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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44화 (4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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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야 하는 마음

[44] 감춰야 하는 마음

“ 성녀님……. ”

대신관 히페리온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뒤돌아보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더욱 몸을 웅크렸다.

“ 성녀님. ”

히페리온이 한 번 더 아리스텔라를 부르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자세를 낮춰 무릎을 꿇자 치렁한 사제복이 스르륵 바닥에 퍼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깨에 닿으려는 남자의 손을 탁 쳐낸 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 왜……, 왜 내가 성녀인 거죠? ”

“ 성녀님. ”

“ 원해서 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

욕구가 강해졌다. 괴로워하면서 억지로 참으면 이성을 잃고 남자에게로 달려가게 되었다. 모르는 남자에게 범해지면서 쾌감을 느꼈다. 깨어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꿈속에서마저 그러했다. 여러 남자가 제 몸을 만지는데 짜릿하기만 했다.

만약 신전 안의 누군가 자신에게 관계를 요구한다면, 아니 요구하지 않아도 자신이 성욕을 느껴버린다면 상대가 누구든 다리를 벌리고 기쁘게 받아들이리라. 자신의 몸이 그렇게 변해버린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칠 것 같다. 아니, 이미 미쳐버렸는지도 모른다.

“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

“ 잘못됐어요. 잘못됐다고요! ”

아리스텔라가 빽 소리를 지르며 히페리온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 왜 위그멘타르 신전의 여자는 성녀 하나뿐인가요? 왜 남자가 옷을 입혀주지 않으면 알몸으로 다녀야 하나요? 왜 정화의 의식은 사제들이 성녀를 범하는 형태인 거죠? ”

“ 성녀님. ”

“ 성녀가 성욕을 느끼는 것이 타락의 징조라고요? 그런데 타락한 성녀를 정화하겠다고 사제와 기사들이 성녀를 범하는 것이 어디가 정화의 의식이라는 거예요? 그게 로이드가 제게 했던 일과 뭐가 다르죠? ”

화가 난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이래서는 안 된다고 외쳐도 그녀의 몸은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억지로 참으려 하면 정신이 날아가 버린다. 차라리 손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려 어딘가에 갇혀버리면 나아질까. 아리스텔라는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저는 정말로 성녀가 맞나요? ”

“ 신탁이 성녀님을 가리키고, 성령석이 성녀님께 반응했습니다. 당신은 이 신전의, 저희들의 주인입니다. ”

“ 제가 정말로 성녀라면 어째서 위그멘타르 여신님은 저를 돌봐주시지 않는 건가요? 왜, 왜 이렇게 자꾸 음란한 기분이 되는 거냐고요! ”

“ 밖은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

히페리온은 최대한 침착하게 그녀를 달래려 했지만, 아리스텔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신전의 밤은 차가웠고 아리스텔라는 알몸이었지만,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 대신관님은 내가 경멸스럽지 않아요? 성녀라는 여자가 옷을 벗고 돌아다니면서 아무 남자하고나 섹스하는데, 그런 여자를 섬기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떻게 이런 걸 자연스럽다고 할 수가 있어요? ”

분노와 슬픔으로 숨이 막혀 헐떡거리면서 울분을 토해내는 아리스텔라를 보며, 히페리온은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뱉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리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욕구를 긍정하도록 돕는 것이 그녀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일어나는 일은 히페리온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상식을 벗어난 일뿐이었고, 이제 히페리온은 더 이상 그녀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 자연스러운 성욕 ’이라고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지 않다. 하지만 성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 성녀님. 여신 위그멘타르는, 음욕의 여신입니다. ”

“ 음욕……, 이요? ”

평범한 성욕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참게 하다가 신성력이 높아져 점점 참기 어려워지면 잠자리를 함께 할 사제를 붙여주고, 그가 질리면 다른 사람으로 교대하면 되는 것이다. 처음 여신에게 홀렸을 때는 히페리온도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위그멘타르의 음욕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음욕의 여신인 그녀의 욕구는 평범한 여자의 성욕처럼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수많은 남자에게 정신없이 범해지는 것을 즐겼다. 기절할 때까지 안기고, 여러 남자가 앞뒤로 제 음부에 성기를 찔러 넣으며 희롱하기를 원했다.

여신의 현신인 역대 성녀들은 모두 알몸으로 야외에서 사제들과, 기사들과 성관계를 가졌다. 미사 중에는 그녀가 제단에 올라가 다리를 벌렸다. 성녀의 축복은 그녀의 애액을 마시는 것이었고 축복을 나누는 행위는 난교였다. 미사실에서는 성가 대신 성녀의 교성이 울려 퍼졌다.

성녀와의 불미스러운 관계를 수치로 여긴 신관들이 축소해서 기록했을 텐데도 이 정도였다. 히페리온을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여신의 욕구는 대신관이라 할지라도 인간인 히페리온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그녀에게 자신의 성욕을 긍정하게 해, 비정상적인 음욕을 정상적인 성욕의 형태로 해결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그가 신전의 사제와 성녀를 지키기 위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 음욕의 여신은 끊임없이 성적인 쾌락을 갈구합니다. 그 욕구는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인간의 욕구란 신이 가지고 있는 특성의 지극히 일부를 나누어 받은 것. 그 음욕을 관장하는 여신이 바로 당신의 몸 안에 봉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

“ 어떻게……, 어떻게 억누를 수는 없는 건가요? ”

“ ……예. ”

히페리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신이 세상에 몰고 오는 재앙은 인간의 몸에 가둠으로써 봉할 수 있었지만, 인간의 몸에 깃든 여신의 음욕은 어떤 신성마법으로도 잠재울 수 없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이제까지 신전을 지켜온 사제들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여신에게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여신의 음욕은 인간의 몸에 갇혀버린 재앙의 여신이 인간의 힘으로 퍼뜨리는 최대한의 재앙인지도 모른다.

“ ……당신도? ”

“ 예? ”

“ 저를 섬기기 위해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

몸에 일어난 변화에 혼란스러워하는 아리스텔라를 진정시켜주며, 히페리온은 그녀를 섬기기 위해 이곳에 있다고 말했다. 아리스텔라는 그것을 이제 막 성녀가 되어 혼란해하는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대신관의 배려라 여겼다. 하지만 대신관이 여신의 정체가 음욕의 여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제가 대신관님과 섹스하고 싶다고 하면요? 안아주실 거예요? ”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히페리온은 잠시 대답을 주저했다. 지금 여기서 그가 그녀의 처녀성을 빼앗았다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분노로 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에 그의 성녀는 너무도 연약했다. 로이드에게 강제로 안긴 날, 아리스텔라는 밤새 악몽을 꾸었다. 히페리온은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무력하게 기도하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히페리온은 한 번 사실을 고하지 않아 아리스텔라를 상처 입힌 적이 있다. 이번에도 진실을 감추는 것이 상처가 될까.

“ 역시, 싫죠? 성녀라고 하기에 순결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창녀처럼……, 아니, 창녀도 이렇게 홀딱 벗고 돌아다니진 않을 거예요. ”

“ 아닙니다, 성녀님. 당신에게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

“ 그럼 나랑 섹스할 거예요? ”

지금 성녀는 궁지에 몰린 상태다.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그녀를 조금이라도 덜 상처 입힐 수 있을지 히페리온은 고민했다.

“ 대답, 해주세요……. ”

우스운 일이다. 처음에는 아리스텔라의 몸을 빼앗겠다는 여신에게 신전 안에만 갇혀있으면 성녀의 의식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던 그였다. 오히려 아리스텔라가 이성과 욕구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정신붕괴를 일으키는 것보다 차라리 쾌락의 노예가 되어 욕구에만 충실해지는 것이 더 다루기는 쉬울 터인데.

“ 저는 당신의 종. 성녀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

“ ……. ”

“ 밤 시중을 명하신다면, 모시겠습니다. ”

대신관이라 한들 사제란 신을 섬기는 몸이다. 신의 의사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사제의 윤리와 신의 명령이 충돌한다면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옳았다. 사제의 윤리는 신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여 정립한 것이고, 신의 명령은 신의 말씀 그 자체이기에.

“ 다들, 다들 진짜 이상해……. 신전 문화는 이해를 못하겠어요. ”

“ 성녀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

“ 저도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데,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니……. 어떻게 그래요? ”

아리스텔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히페리온에게 기댔다. 알몸으로 오래 복도를 거닌 탓인지 그녀의 몸은 차가웠다.

“ 혼자서 자다가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히페리온 대신관님. 저와 함께 있어주시면 안 돼요? ”

“ 그리 하겠습니다, 성녀님. ”

“ 제가 또 미쳐서 당신에게 안아달라고 해도 경멸하지 마세요. ”

“ 경멸하지 않습니다. ”

히페리온의 대답에 그제야 안도한 듯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를 안아들고, 춥지 않도록 제 소매로 그녀의 몸을 덮었다. 아리스텔라는 조금 비척거리다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횃불도 난로도 없는 한밤의 복도는 몹시 싸늘했으나, 더 이상 춥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오타 지적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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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후보마다 맡고 있는 포지션이 다르기에 공략 방법도 다릅니다. 씬도 매번 다른 느낌으로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Azmodez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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