러져 있다.

‘ 이곳의 건물은 전부 높아서, 마을에 있을 때처럼 넓은 하늘을 볼 수가 없어. ’

정원으로 나오면 하늘이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높은 건물들에 가려진 모형 정원처럼 작은 사각형의 하늘이었다.

시골 출신인 아리스텔라가 기억하는 밤하늘은 시야에 가리는 것 없이 넓게 펼쳐진 까만 하늘에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는 별빛이 가득한 풍경이었다. 그것을 이 신전에서는 볼 수 없어 조금 답답하게 여겼다.

케인은 아리스텔라를 데리고 남쪽 탑의 옥상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사람이 오를 일이 없어 별로 열릴 일이 없는 낡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새까만 밤하늘이 펼쳐졌다.

“ 와아……. ”

고향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지만, 시야가 탁 트인 것만으로 아리스텔라는 해방감을 느꼈다. 시원한 밤바람이 그녀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 성녀님. 춥지 않으신지요? ”

“ 상쾌해서 기분 좋아요. ”

아리스텔라는 앞으로 나아가 난간에 손을 짚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청량한 신전의 공기는 밤에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몸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에 아리스텔라가 나른하게 신음하자, 그녀의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겼다.

“ 탑 꼭대기라서 높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떨어지기라도 하면 위험합니다. ”

조심스럽게 걱정을 내비치는 케인의 눈빛에 아리스텔라는 후후 웃으며 그에게 기댔다.

“ 아무리 폐쇄된 신전이라고 해도 하늘은 넓은 게 좋아요. 하늘마저 작게 보이면 정말로 감옥에 갇힌 것 같아서 갑갑하거든요. ”

“ 앞으로는 자주 이곳으로 모시겠습니다. ”

성실하게 대답하는 케인이 문득 귀엽게 느껴져서,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뺨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 케인은 정말 따뜻하네요. ”

“ 갑옷을 입지 않아서 체온이 그대로 전달되는 거겠지요. ”

“ 으음, 그게 아니라……. ”

늘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알아듣는 케인에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려면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할까, 아리스텔라는 고민하다가 결국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말로 전달할 수 없다면 행동으로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케인이 보여준 호의와 정성에 보답하고 싶었던 아리스텔라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성녀님……? ”

“ 당신이 제 시종이라서 다행이에요. ”

처음으로 경험하는 신전 생활. 낯선 남자들 틈에서 평생을 지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아직도 남자는 어렵고 시중을 받는 것도 어색했다. 정신을 잃어 여신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제 안의 욕구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던가.

‘ 아직도 좀 무섭긴 하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면 잘해나갈 수 있을 거야. ’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케인은 밤공기가 차가운 것과 아리스텔라가 말했던 ‘ 따뜻하다 ’는 말 때문에 그녀가 추워한다고 생각해 가녀린 몸을 꼭 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으로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그저 지금 이 순간이 편안하기만 했다.

그래서 남쪽 탑의 꼭대기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끌어안고 있는 그들을 보는 눈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2시에 올리려고 했는데 어느새 3시가 가까워졌네요. 56화는 낮 중에 올라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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