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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도 피하지 말고
[51] 두려워도 피하지 말고
여신 위그멘타르는 음욕의 여신이라고 히페리온은 말했다. 아리스텔라가 성욕을 느껴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거나, 혹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간 남자가 그녀를 범한다고 해서 제 신성이 쇠퇴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아리스텔라가 성욕에 미쳐서 이 자리의 모든 남자와 관계를 가진다 하더라도, ‘ 위그멘타르의 현신 ’은 더렵혀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음욕의 여신이라는 이름에 충실할 뿐.
그렇다고 해서 전대 신관들의 일기에 적힌 것처럼, 부끄러움도 모르고 여러 남자와 마구 관계를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 연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관계하고 싶었다. 제 안의 욕망을 잠재울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그것을 풀고 싶었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그와 잠자리를 가졌고, 의식을 잃지 않고 제정신인 상태로 절정을 느끼고 잠들었다. 겨우 그녀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해답을 찾았다. 그러나 그 답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따르는 이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 나를 따르는 사람을 죽게 해서는 안 돼. ’
신전의 주인이자 종을 부리는 여신의 현신으로서, 아리스텔라에게는 제 아랫사람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아리스텔라는 사제와 기사들을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신으로 여겨 섬기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주인으로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지키고 싶었다. 성녀 아리스텔라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한 이들에게 행복과 평안을 주고 싶었다.
“ 저는 더럽혀지지 않았고, 로이드는 기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로이드의 처우를 결정할 권한은 사제에게도 기사에게도 없어요. 제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으음, 저를 힘들게 한 책임을 어떻게 지도록 할지는 오로지 제가 판단할 부분이죠. ”
“ 하지만 성녀님. 로이드 전 단장을 기사단에서 내치더라도, 사제들이 저희를 믿지 못하고 무장 해제를 강요하면 저희는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
“ 사제들이 그런 명령을 내리도록 제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예요. ”
“ 이번에는 성녀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지만, 사실 저희는 중요한 의식이 아니면 성녀님의 모습을 보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저희 성기사는 사제들의 구역은 물론, 대성당의 미사실에도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
아리스텔라는 사제들의 보호를 받는다. 외부로 나갈 일이 없는 아리스텔라는 기사들의 직접적인 호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신전 일에 서투른 아리스텔라 대신 사제들이 더욱 적절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기사들로서는, 자신이 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성녀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사제들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겠지.
“ 그럼 들어올 수 있도록 할게요. ”
“ 예……? ”
“ 당신들이 저와, 다른 사제들과 함께 미사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요. ”
아리스텔라의 말에 기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 케인. 정오 미사 시간이 되었네요. 미사실로 안내해주세요. ”
“ 예, 성녀님. ”
“ 다들 케인을 따라오세요. ”
케인은 접근 금지 처분을 받은 자신이 성녀를 성당으로 안내하는 것을 그녀가 말한 ‘ 위험한 명령 ’이라 판단하고 따르려 했다. 하지만 아리스텔라가 기사단의 기사를 전부 이끌고 성당에 가리라고는 예상치 못해 당황했다.
‘ 기사들은 성당에 들어갈 수 없는데. 사제들을 어찌 설득하려고 이러시는 거지? ’
케인은 혼란스러웠으나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아직 그에게 질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케인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뒤의 젊은 기사들을 향해 외칠 수밖에 없었다.
“ 열을 맞춰서 따라와라! ”
◇ ◆ ◇ ◆ ◇
본래 미사는 신과 직접 교감할 수 있는 사제들이 신을 찬양하는 행위였다. 성기사는 제아무리 신성력이 높다하더라도 신과 영적인 교감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미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신전기사는 사제의 명으로 신의 은총을 전파하고 부정을 물리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사제의 호위나 의식의 보조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 폐쇄된 신전에서는 기사들이 밖으로 나설 일이 없다. 로이드가 성기사들을 이끌고 성녀 아리스텔라를 데려오러 갔을 때가 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외출이 될 터였다.
젊은 기사들이 성녀에게 직접 명령을 받고 싶다고 사제들에게 요청한 것은 그들이 성녀의 모습을 보는 것이 무척 어렵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으며, 나온다 하더라도 기사들은 들어갈 수 없는 미사에만 참석했다.
아무리 그들이 신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성녀가 여신의 현신이라고는 하나 얼굴도 모르는 주인을 위해 한평생 사제들의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삶은 가혹했다. 새로운 성녀의 탄생에 맞춰 뽑은 젊은 병사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대단한 것을 바란 것은 아니다. 사제와 기사의 지위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은 젊은 기사들도 알고 있었다. 그저 성녀의 모습을 보고, 제 주인이 누군지를 각인하고 충성을 맹세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것으로 족했다.
그런데 성녀가 모습을 보이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도 모자라, 함께 미사를 볼 수 있게 하겠다니. 생각지도 못한 성녀의 행동에 기사들은 다들 당황했다. 그녀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단장인 케인이 망설임 없이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분명 기사들 가운데 성녀의 발을 멈춰 세우고 질문하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 성녀님! 지금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
그러나 아리스텔라를 불러 세운 것은 그녀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아니었다.
붉은 고수머리를 길게 땋아서 늘어뜨린 젊은 사제가 아리스텔라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성기사 무리를 보고 깜짝 놀라 기겁하며 달려왔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수습사제는 아니고 정식 사제인 듯했다.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었다.
‘ 대미사 때 내 뒤에서 주의를 준 사제로구나. ’
아마도 노엘이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아리스텔라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그는 야무진 인상과는 달리 허둥대는 태도를 보였다. 어쩐지 크리스와 비슷한 인상이다. 히페리온이 보낸다던 시종이 설마 이 사람일까. 아리스텔라는 살며시 눈을 내리깔며 그에게 인사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 정오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중이에요. ”
“ 하지만 뒤에 기사들이……. ”
“ 기사들은 미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계율이 있다면서요? 그것을 고치려고 합니다. ”
“ 예? ”
노엘이 기겁하며 어깨를 떨었다. 기사가 미사에 참석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미사 중에도 딴청을 피우고, 제 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중요한 의식을 치르다가 쓰러질 뻔한 것이야 시골 출신으로 신전 문화에 무지하여 저지른 실수라 생각하여 넘겼지만, 이것은 도가 지나쳤다.
성녀가 신전의 계율을 어기고 성기사들을 이끌고 미사실에 들어가다니, 전무후무한 대사건이다.
“ 성녀님, 안 됩니다. 성녀라는 분께서 어찌하여 계율을 가벼이 여기십니까? ”
“ 가볍게 여기지 않으니까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성기사도 엄연히 신전에서 신을 모시는 이들인데, 신의 축복을 받는 미사에 참석할 수 없다니, 저는 그것이 잘못된 계율이라고 생각해요. ”
아리스텔라의 옆에는 새로이 기사단장이 된 케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노엘은 케인의 건장한 체격과 강렬한 눈빛에 압도당해 아리스텔라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그녀를 막아 세우지도 못했다. 건장한 기사 무리를 뒤쫓아 가면서 필사적으로 외칠 뿐이었다.
“ 성녀님, 연달아 큰일을 겪으셔서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지금 기사들은 근신하며 처벌을 기다리는 중……. ”
“ 저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어요. ”
위그멘타르 신전의 성기사는 성녀를 섬기는 존재였다. 그들이 사제의 명령을 듣는 이유는 성녀가 직접 명령을 내리지 못해, 사제들이 성녀의 의중을 헤아려 대신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사제가 그들에게 내린 명령을 철회했다. 그들에게 근신하라는 명령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명령도, 성녀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따를 필요가 없었다.
성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기사단에 틀어박혀 사제들의 판결을 기다리며 초조해하던 때의 그들이 아니었다. 처음 나올 때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걸음걸이가 안정되고, 등이 곧게 펴졌다. 자신감과 긍지를 되찾은 성기사들의 태도가 당당해졌다. 그래서 노엘은 더더욱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덜컹.
성당의 문이 열리고, 신성한 제단에서 밝은 빛이 쏟아졌다. 문을 열고 등장한 아리스텔라와 그 뒤에 열을 지어 서 있는 성기사들을 보고 사제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 성녀님? 뒤에는 대체……. ”
“ 사제분들이 성기사들에게 내린 근신과 무장 해제 명령을 철회했습니다. 이제 이분들은 자유로이 신전 안을 돌아다닐 수 있어요. ”
“ 저희는 성녀님을 생각해서 무장 해제를 요구한 겁니다. 성녀님을 욕보인 자도 기사가 아닙니까. ”
“ 한 사람이 잘못하면 다른 사람도 연좌되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건가요? 저는 그런 식으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요. ”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성녀가 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의 아버지 알베르트가 거액의 빚을 지는 바람에 빚쟁이들이 집안에 들이닥쳤다.
가정을 돌보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몇 년 만에 집에 돌아오더니만 빚쟁이를 몰고 왔다.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집안이 엉망이 되었다.
불량배들은 어머니와 동생을 때리고 아리스텔라를 끌고 가 자기들 마음대로 유린하려 했다. 꿈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다.
아리스텔라의 아버지 알베르트는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새파래져서 도망쳤을 뿐 어머니나 동생처럼 필사적으로 붙들고 매달리지 않았다. 아마도 도망친 것이 아니라 신전에 도움을 요청하려 한 거겠지. 결국 속셈은 아리스텔라를 신전에 팔아넘기기 위해서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그 일 이후로 아리스텔라는 더 이상 아버지를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가정을 버린 남자가 빚을 졌는데, 어째서 그 벌을 우리 가족 모두가 받아야 했을까. ’
가족인 이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리스텔라는 그 ‘ 어쩔 수 없다 ’는 말이 싫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누군가에게 떠넘겨서도, 같이 나누어지자고 끌어들여서도 안 된다.
아무리 기사단장이라 하더라도 로이드가 저지른 죄는 로이드 한 사람이 벌을 받는 선에서 끝나야 한다. 성기사 전체에게 벌을 내리는 것을 아리스텔라는 바라지 않았다. 연좌제는 그녀가 가장 질색하는 것이었다.
“ 제가 신전 문화에 무지하고 경황이 없어 명령을 내리지 못했으니 사제분들이 저와 상의하지 않고 결정을 내린 것에 불만을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제게 알리지 않고 기사들의 처우를 결정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
아리스텔라는 미사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성기사는 미사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계율 때문에 그들은 문가에 멈춰 서서 난처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성녀는 그들에게도 미사를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지만, 기사들을 바라보는 사제들의 눈빛은 결코 곱지 않았다. 신과 교감할 수 없는 기사들로서는 선택받은 자만이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장소에 발을 들이는 것이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 왜 들어오지 않으시나요? ”
“ 성녀님. 성기사를 미사실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
뒤를 돌아보며 손짓하려는 아리스텔라의 손목을 아론이 붙잡아 내렸다.
아론과 만나는 것은 분명 대미사 이후로 처음이다. 그러나 꿈속에서 아론에게 ‘ 정화의 의식 ’을 받았던 아리스텔라는, 그의 커다란 손이 제 손목을 잡은 것만으로 악몽이 떠오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며 손을 뿌리쳤다.
“ 저는 기사분들께도 사제분들과 똑같이 미사를 보게 하고 싶어요. ”
“ 신의 은총을 받는 자리입니다. 성기사의 신성력은 사제보다 미약하여, 신과 교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신과 소통할 수 없는 이들이 어찌 신을 찬양하겠습니까. ”
“ 아뇨, 가능합니다. ”
이곳이 위그멘타르의 신전이 아니라면, 아론의 설명에 아리스텔라도 납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전의 주인은 성녀였고, 아리스텔라는 위그멘타르의 현신이었다. 인간의 육신으로 현현한 신인 그녀는 성기사들과 소통하는 것도 교감하는 것도 가능했다.
“ 케인. 안으로 들어오세요. ”
아리스텔라가 아직 문밖에 서있는 케인을 부르자, 케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표정을 가다듬고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성큼. 건장한 기사가 미사실 안으로 들어서자 사제들이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텔라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그녀의 가까이 다가온 케인이 단상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케인보다 한참 작은 아리스텔라는 단상 위에 올라가야만 겨우 그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 당신에게, 여신의 은총을. ”
아리스텔라는 살며시 고개를 숙여, 케인에게 입을 맞췄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52화는 낮 중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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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지 않도록 고민하다보니 쓰는 속도가 느려져서 예전만큼 연참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힘내서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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