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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낸다는 것은
[49]
─쿵!
바닥에 두꺼운 카펫이 깔려있음에도 제법 크게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아플 텐데 왜 저러는 거야?
“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로이드 경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처벌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
“ 네? 뭐가요? ”
“ 기사단의 이자크가 지난밤 성녀님께 로이드 전 단장이 저질렀던 것과 같은 죄를 범했다고 들었습니다. 부하의 실수는 상관의 책임.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
“ 네에? ”
간밤 기사단에서 그 젊은 기사에게 범해졌던 일을 케인이 알게 되었다는 것도 민망했지만, 케인이 왜 처벌을 요구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리스텔라를 범한 것은 그 이자크라는 젊은 기사이지 케인이 아니었다. 케인이 이자크에게 성녀를 범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리도 없는데 왜 그가 책임을 지려 한단 말인가.
“ 즉시 성녀님을 찾아뵙고 죄를 고한 뒤 자결할 생각이었습니다만, 큰일을 겪으신 성녀님의 앞에 죄인의 목을 떨구는 것도 충격이 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제 처형 집행은 집행관에게 맡길 터이니 마땅한 처벌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
“ 저기, 그건 케인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케인이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
“ 저 하나의 목으로 씻을 수 있는 죄가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부디, 제 부하의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
“ 케인……. ”
“ 이자크를 신전에서 쫓아내시든, 기사의 신분을 박탈하시든, 어떠한 벌을 내리시든 상관없습니다. 허나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
케인의 필사적인 말에 아리스텔라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로이드가 그녀를 범한 일로 처형당하게 되었으니, 같은 죄를 저지른 이자크도 당연히 처형당할 거라고 케인은 판단한 것이다. 부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하려는 걸까.
“ 그럴 수 없어요. 케인은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
벌이라는 것은 잘못한 사람이 받아야 한다. 누가 대신하는 것도, 대표로 책임지는 것도 아리스텔라는 싫어했다.
“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
“ 네? ”
케인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 제가, 성녀님을 범했습니다. ”
“ 네……? ”
케인은 입을 꾹 다물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아리스텔라에게 사실을 고했다.
처음 그녀의 시종이 되어 목욕 시중을 들다가 아리스텔라가 흥분하여 이성을 잃었던 일. 그녀의 ‘ 또 다른 인격 ’이 튀어나와 유혹하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범했던 일. 그대로 기절해버린 아리스텔라에게 아무 일 없었다고 거짓말을 한 일까지.
“ 제, 제가……. 케인, 당신과 관계를 가졌다고요……? ”
“ 예. ”
케인의 단호하고 짧은 대답에 아리스텔라는 현기증을 느꼈다. 기억에도 없는 성관계라니, 아무리 제 안에 깃든 것이 음욕의 여신임을 알았다고는 하나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나와 관계를 맺은 남자들이 더 있는 것이 아닐까. ’
누구와 언제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것을 일일이 조사할 만큼 이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만약 또 모르는 남자와 몸을 섞었다면. 그것이 한, 두 남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고 성의를 꼭 붙잡았다.
“ 제가, 욕실에서……. 당신을 유혹했다고요……. ”
“ 유혹에 넘어간 것은 제 책임입니다. 부디 저를 벌해 주십시오. ”
“ 그럴 수 없어요. ”
원치 않게 성녀가 되었고 원치 않게 남자들과 몸을 섞게 되었다. 누군가 그 일로 자신을 비난할까봐 아리스텔라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
스스로 원해서 한 행동이 화를 부른 거라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음욕의 여신이 몸 안에서 날뛰는 것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면 괴로울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음란하기 때문이 아니라 몸 안의 여신이 반응하여 제 몸을 멋대로 휘두르는 거라고, 그렇게 합리화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휘말렸다. 조슈아가, 크리스가, 그리고 케인이 그녀 안의 음욕의 여신에게 유혹을 당했다. 이것을 여신의 현신인 아리스텔라가 책임지지 않으면 대체 누구에게 책임전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 제게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케인을 처벌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저를 모욕한 그 기사를 처형하는 일도 없을 거고요. 로이드 전 기사단장의 처형 역시 막을 거예요. ”
“ 성녀님……. ”
“ 누가 죽는 것도 싫고, 누가 대신 잘못되는 것도 싫어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미래의 행동으로 갚아나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그녀가 무릎을 꿇는 것에 놀란 케인이 어깨를 움찔 떨었지만, 그녀는 그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격려하듯 토닥였다.
“ 평생 이 신전에서 저와 함께 하실 거잖아요? 사이좋게 지내요, 우리. ”
이제까지 케인은 성녀를 그저 작고 연약한 존재라 여겼다. 그렇게 가녀린 그녀를 로이드나 이자크가 멋대로 범했다는 사실에 그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적을 상대로는 아무리 용맹하게 맞서 싸워도, 케인은 약자에게는 절대로 폭력을 쓰지 않았다. 힘이나 권력을 이용해서 저보다 약한 이를 괴롭히거나 멋대로 휘두르려 하는 것을 케인은 질색했다. 그가 귀족이나 권세가와 사이가 나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덩치 큰 남자가 가까이 오기만 해도 위압감에 무서워서 몸을 움츠리고 달달 떠는 성녀가 끔찍한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서 견디기 어려웠다. 만약 케인이 기사단장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 기사단을 이끌 책임을 맡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이자크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도 똑같이 아리스텔라를 범한 죄를 고하며 자결했겠지.
기사단장과 부단장, 젊은 기사가 나란히 목숨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신전의 기사단이 유지될까. 기사들이 성녀를 지킬 수 있을까. 케인은 성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사단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케인조차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성녀를 범했다. 같은 일은 또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판국에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재판조차 없이 기사들이 줄줄이 처형당해서는 기사단이 유지되지 않는다.
‘ 말씀을 드리러 오길 잘했어. ’
케인은 제 어깨에 양손을 얹고 웃어 보이는 성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빛이 났다.
“ 예. 성녀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
케인의 생각보다도 아리스텔라는 훨씬 자애롭고, 강한 성녀였다.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이런 관대함이 나오는지 순수하게 궁금할 따름이었다.
“ 성녀님. 아침 준비를 도우러 왔습니다. ”
“ 힉! ”
문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리스텔라와 케인은 동시에 움찔 굳었다. 그러고 보니 히페리온이 새로운 시종을 보내겠다고 그랬지. 로이드의 일로 기사가 성녀의 시종을 맡을 리 없으니 새로 온 시종은 사제일까.
케인은 성녀에게 접근 금지 처분을 받았다. 처형을 각오한 이상 여기서 죄목이 더 추가된다 하여 꺼릴 것이 없어 달려온 그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로이드와의 일로 사제들이 기사에게 날을 세우는데 성녀와 케인이 함께, 그것도 그녀의 방에 함께 있음을 들키면 곤란해질 것이다.
‘ 케인, 이쪽으로 오세요. ’
‘ 성녀님? ’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손을 잡아끌어 커다란 전신거울 뒤로 이끌었다. 공간이 비좁을 줄 알았는데, 주위를 커튼으로 가려서 그렇지 성인 남자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있었다.
일이 끝날 때까지 여기 숨어 있으라는 건가. 케인은 은신에는 재주가 없었으나 아리스텔라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얌전히 있을 테니 걱정 말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를 숨기고 시종을 맞이하러 나갈 줄 알았던 아리스텔라가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바짝 붙어 섰다.
‘ 성녀님? 지금…… ’
‘ 쉿. 소리 내면 눈치챌 거예요. ’
아리스텔라가 대답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문밖의 사제는 노크를 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사제의 조용한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전신거울과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에 숨은 두 사람은 사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가슴에 기대어 숨을 죽였다. 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비 독을 묻힌 화살을 맞았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손가락을 까딱하기는커녕 눈조차 깜박일 수가 없었다.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들렸다. 작은 몸인데도 아리스텔라의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리는 것이 맞닿은 가슴을 통해 전해졌다. 무장 해제를 당해 갑옷을 입지 않은 상태의 케인이 아리스텔라의 몸을 느끼는 것은 그날 욕실에서 관계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리스텔라의 몸은 작고 가녀렸다. 동시에 부드러우며 탄력이 있었다. 그의 가슴에 기대있는 아리스텔라의 말랑말랑한 가슴의 감촉과 따스한 체온, 달콤한 체향에 케인은 허리가 뻐근해지면서 현기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몸이 더워지며 야릇한 기분이 들었으나, 자신이 섬겨야 할 성녀에게 사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믿고 있는 케인은 이자크의 일로 밤새 고민한 탓에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억지로 납득했다.
“ 어라? 방에 계시지 않네……. 아직 기도실에서 돌아오지 않으신 건가? ”
아리스텔라의 방을 방문한 사제는 그녀의 침대가 싸늘하게 식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듯 주위를 대충 둘러보다가 도로 방을 나갔다. 성녀가 잠들었다면 모를까, 자신의 방 안에서 사제를 피해 숨어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덕분일 것이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에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나간 것 같아요. 이제 괜찮아요, 케인. ”
“ ……. ”
“ 케인? ”
아리스텔라가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케인과 눈이 마주쳤다.
어두워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케인의 얼굴은 조금 붉었다. 어쩐지 숨이 거친 것도 같다.
‘ 좁은 공간에 둘이 숨는 바람에 답답해서 그런가? ’
아리스텔라가 그로부터 떨어지려 한 발짝 물러나려 하자 케인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 저기, 케인? ”
“ ……성녀님. ”
눈이 마주치고, 얼굴이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찰나.
“ 으응……! ”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쳤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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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지적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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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는 낮 중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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