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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야 하는 마음
[45]
성녀를 위해 준비된 방은 무척 넓었다. 사제는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나 히페리온은 시골 출신에 사제교육도 받지 않은 아리스텔라에게 처음부터 절제를 요구하는 생활을 강요하면 도망치려 할까봐 일부러 방을 넓고 화려하게 꾸몄다.
바닥에 깔린 카펫도 벽지도, 침대와 가구도 전부 최고급이었다. 검소한 삶을 살아온 사제들은 여자의 방을 꾸밀 줄 몰랐기에 다만 화려하기만 할뿐 다소 살풍경한 느낌은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신전의 사제들이 새로이 탄생한 성녀를 위해 이 방을 준비하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가구나 장식에 대해 모르는 아리스텔라라도 알 수 있었다.
‘ 사제들에게 성녀는 ‘ 신 ’과도 같은 존재니까……. ’
아리스텔라는 인간이었다. 신탁이 그녀를 가리키고 성령석이 그녀에게 반응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지만,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몸 안에 봉인되어 있다는 여신 위그멘타르를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이 여신의 현신이라는 자각이 없는 아리스텔라에겐 그녀를 숭배하는 사제와 성기사들이 불편할 뿐이었다. 남자가 시중을 들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에 일일이 부끄러워하며 난처해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히페리온이 아리스텔라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몸을 닦아주려 하자, 아리스텔라는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대신관님이 이런 일을 하실 것까지는……. ”
“ 그럼 다른 이에게 시중을 들게 할까요? ”
“ 아, 아니요……. ”
스스로 한다, 는 선택지는 없는 것 같다. 아리스텔라로서는 몸을 닦고 침대를 정리하는 일 정도는 스스로 하고 싶었지만, 신을 모시는 사제인 히페리온에게는 신의 시중을 드는 것이 당연한 일일 터였다.
크리스와 함께 밤 산책을 하다가 지하 계단에서 굴러 그가 다쳤을 때도, 히페리온은 그녀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에 있는 모든 사제와 성기사는 그녀를 따르는 종이었다. 그들이 여신의 현신인 성녀를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성녀는 그들에게 무슨 명령이든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 아흣……. ”
기사단 창고에서 있었던 일은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리 사이에 따뜻한 물수건이 닿은 것만으로 음부가 욱신거렸다.
히페리온은 수건에 묻어나는 정액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나 격렬한 정사를 나눈 것인지, 입구를 조금 자극한 것만으로 희고 탁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성녀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 네……? ”
“ 안에 있는 것을 빼내야 할 듯합니다. ”
다리 사이에서 욱신거리는 자극을 참느라 필사적이었던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녀가 말뜻을 이해하기 전에, 긴 손가락이 먼저 그녀의 질속으로 들어왔다.
“ 꺄악! ”
아리스텔라는 무심코 아랫배에 힘을 주며 상체를 일으켰다. 히페리온은 무심한 표정으로……, 아니.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조금 불쾌한,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그 손길은 정중하고 섬세해서, 아리스텔라는 숨을 헉헉 몰아쉬며 히페리온이 그녀의 질 속에 남아있던 이자크의 정액을 빼내는 것을 바라보았다.
‘ 아무리 성녀의 시중을 드는 게 당연하다고는 해도 이런 일까지 하는 것이 굴욕적인 걸까. 아니면 내가 저지른 일이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서 화가 난 걸까. ’
히페리온의 마음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로서는 그녀가 성녀답지 못한 음란한 짓을 했기에, 그리고 그 뒤처리를 대신관인 자신이 해야 하는 처지이기에 불쾌하게 여기는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 으응, 읏……. ”
“ 다 끝났습니다. 성녀님. 어딘가 불편하신 곳이 있으십니까? ”
안에 있던 정액을 모두 빼내고, 히페리온이 깨끗한 물수건으로 한 번 더 입구를 닦은 뒤 아리스텔라에게 물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뜨끔해서, 아리스텔라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 어, 없어요……. ”
“ 예. 그럼 취침 준비를 하겠습니다. ”
히페리온은 뒤처리를 마치고 침대 시트를 정리한 뒤, 아리스텔라의 침대 위로 올라왔다. 히페리온이 아리스텔라의 옆에 누워 그녀의 어깨를 감싸자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 저기, 대신관님? ”
“ 주무시는 동안, 함께 있어 드리겠습니다. ”
복도에서 아리스텔라를 발견하고 위로하는 히페리온에게 엉엉 울면서 매달렸다. 혼자서 잠들고 싶지 않다고, 함께 있어달라고 말한 것이 뒤늦게 생각나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붉혔다.
‘ 어린애도 아니고 대체 무슨 말을 한 거람. ’
아리스텔라는 아직 알몸이었다. 성의는 아마도 그 젊은 기사와 정사를 치렀던 기사단의 창고에 남아 있을 것이다. 혹여 그 일로 젊은 기사가 문책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털어 잊어버렸다. 지금은 그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복도에서 알몸으로 오래 돌아다닌 탓인지, 이불을 덮어도 으슬으슬 추웠다. 아리스텔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히페리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얇은 성의 너머로 느껴지는 남자의 품은 넓고 따스했다.
‘ 조슈아에게서는 약초 냄새가 났는데, 대신관님 품에서는 뭔가 좋은 향기가 나네. ’
약간 시원하면서도 부드럽게 코끝에 스며드는 그것은 이 신전의 공기와도 비슷했다. 히페리온은 젊은 나이에 아론을 제치고 이 신전의 대신관을 맡을 정도로 신성력이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아닐까.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향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무심코 옷섶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 성녀님? ”
조금 곤란해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리스텔라는 제가 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움찔 놀라 고개를 들었다.
“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
말은 거기서 끊겼다. 옆으로 누워서 아리스텔라를 내려다보던 히페리온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다급하게 고개를 든 아리스텔라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의 키 차이가 조금만 덜 났더라도 입술이 닿았을 것이다. 그대로 굳어버린 히페리온을 두고, 아리스텔라는 황급히 몸을 뒤로 빼며 히페리온에게서 등을 돌렸다.
“ 시, 실수였어요. 죄송해요……. ”
“ 성녀님. 제게 사과하실 것은 없습니다. ”
“ 아뇨. 그렇지만, 저기……. ”
그녀가 명령한다면 밤 시중을 들겠다고 히페리온은 말했다. 아리스텔라는 그런 것을 히페리온에게 명령할 생각이 없었기에 더욱 부끄러웠다. 조슈아와는 친해지기 전에 이미 몸을 섞었기에 낯부끄러운 부탁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히페리온은 아니었다.
아리스텔라에게 히페리온은 아직도 어려운 상대였고,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 아……. ”
아리스텔라의 등에 다시 부드러운 옷자락이 닿고, 따스한 팔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히페리온이 뒤에서 아리스텔라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 몸이 차갑습니다. 이대로 주무시면 감기에 걸리실 겁니다. ”
“ 앗, 으……. 그래도……! ”
왜 갑자기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 그에게 알몸을 보이고 정사 후의 뒤처리까지 시켰는데도, 가까이서 눈을 마주한 순간 마치 잘못을 들킨 것처럼 가슴이 뜨끔했다. 조슈아에게 안길 때는 마음이 편했는데, 히페리온에게 안기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 대신관님. 여, 역시 저는 그냥 혼자서 자는 게 낫겠어요. 이러다가 이상해질 것 같아요……. ”
“ 성녀님. 욕구가 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
“ ……어떻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
그 꼴을 보여 놓고 또다시 성욕을 품는다니 황당할 따름이다. 아무리 몸 안에 음욕의 여신이 잠들어 있다지만 발정기의 짐승도 아닌데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흥분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리스텔라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며 작게 숨을 들이켰다.
“ 죄송해요. 이렇게 추한 꼴만 보이고, 폐를 끼쳐서……. ”
“ 추한 것도 아니고, 폐도 아닙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안고 있던 손이 올라와 얼굴을 가린 손 위에 얹어졌다. 커다랗고 따스한 손이 제 손을 감싸주자, 아리스텔라는 두근거리면서도 조금 진정이 되는, 모순되는 기분을 느꼈다.
“ 성녀님. 혹시 어떨 때 성녀님이 정신을 잃는 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
“ ……네? ”
“ 마음속에서 욕구가 생긴다 하여 늘 정신을 잃으시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성녀님이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는 것은 어떤 한계에 다다르거나, 특수한 계기가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대미사 중에 성녀가 흥분했을 때, 그녀는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한계까지 참고 있던 아리스텔라를 방으로 옮겨, 조슈아가 해소되지 못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조슈아가 태연하게 그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으로 보아, 위그멘타르의 의식이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닌 듯했다.
똑같이 욕구가 일어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도, 성녀의 의식이 남아있을 때와 위그멘타르의 의식이 몸을 지배할 때가 다르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어떤 조건이 있지 않을까. 만약 그 조건을 알아내 사전에 차단한다면, 적어도 음욕의 여신이 이 신전 안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제가, 정신을 잃었을 때……. ”
그녀가 기억하는 ‘ 처음으로 기억이 날아간 일 ’은 크리스와 밤 산책을 하다가 지하실에서 촉수 괴물을 만나, 히페리온에게 구출되어 돌아온 밤이었다. 욕구가 이는 것을 억지로 참으려 끙끙대다가 잠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잠든 것이 아니라 정신이 날아가서 조슈아를 찾아가 그에게 안긴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크리스가 아리스텔라를 빈 방에 가두고 감금하려 했을 때였다. 크리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그녀를 끌어안고 몸을 더듬었다.
<성녀님을 원해요.>
크리스의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의 의중을 헤아리기도 전에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는 정사의 흔적을 한가득 남기고 알몸이 되어 있었다.
그 다음은 기사단을 찾아가, 계단에 앉아있던 젊은 기사를 만났다. 그는 아리스텔라의 말을 무언가 오해한 것인지, 그녀를 창고에 가두고 모욕했다. 분노와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다가 또다시 의식을 잃어버렸다.
“ 욕구를……. 억지로 참으려 하다가 한계를 넘으면, 의식을 잃는 것 같아요. ”
아리스텔라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아 표정을 보지 못하는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귀가 붉어진 것으로 그녀의 표정을 짐작했다.
“ 그리고, 앗……! ”
히페리온의 손이 그녀의 목을 더듬어 쇄골을 타고 내려와 가슴 언저리에 닿자, 아리스텔라는 몸을 움찔거리며 비틀었다.
“ 히, 히페리온 대신관님……? ”
“ 그렇다면 참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히페리온으로서는 아리스텔라가 성욕을 느끼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다. 성녀의 성욕이 강해지면, 또다시 그녀 안에 잠들어 있던 여신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첫날 위그멘타르와 관계를 가졌던 히페리온은 그날 밤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위그멘타르와의 정사는 자제력 강하고 금욕적인 그조차도 정신없이 빠져들 정도로 강한 쾌감을 주었다. 위그멘타르를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히페리온은 그녀를 경계했다. 중독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강렬한 경험을 계속한다면 그도 따라서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뒷일이 감당이 되지 않았던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를 진정시켜 그냥 끌어안고 잘 셈이었다.
“ 제가 밤 시중을 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말씀하십시오. ”
“ 앗, 그……. 저……. ”
크고 따스한 손이 제 가슴을 감싸 쥐자, 아리스텔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대신관인 히페리온에게 이런 일을 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히페리온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체온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등에 닿은 그의 남성적인 육체는 기사처럼 울끈불끈하지는 않았으나 미끈하고 탄탄했다. 아리스텔라는 아직 히페리온의 맨몸을 본 적이 없었다. 제 등에 닿는 남자의 몸이 낯설게 느껴져야 할 텐데, 이상하게 익숙했다.
“ 너, 너무 세게 하지는 마세요. 아파서……. ”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인내심이 약한 것을 한탄했다. 몸이 반응하기 시작한 이상, 또다시 욕구를 참으려 들면 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가 히페리온에게 안는 것을 허락한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째서일까. 자신은 히페리온과 관계는커녕 이렇다 할 스킨십을 한 적도 없는데. 이상할 정도로 이 체온과 손길이 익숙했다.
‘ 이유를 알고 싶어. ’
그것은 근원적인 호기심이었다. 낯선 사람이 친숙하게 느껴질 때 어디서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짚어보는 것처럼,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몸이 왜 히페리온에게 반응하는지 궁금했다.
“ 으응……. ”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고 호흡을 정돈하면서, 그 감촉과 비슷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 작품 후기 ============================
평소보다 늦었습니다. 오늘은 45화부터 47화까지 3화 연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