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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도 피하지 말고
[52]
성녀의 축복은 대개 사제가 성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춤으로서 축복을 받는 형태였다. 성녀가 직접 자신의 종에게 입을 맞춰 축복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신의 이름을 높이는 공적을 세워서 그것을 치하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 성녀님! ”
곳곳에서 사제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개의치 않고, 천천히 입술을 부비면서 케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정성스러운 축복의 의식이 끝나고 아리스텔라가 눈꺼풀을 올렸을 때 보인 것은 감격의 빛을 띠고 있는 케인의 푸른 눈동자였다.
“ 성녀님……. ”
“ 이제 당신은 저와 교감할 수 있게 되었어요. ”
아리스텔라는 생긋 웃으며 몸을 일으키고, 아직도 문 밖에 서 있는 기사들을 향해 손을 올렸다.
“ 들어오세요. 기사분들께도 축복을 나누어 드릴게요. ”
◇ ◆ ◇ ◆ ◇
기사들 전부와 키스를 나눌 수는 없어 아리스텔라는 단상에서 내려와 양손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그녀의 앞에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기사가 여신의 은총을 받는 것도 경악스러운 일인데, 사제보다 먼저 성녀의 축복을 나누어 받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아론은 비교적 표정을 잘 숨기는 편이라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뒤에 서있는 평사제들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특히 이곳에 올 때 그녀의 발을 멈춰 세웠던 붉은 머리의 평사제 노엘은 하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신의 축복은 기사들과 나눈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저렇게 욕심을 낼까. ’
아리스텔라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얌전히 기사들에게 손을 맡기고 있었다. 성녀의 축복과 성기사들의 맹세가 끝나고, 맨 뒤에 남아 있던 이자크가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아리스텔라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 성녀님. 당신의 종……에게, 여신의 은총을. ”
이자크가 조금 머뭇거리며 손등에 키스하려 하자, 아리스텔라는 그에게서 손을 슥 빼냈다. 이자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어 아리스텔라를 올려다보았다. 아리스텔라는 이자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 이자크. 당신은 저를 성녀로 인정하나요? ”
“ 예? ”
이자크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이자크를 바라본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말을 오해하여 창고에 가두고 화를 낸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자신을 모욕한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만약 이자크가 아리스텔라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고 성녀답지 못하다고 말했다면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리스텔라의 말을 멋대로 오해하여 그녀를 모욕했다.
아리스텔라가 신전 문화에 무지하고 서투른 것과, 이자크가 그녀를 창녀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별개였다. 아리스텔라는 온순하여 싸움을 싫어하고 갈등이 일어나면 제가 먼저 뜻을 굽히는 편이었으나, 이자크의 교만은 그녀가 허용한 선을 넘었다.
“ 이곳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사실대로 말씀하세요. ”
“ 서, 성녀님……. ”
이자크는 당혹스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아리스텔라는 이자크에게 망신을 주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인정하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자크가 아리스텔라를 성녀로 인식하는 것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진심이어야만 했다.
“ 대답할 수 없다면, 당신은 미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
“ 아, 아닙니다! 성녀님, 저는……! ”
“ 돌아가세요! ”
아리스텔라가 답지 않게 소리를 높이며 쏘아붙이자 이자크는 흠칫 놀라 어깨를 떨더니, 그녀로부터 한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주위의 술렁임이 한층 심해졌다. 이자크는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위그멘타르의 신전에서, 그 여신의 현신인 성녀에게 내쳐졌다. 신을 섬기는 성기사가 신에게 내쳐졌다. 그것은 곧 이자크가 더 이상 신의 종이 아님을 의미했다.
목을 베지 않아도, 이 신전 안에서 이자크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 죄송, 합니다……. ”
이자크는 쥐어 짜내는 목소리로 힘겹게 한마디를 뱉고는, 몸을 돌려 도망치듯 미사실을 빠져나갔다. 여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신전의 낙오자를 뒤쫓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 ◇
아론의 표정은 딱딱했고, 조슈아는 간혹 눈이 마주치면 아리스텔라에게 웃어 주었다. 대신관 히페리온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 아리스텔라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한 일을 히페리온이 좋게 받아들였을지, 나쁘게 받아들였을지 알 수가 없었다.
찬물을 뿌린 듯 조용해진 미사실에서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함께 하는 첫 미사가 끝났다. 성기사들을 기사단으로 돌려보내고 아리스텔라가 케인과 함께 문을 나서자, 붉은 머리의 평사제, 노엘이 그녀를 따라왔다.
“ 성녀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 자는 왜 데려가시는 겁니까? ”
“ 케인은 제 시종이니까요. ”
“ 성녀님의 시종은 저입니다. 대신관님께서 제게 성녀님을 보필하라 말씀하셨다고요! ”
노엘이 종종걸음으로 따라와 아리스텔라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섰다. 한 계단을 딛을 때마다 그의 길게 땋은 머리가 휘적휘적 흔들린다. 아리스텔라는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 대신관님이 임명한 시종은 케인이에요. 케인이 제게 접근 금지 처분을 받아 시종이 바뀌었지만 제가 그 처분을 철회했으니 케인은 아직 제 시종입니다. ”
“ 성녀님. 하오나 이 자는……. ”
노엘이 은근히 무시하는 눈빛으로 째려보아도, 케인은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케인에게 답례 인사를 하고 방 안에 들어선 아리스텔라는 자신을 따라 들어오는 노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 하지만 케인이 부재중일 때, 제 곁을 보필할 사람이 필요해 대신관님께서 당신을 보낸 것도 사실이죠. 대신관님의 뜻을 존중해서 노엘, 당신이 원하신다면 시종을 두 사람 두도록 하겠습니다. ”
“ 예? ”
노엘이 목소리를 높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사제와 기사는 사이가 좋지 않다. 히페리온처럼 공명정대해야 하는 위치거나, 조슈아처럼 방관자인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제는 기사를 꺼려했다. 그것은 싫어한다기보다는, 자신과 동급이 아니라 그 이하로 취급한다고 보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 성기사가 성녀의 가장 가까이에서 수발을 드는 시종이 되고, 신의 은총을 받는 미사에 참석하여, 특별한 공을 세웠을 때에야 비로소 받을 수 있는 여신의 입맞춤을 받다니, 아무리 젊다고는 하나 사제로서 자라온 노엘은 제가 보고 겪은 일을 인정할 수 없었다.
“ 서, 성녀님은 성기사를 너무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
“ 편애하는 것이 아니에요. 동등하게 대우할 뿐입니다. ”
“ 그것이 편애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
동등하지 않은 두 존재를 동등하게 여긴다. 기사에게 명령하는 위치에 있으며, 성녀를 독차지하는 것이 당연한 사제의 위치에 있던 노엘에게 아리스텔라의 행동은 명백한 편애이며 차별이었다.
“ 성녀님께서 제가 곁에 있기를 원치 않으시는데, 제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
그 머리카락처럼 얼굴이 벌게진 노엘이 두 손을 꽉 쥐고 부르르 떨더니, 휙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여신의 현신인 성녀 앞에서 무척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아리스텔라는 노엘을 붙잡고 따져 묻지 않았다.
덜컹.
무거운 방문이 닫히고, 방안에는 아리스텔라와 케인, 두 사람이 남았다.
“ 하으으……. ”
“ 성녀님? ”
갑자기 아리스텔라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케인이 그녀를 일으키려 팔을 붙잡자, 아리스텔라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 괜찮아요……! 괜찮아요, 케인. ”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다.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가 이제야 긴장이 풀린 것인가. 상황을 파악한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정돈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 무리하셨던 거군요. ”
“ 제가 떠는 모습을 보여서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으니까요. ”
케인에게 명령을 내리고, 기사들을 설득하고, 사제들 앞에서 기사들에게 축복을 주는 것이 아리스텔라에게 익숙할 리 없었다. 히페리온과 함께 새벽 기도를 하면서 겨우 용기를 내어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지만, 자칫 실수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일이 끝날 때까지 무사히 버텨준 제 두 다리에 감사했다.
“ 미안해요, 케인. 당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그런 명령을 내리고……. ”
“ 아닙니다. 성녀님의 명령을 듣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
이럴 때조차도 성실하게 대답하는 케인을 보고 아리스텔라는 피식 웃었다. 케인은 늘 진지하고 정중한데, 그 점이 이상하게 귀엽게 느껴진다.
“ 명령은 끝이에요. 이제 편한 대로 있으세요, 케인. ”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질문을 할까, 그녀의 언행이 경솔했다며 지적을 할까. 아리스텔라는 아직 긴장으로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케인이 무엇을 먼저 말할지 기다렸으나,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 케인……? ”
“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케인이 무겁게 입을 열고 말한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 성녀님을 보필하는 것이 제 역할인데, 성녀님께 보호를 받았습니다……. ”
이자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처형을 각오하고 아리스텔라를 찾아갔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케인도 이자크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기사단에 찾아가 사기가 꺾인 성기사들을 격려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사들을 데리고 성당으로 찾아가 그들이 앞으로 미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렸다.
단 하루만에, 케인은 두 번이나 그녀에게 구원을 받았다.
“ 그……. 저는, ‘ 종 ’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요……. ”
아리스텔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케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종을 지키는 것은, 주인의 의무잖아요. ”
그 말에 케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주인을 섬기고, 주인을 위해 일하다가 목숨을 다하는 것이 종의 의무다. 케인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반대로, 종이 자신을 섬기는 만큼 주인으로서 종이 편안하도록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 작은 주인이 필사적으로 용기를 내어 그와 그의 부하들을 구해냈다. 이 얼마나 자애롭고 현명한 분인가. 케인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성녀님. 무엇이든 명령하십시오.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
“ 목숨 같은 건 바치지 마세요. 당신들을 살리려고 이렇게 고생한 거라고요……. ”
“ 제가,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어리석은 종에게 부디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
케인은 제 가슴에 기댄 아리스텔라의 몸을 살짝 일으켜,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리스텔라는 아직 긴장이 덜 풀린 듯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케인에게 속삭였다.
“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세요. ”
그것은 명령이 아니었으나 케인은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는 아리스텔라의 가녀린 몸을 꼭 끌어안고, 아직도 떨리는 한숨이 흘러나오는 붉은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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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끝에 낙이 오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