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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48화 (4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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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낸다는 것은

[48] 용기를 낸다는 것은

새벽 공기는 청량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속설답게 복도는 깜깜했으나, 파랗게 빛나는 신전의 공기 덕분에 주위를 분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을 따라 계단을 내려와 복도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전의 건물은 온통 새하얀 색으로, 생김새도 구조도 비슷비슷해서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웠다. 그렇다고 매번 시종이나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방에서 기도실로 가는 길 정도는 익혀두고 싶었던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을 따라가면서 주변 풍경과 모퉁이에서 꺾어 내려가는 횟수를 세어가며 길을 익혔다.

아리스텔라가 거리를 재는 중이라는 것을 파악한 히페리온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따라오기 편하도록 약간 걸음을 늦췄다.

“ 성녀님. 복도의 층을 구분할 때는 기둥 중앙에 나있는 홈의 줄 수를 세면 됩니다. ”

“ 네? 그런 건가요? ”

“ 예. 2층에는 2줄, 3층에는 3줄의 홈이 나있지요. ”

히페리온의 설명을 듣고 복도에 늘어선 기둥을 찬찬히 살피니 과연 그러했다.

전부 똑같이 생긴 복도라고 생각했는데, 홈의 줄 수로 층수를 구분할 수 있었다니. 아리스텔라는 이제까지 제가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서는 어딜 가나 똑같은 풍경이라며 길을 헤맸던 것을 깨닫고 민망해졌다.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대리석으로 된 계단을 내려가면 유리처럼 투명한 성령석으로 이루어진 홀이 나온다. 홀에 들어서서 천천히 주위를 살피니 나름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지표가 있었다.

사제들이 머무는 동쪽 구역은 푸른 성령석으로, 기사들이 머무는 서쪽 구역은 하얀 성령석으로 된 기둥이 늘어서 있었다. 그렇다면 붉은 기둥이 남쪽 탑, 검은 기둥이 북쪽 탑으로 이어지는 회랑일까.

‘ 감옥은 난방이 되지 않는 것 같았는데. 로이드, 감기에는 걸리지 않았을까. ’

아리스텔라는 북쪽 탑으로 이어지는 회랑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를 도울 방안을 찾기 위해 기사단을 찾아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오늘은 과연 제대로 기사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아리스텔라는 검은 성령석 기둥을 한 번 손으로 쓰다듬고는, 히페리온을 따라 푸른 기둥이 늘어선 회랑으로 걸음을 돌렸다.

기도실은 사제들의 구역인 동쪽 건물에 자리하고 있다. 케인과 함께 올 때는 그저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갈 뿐이라 제대로 주위를 살피지 못했는데, 아무리 똑같이 생긴 복도라 하더라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빛이 들어오는 방향은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사제들의 구역은 확실히 공기가 달랐다. 청량하고 시원한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면 피부에 닿는 공기가 살짝 따끔거렸다.

‘ 신전의 온도가 살짝 낮은 것도 정신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크리스가 그랬는데. 이쪽의 공기도 일부러 바꾼 걸까. ’

공기의 흐름을 민감하게 느끼려니 솜털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눈을 뜨고 손끝으로 볼을 살살 문질렀다.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미약한 차이였으나, 공기로 현재 있는 장소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길을 잃을 일이 줄어들겠구나 싶어 아리스텔라는 안도했다.

◇ ◆ ◇ ◆ ◇

기도실에 도착한 히페리온은 한쪽으로 비켜서서 아리스텔라가 먼저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를 표하고는 작은 제단 앞의 하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을 꿇고 손을 가슴에 모으자, 어깨에 히페리온의 손이 얹어졌다.

“ 아……. ”

“ 성녀님. 눈을 감으십시오. ”

“ 네, 네.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어깨에 얹은 히페리온의 손이 따스하게 그녀의 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스킨십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리스텔라는 누군가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꺼려했다. 신전에 오기 전,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유린당한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어째서 히페리온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은 불쾌하지 않은 것일까.

‘ 어쩌면 이것도 신성력과 관계가 있는 건지도 몰라. ’

조슈아가 만져주면 편안한 느낌이 들고, 히페리온이 만져주면 정신이 번쩍 든다. 조금 긴장이 되긴 하지만 따스한 체온이 기분 좋았다. 어깨에 손을 얹은 것뿐인데, 마치 온몸을 감싸인 것만 같다.

“ 후우……. ”

신전의 차가운 공기와 히페리온의 따스한 체온. 상반되는 온도에 아리스텔라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도에 집중했다.

내일이면 황성에서 집행관이 온다. 오늘은 반드시 기사들을 설득해야 한다. 어제는 기사단을 방문했다가 봉변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었다.

‘ 아무리 음욕의 여신이라도 신이니까, 간절히 바라면 분명 기도를 들어줄 거야. ’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믿음이 있기에 그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비록 음욕의 여신 위그멘타르는 아리스텔라의 몸 안에 갇힌 상태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위그멘타르가 인간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여신을 봉인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아리스텔라는 인간임에도 이 신전 안에서 신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니 적어도 이 신전 안에서는, 그녀의 바람은 절대적인 것이리라.

아리스텔라는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그리고 행운을 바랐다. 기도한다고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일이었다. 더는 자신 때문에 상처를 입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원했다. 그리고 또한 아리스텔라 자신도 다른 이들로 인해 상처받지 않기를 원했다.

‘ 저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

히페리온이 보는 앞에서, 아리스텔라는 무사히 새벽 기도를 마쳤다. 처음 기도할 때는 기도실의 공기에 긴장했는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는데, 이번에는 떨지 않고 무사히 기도를 마쳤다.

“ 기도를 하니까 기분이 상쾌해졌어요. ”

“ 하루를 시작하는 일과니까요. ”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려면 엄청 힘들겠구나, 하고 사제들을 내심 동정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일찍 일어나 기도를 하면 이렇게 상쾌해지는데, 이불 속에서 뒹굴 거릴 게 아니라 앞으로는 일찍 일어나 기도하러 와야겠다. 아리스텔라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고는 히페리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저도 어서 신전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할게요. ”

“ 성녀님이 성녀님으로 계시는 것. 저는 그거면 충분합니다. ”

음욕의 여신이 아닌 성녀로 있어주는 것이 제일이라는, 솔직한 심정을 담아 히페리온이 답했다.

◇ ◆ ◇ ◆ ◇

히페리온은 새벽 기도를 마친 뒤에는 신관 회의를 연다고 했다. 오전 내내 회의를 하다가, 회의가 끝나면 정오 미사 준비를 해야 한다. 신전의 관리자이자 대신관인 그는 아리스텔라의 생각보다도 더 바쁜 사람이었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에게 인사하고 혼자서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전히 신전 지리는 잘 모르겠지만, 오면서 찬찬히 길을 외워둔 덕분에 자기 방으로 가는 길 정도는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에게 시중을 들 사제를 보내겠다고 말하고는 기도실을 나와 회의실로 향했다. 아리스텔라도 돌아가는 히페리온의 뒷모습을 향해 목례하고는 자신의 방이 있는 건물로 돌아왔다.

방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려 발걸음을 내딛을 즈음, 누군가 아리스텔라를 불러 세웠다.

“ 성녀님! ”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어제 찾아다녀도 내내 만나지 못했던 사람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 케인! ”

“ 성녀님, 무사하셨군요. 오래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

케인이 빠른 걸음으로 아리스텔라를 향해 다가왔다. 갑주를 벗고 검을 차지 않아도 건장한 체격의 케인은 여전히 듬직해 보였다. 하지만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던 건지, 케인의 얼굴은 조금 지쳐 보였다.

“ 케인. 내내 당신이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

“ 송구합니다. 제가 성녀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면 곤란한지라……. 죄송하지만, 안에 들어가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

“ 네? 네. 그렇게 하세요. ”

아리스텔라와 함께 계단을 올라와 방안에 들어온 케인은, 문을 닫자마자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 면목 없습니다, 성녀님. ”

“ 네? 뭐가요? ”

“ 성녀님을 기도실로 모셔다드린 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기사단에 문제가 생겨 수습할 사람이 필요한데, 로이드 기사단장이 부재중이라 제가 대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런데 설마 그 사이에 일이 생길 거라고는……. ”

“ 아……. ”

아리스텔라가 그날 기도실에서 히페리온과 기도할 무렵, 성녀가 신전에 도착한 이후로 통 모습을 볼 수 없어 화가 난 기사들 사이에서 사제들에게 단체로 맞서자며 의견이 모였고, 이자크가 케인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왔다.

성녀의 시종으로서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로이드를 부르라고 했음에도 로이드는 방에서 자느라 일어나지 않는다며, 빨리 어떻게든 해달라고 이자크가 발을 동동 구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웠다.

케인은 부재중인 로이드를 대신해 부단장으로서 그들을 말리긴 하였으나 그 사이에 성녀가 사라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리스텔라는 케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크리스에게 붙들려 감금당하고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방에서 빠져나와 도움을 요청하러 기사단을 방문했다가 로이드에게 강간당했다.

케인은 아리스텔라가 어쩌다가 사라졌는지, 그리고 사제들에게 발견된 후에 방으로 옮겨져서 제대로 회복을 하긴 했는지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기사단장인 로이드가 성녀에게 무례를 저지른 이상 같은 기사인 케인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사제들의 의견이었다. 그들의 반대로 인해 케인은 무장을 해제당하고 성녀에게 접근 금지 처분까지 받은 것이다.

케인은 시종이 바뀌어 아리스텔라의 곁을 더는 지킬 수 없다는 보고조차 하지 못한 채로 그녀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왜 저를 찾아 오셨나요? ”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것은 아쉽지만, 로이드의 일로 사제와 기사간의 분위기가 흉흉한데 케인이 아리스텔라를 찾아오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오래 굴러 사태 파악이 빠른 케인이 왜 접근금지 명령을 어기고 몰래 자신을 찾아왔는지 아리스텔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성녀님! ”

“ 네? ”

케인이 갑자기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 작품 후기 ============================

48화, 49화 2화 연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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