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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야 하는 마음
[47]
“ 아, 아아……! ”
붉게 물든 아리스텔라의 피부 위를 남자의 손이 미끄러졌다. 땀이 배어나와 반들반들해진 피부가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는 것 같았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발목을 잡고 다리를 들어올려, 제 어깨에 걸쳤다.
“ 성녀님. ”
“ 으응, 흐……. 대신관님……. ”
아리스텔라는 연인처럼 서로 사랑을 나누는 섹스를 원했고, 히페리온은 그녀의 요구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채로 몸을 겹쳤다.
“ 하으읏……! ”
“ 윽……! ”
시트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애액이 흘러나왔는데도 아리스텔라의 안쪽은 여전히 비좁았다. 히페리온은 눈을 질끈 감고 신음했다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 눈물이 가득한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보였다. 이 보랏빛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은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히페리온에게는 그녀의 물기어린 눈빛이 무척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 성녀님. 움직이겠습니다. ”
“ 아, 잠깐……! 아응! ”
민감한 아리스텔라의 몸은 쾌감을 느끼기 쉬운 만큼 그 쾌감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익숙해질 틈을 주지 않고 히페리온이 허리를 움직이는 바람에, 아리스텔라는 또 이성을 잃을까 봐 겁이 나서 히페리온의 팔을 꽉 붙들었다.
“ 아읏! 대신관님, 제발, 천천히……, 하응! ”
다리가 그의 어깨에 걸쳐진 상태라, 거의 몸이 반으로 접혀 불편한 자세였음에도 고통보다 쾌감이 컸다.
뜨겁게 조여드는 속살을 넓히며 왕복하는 굵고 단단한 성기의 감촉도, 그것이 제 안을 휘젓는 움직임도 낯설지가 않았다. 연결된 성기로부터 마치 제 몸을 하나로 꿰뚫는 것처럼 짜릿한 감각이 연속해서 올라온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팔에 손톱을 세우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아, 아아! 히페리온 대신관님, 제발……! ”
“ 성녀님……! ”
연인간의 섹스가 어떻게 다른지, 연애해본 경험이 있을 리 없는 히페리온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욕에 물든 눈빛을 하고 그를 바라보는 아리스텔라의 색스러운 표정을 보고, 가늘어서 끊어질 듯 높아지는 신음소리를 들으니 제 안의 욕망이 주체할 수 없이 커져갔다. 허릿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뜨거운 속살도, 제 팔에 따끔하게 손톱을 세우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탄력 있는 피부도, 호흡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단 숨결도, 미칠 듯이 유혹적이었다.
“ 아, 아! 거기, 너무……아아! ”
아리스텔라의 다리를 어깨에 걸친 채로 상체를 숙이자 그녀의 엉덩이가 들리면서 안쪽을 파고드는 각도가 바뀌었다. 아리스텔라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신음이 높아졌다. 분명 같은 얼굴일 텐데, 쾌감에 신음하는 아리스텔라의 얼굴을 보자 히페리온은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을, 신음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 성녀님……! ”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가 곳곳에 퍼져, 마치 두 사람의 몸이 하나로 연결된 것 같다. 처음 위그멘타르와 몸을 섞었을 때 느꼈던 강렬한 쾌감과는 다른, 뭔가가 온몸을 끌어당겼다가 탁 놓아 해방하는 느낌. 이것은 타락한 육체가 얻는 또 다른 쾌락일까. 아니면…….
“ 크읏! ”
이번에야말로 실수하지 않고 사정 직전에 밖으로 빼려던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에게 또 가로막혔다. 절정을 느낀 그녀의 속살은 미친 듯이 조여들어서, 자신에게 쾌락을 전해주는 남자의 성기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 아, 아, 아아아아……! ”
두 사람의 신음소리가 높아졌다. 히페리온은 결국 그녀의 안에서 자신을 빼내지 못하고 그대로 안에 사정해버렸다.
연인이 아닌 두 사람이 서로를 탐하는 행위는 그렇게 끝났다.
◇ ◆ ◇ ◆ ◇
성의는 성스러운 옷이기에 입고 자도 불편하지 않다고 했던가. 아리스텔라는 부드러운 옷자락에 뺨을 비비며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 공기는 싸늘했지만 이불 속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 으응……. ”
문득 따스한 것이 어깨를 감쌌다. 그것이 남자의 손임을 느낀 아리스텔라가 반짝 눈을 떴다. 눈앞에 히페리온이 있었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
“ 깨어나신 모양이군요. ”
“ 아……. 엄마야! 죄송해요! ”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서 후다닥 몸을 뒤로 뺐다.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자신의 방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왜 히페리온이 제 침대에 함께 누워 있는지를 생각하던 아리스텔라는 간밤의 일을 떠올리고는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였다.
‘ 미쳤나 봐. 어떻게 해! ’
기사단에서 젊은 기사에게 겁간당하고 나서 복도에서 웅크리고 오열하는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온 것이 히페리온이었다. 그녀를 돌보는 위치에 있는 신관으로서 아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거겠지. 형식적으로 건넨 위로의 말에 매달려버렸다.
혼자 있는 것이 무섭다고 말하자 그가 곁을 지켜주었다. 그대로 함께 잠들 줄 알았는데, 결국 또 몸이 달아 관계를 가져버렸다. 제 몸의 욕망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성녀의 위치를 이용해 대신관에게 어리광을 부린 자신이 부끄러워져 아리스텔라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 저기, 저……, 죄송해요. 제가 너무 멋대로……. ”
“ 아닙니다. 성녀님이 깨어나셨으니 저는 이제 새벽 기도를 올리러 가보겠습니다. ”
이렇게 이른 시각에? 사제들의 아침이 빠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해조차 뜨지 않았다. 침대에 함께 누워있던 히페리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아리스텔라도 함께 일어나려 했으나, 그는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살며시 밀어 다시 침대에 눕혔다.
“ 아……. ”
“ 피곤하실 테니, 성녀님께서는 더 주무시는 편이 낫습니다. ”
간밤에 분명 격렬한 정사를 나눴을 텐데도, 이상하게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기절하듯 잠든 그녀의 뒤처리를 하고 다음날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도록 히페리온이 치료해주었다는 것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그의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 그럼 푹 쉬시길. ”
어두컴컴한 방 안인데도 히페리온은 어둠이 별로 방해되지 않는다는 듯 침대에서 내려와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 저기, 대신관님! 저도……, 꺄아!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을 따라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아직 알몸 상태인 것을 깨닫고는 다급하게 이불로 몸을 감쌌다.
“ 무슨 일입니까? ”
“ 그게, 저도……. 함께 기도하러 가면 안 되나요? ”
“ 성녀님께서요? ”
신전 생활에 익숙해지겠다고 다짐하기도 했고, 히페리온이 새벽기도를 하러 가는데 자신이 침대에서 아침까지 늘어져 있는 것도 모양새가 나쁘다.
사제들이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로이드의 처우를 결정하고, 그 젊은 기사에게마저 그녀가 얕보인 것은 자신이 성녀답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로이드를 구하려면 먼저 기사를 설득하고, 다음으로 사제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해하게 만들어야 했다. 무작정 우기거나 떼를 써서는 사제들도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올리고 미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어엿한 사제로서의 모습을 보이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을까.
“ 그럼 함께 가시죠. ”
“ 그런데 저……, 옷이 없어서……. 뭘 입으면 될까요? ”
집에서 입고 온 옷은 속세의 더러움이 묻어있기에 신전에서는 입을 수 없다고 크리스가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리스텔라가 입고 있던 성의는 신성력으로 자체 정화하는 기능이 있어 별도의 세탁을 하지 않아도 오염되지 않고 늘 청정한 상태를 유지했기에, 다른 옷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어제 기사단에 제 옷을 벗어놓고 나와 버리는 바람에 입을 것이 없어졌지만.
“ 가까이 오십시오. ”
아리스텔라가 주저하다가 이불을 벗고 그에게 다가가자, 히페리온이 침대 시트를 걷어 그녀의 몸에 걸치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반짝이는 빛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더니, 보드라운 시트가 그녀의 몸에 꼭 맞는 성의로 변했다.
“ 굉장하다……. ”
생각해 보니 촉수 괴물을 물리친 것도 히페리온이었다. 대신관으로서 그의 능력은 얼마나 뛰어난 것일까.
‘ 신성력으로는 괴물을 없애는 것뿐 아니라 이런 식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도 할 수 있는 거구나. ’
아리스텔라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제 모습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평소 차림 그대로였다. 이대로라면 어디에든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나갈 수 있다.
“ 그럼 가요. ”
아리스텔라가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히페리온은 그녀의 손을 잡는 대신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간밤에는 위로가 필요해 안아 주었지만, 역시 평소에는 자신과 닿는 것이 꺼려지는가 보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틀린 짐작이었으나, 말하지 않으니 알 길이 없는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다.
‘ 괜찮아. 연인 흉내를 내는 건 침대 위에서 뿐이라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걸. ’
간밤의 히페리온은 그녀의 무리한 요구에도 불만 없이 따라주었다. 섹스할 때뿐이라고 말해놓고서 그가 평소에도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욕망에 약하고 어리석을지언정 몰염치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아리스텔라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히페리온을 따라 기도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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