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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낸다는 것은
[50]
품안의 여인은 마치 설탕으로 만든 인형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 꼭 안으면 부서져버릴 것처럼 가녀리면서도, 가까이 있으면 그 따스한 몸을 끌어안고 새하얀 피부에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달콤한 향기가 났다.
케인이 알고 있는 여인의 체향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남자보다 살내음이 부드러운 것이야 당연하지만, 이렇게 군침이 돌 만큼 달콤하고 풋풋한 향기가 난 적은 없었다. 치장을 하지 않는 성녀는 향수를 뿌리는 일도 없을 터인데, 어째서 그녀의 몸은 이토록 향기로운가.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촉촉하고 통통한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 당겼다가, 그녀의 벌어진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 흐응, 읏……. ”
케인과 아리스텔라의 체격 차이가 워낙 큰 탓에, 케인의 혀가 들어간 것만으로 그녀의 입안이 가득 찬 것 같았다. 케인은 천천히 혀끝을 움직여 부드럽고 촉촉한 아리스텔라의 입안을 쓸었다. 더운 숨이 섞이면서, 그녀의 감은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 하으……. 케인, 지금……. ”
두 사람의 입술이 잠시 떨어졌을 때, 아리스텔라가 곤혹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반응으로 거절의 의사를 확인한 케인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손을 뗐다.
“ 이, 이런! 죄송합니다! ”
케인의 품에 꼭 안겼다가 갑자기 몸을 지지하던 단단한 팔이 풀어지자 아리스텔라는 잠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두 사람이 숨어있던 장소가 좁은 거울 뒤 공간이라서 다행이었다. 아리스텔라는 벽에 등을 기대어 숨을 몰아쉬다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첫키스였다.
남자와 벌써 몇 번이나 몸을 섞었는데도 키스는 처음이라니 제 처지가 우습지만 사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아리스텔라는 손등으로 입술을 누른 채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케인의 입술과 혀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았다.
“ 성녀님…….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
“ 제가 또 케인을 유혹했나요? ”
“ 아, 아닙니다! ”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젓는 케인을 보고, 아리스텔라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케인은 분명 그녀와 처음 욕실에서 관계했을 때 ‘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케인은 아리스텔라를 원하지 않는데 충동적으로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키스는 어떤 의미일까.
“ 케인. 왜 저에게 키스한 거예요? ”
“ 죄송합니다, 성녀님. 제가 실수를……. ”
“ 저에게 키스한 것이 ‘ 실수 ’인가요? ”
“ 예? ”
고개를 숙인 채 사죄하던 케인이 고개를 들어 아리스텔라를 마주보았다. 케인보다 한참이 작은 그의 성녀가, 늘 그를 어려워하며 가까이 가기만 해도 달달 떨던 소녀 같은 여인이, 지금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어떻게 거짓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케인은 그녀를 범해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며 거짓말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자신의 행동에 변명하지 않는 것이 기사. 실수를 감추거나 축소하려 하는 것은 케인이 이제까지 가장 혐오하던 일이었다.
아리스텔라는 케인이 그녀를 범하고 거짓말을 한 일에 대해 처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케인을 용서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앞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행동으로 갚으라고도 말했다. 케인은 솔직하게 고백했다.
“ 실수가 아닙니다. ”
“ ……. ”
“ 성녀님을 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고, 참지 못하고 입을 맞췄습니다. 성녀님께 무례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욕망을 우선시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처벌해 주십시오. ”
아리스텔라는 한발 물러나서 케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렇게 무섭기만 했던 거구의 기사가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것은 케인이 갑주를 입지 않고 패용한 검이 없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 케인. 왜 자꾸 저에게 처벌해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
“ 제가 잘못을 저질렀기에……. ”
“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케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
아리스텔라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 것은 케인인데, 그는 지금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는 건가. 아리스텔라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케인이 그녀와 키스한 것을 실수로 여기고 잘못으로 여겨 후회한다면, 첫키스를 도둑맞은 기분이 되어 비참해질 것 같았다.
“ 실수도 아니고, 유혹당한 것도 아닙니다. 처벌을 각오하고 잘못을 저지를 때 더욱 죄가 가중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
“ 어째서요? ”
“ 그……. 원해서, 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
충동적이긴 했지만, 멈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부드러운 몸을 품에 안고 달콤한 입술을 탐하고 싶었다. 자애로운 성녀가 두 번이나 자신을 욕보인 남자를 혐오하여 처벌한다 하더라도, 제 팔에 그녀를 안을 수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걸 수 있었다.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으로서 무책임한 행동이지만, 그 순간 케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지키는 분을 범하려 하다니 이 무슨 불경한 생각을. 내가 이자크에게 화를 낼 처지가 아니었구나. ’
케인은 자신에게 떨어질 불호령을 묵묵히 기다렸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화를 내지도, 소리쳐서 시종을 부르지도 않았다.
“ 케인. ”
작고 고운 손이 케인의 손을 살며시 감쌌다. 부드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노기는 실려 있지 않았다. 케인은 눈을 깜박이며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제가 어떤 처벌을 내리더라도, 받아들일 자신이 있나요? ”
“ 물론입니다. ”
케인은 강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처벌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자애로운 성녀는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그의 기사 직위를 박탈하려 할까, 신전에서 내쫓을까, 혹은 다른 굴욕적인 처벌을 내릴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기로 한 케인은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기로 결심했다.
“ 이제부터 케인에게 위험한 명령을 내릴 거예요. ”
“ 위험한 명령이라 하심은……? ”
“ 제가 허락할 때까지, 제 명령에 반발하지 마세요. 질문하는 것도 금지하겠어요. ”
처음 듣는 단호한 말에, 케인은 의아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텔라는 조용히 문가로 다가갔다.
“ 제가 기도실에 없는 것을 확인한 시종이 다시 방으로 찾아올 거예요. 그 전에 저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주세요. 기사단으로 갈 거예요. ”
“ 기사단에 말입니까? 무슨 일로……. ”
무심코 의도를 물으려다 케인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주인인 성녀는 자신을 섬기는 기사에게 질문하는 것을 금지했다. 의도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처벌이든 받아들이겠다고 한 이상,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알겠습니다. ”
성녀의 시종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복도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케인은 아리스텔라의 몸을 안아들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재빨리 복도를 빠져나갔다.
◇ ◆ ◇ ◆ ◇
아리스텔라는 케인과 함께 기사단을 방문했다. 무장 해제를 당한 데다 성녀의 근처에도 가지 못해 수행할 임무가 없어 휴게실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기사들은 성녀의 방문에 기겁하며 재빨리 열을 가다듬고 그녀의 앞에 섰다.
“ 성녀 아리스텔라입니다. ”
아리스텔라가 인사를 하지 않아도 그들은 한 눈에 그녀가 자신들의 주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리스텔라는 케인을 문가에 세운 뒤, 기사들 앞으로 한발 나아갔다.
“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사안이 급박하게 흘러가는지라 예고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
아리스텔라는 형식적인 사과의 말을 건넨 뒤, 바로 본론을 꺼냈다.
“ 내일 집행관이 도착하면, 그를 설득해서 로이드의 처형을 막으려고 합니다. 사제들이 기사들과 상의하지 않고 자신들만으로 로이드의 처형을 결정했다는 점을 들어 판결을 유보할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사분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
“ 성녀님. 로이드의 처형에 반대하시는 겁니까? ”
“ 저는 로이드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요. ”
아리스텔라의 대답에 기사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어제 이자크가 자신을 향해 보였던 눈빛이다. 놀라움과 분노, 그리고 불신이 섞인 흉흉한 눈빛이다.
“ 그럴 수 없습니다, 성녀님. 어떻게 성녀님을, 섬겨야 할 분을 더럽히려 한 자를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
“ 아니지, 더럽히려 한 게 아니라 더럽혔잖아. ”
“ 미친놈아 말 가려서 해! ”
저들끼리 또 험한 말이 오간다. 아리스텔라는 기사들의 표현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전날 이자크가 같은 말을 했을 때 아리스텔라는 그 표현을 정정하려 들지 않았다. 기사들이 그녀와 쓰는 표현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신전이고, 이 신전의 주인은 성녀인 아리스텔라였다. 기사들은 그녀를 섬기는 이들이다. 그러니 아리스텔라가 불편하게 여기는 표현은 지적하는 것이 옳았다.
“ 저는 더럽혀지지 않았어요. ”
아리스텔라의 말에 기사들이 떠드는 것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자를 어려워하는 아리스텔라는 커다랗고 힘이 좋은 기사들이 제 주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축되어, 마을에서 신전으로 오는 내내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 이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구나. ’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자신을 지키는 기사들의 얼굴을 살폈다. 혈기 넘치는 젊은 기사들을 통제하는 것은 노련한 기사인 케인으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갑옷을 입고 성검을 차고 적과 싸우는 성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실력 이외에 체격도 중요했다. 대부분 아리스텔라보다 머리 하나 이상이 큰 이들이었다.
맨 뒤에 서 있는 이자크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의심쩍은, 그러나 불안한 눈빛으로 아리스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자크를 처형하지 않겠다고 케인에게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이자크의 행동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저 남자에게는 따로 벌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자크가 모욕한 아리스텔라가 어떤 사람인지 그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저는 여신 위그멘타르의 현신이자 당신들의 주인입니다. 제가 이 신전의 성녀로 있는 이상, 그 누구도 저를 더럽힐 수 없어요. ”
아리스텔라의 말에 기사들이 불안하게 눈빛을 주고받으며 수군댄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그들 앞에서 당당했다.
이제까지 아리스텔라는 제 안의 음욕을 거부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성욕이 이는 것을 억지로 참으려 하면 정신이 날아간다. 크리스와 관계할 때도, 이자크와 관계할 때도 그랬다. 케인과 관계했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그 전까지 아리스텔라는 조슈아 이외의 남자에게 안기는 일에 거부감이 있었다. 아마도 흥분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다가 착란을 일으킨 거겠지.
그런데 로이드에게 강제로 안기면서는 정신이 날아가지 않았다. 아리스텔라를 구해주었던 로이드가, 그녀를 섬겨야 할 성기사가 억지로 범하고 있는데도 의식을 잃지 않았다.
<성녀님, 사랑합니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고백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제 안을 뜨겁게 달구는 열기에 정신없이 허덕이면서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제 귓가에 속삭인 한 마디를, 아리스텔라는 잊을 수가 없었다.
“ 말씀하신 대로 성녀님은 여신의 현신. 인간인 저희가 신의 신격을 더럽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전 기사단장 로이드는 자신의 주인을 범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기사도를 어긴 기사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
“ 로이드는 기사가 아닙니다. ”
로이드를 거부하면서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백했던 한 마디 때문이 아닐까. 아리스텔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 저를 사랑하는, 남자일 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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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가 올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노블레스 이벤트가 있었더라고요.
새로 봐주시는 분들도, 예전부터 봐주셨던 분들도 모두 감사합니다.
+ Schwertleite 님, 난제 님, 푸르딩딩밤탱 님, 둥둥이s 님, Cierra 님, 사라진토끼 님, yellowysk 님, Greenrose 님, Cute곰탱이 님, 이찌 님, ㅅㅇㅈ 님, 설우민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