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40화 (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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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의 한걸음

[40]

꿈속에서 아리스텔라를 재판하던 사제들은 그녀의 육체가 타락했다며, 육욕에 정신을 빼앗겼다며 아리스텔라를 질책했다. 타락한 성녀를 정화해야 한다며 마구잡이로 그녀의 몸을 유린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아리스텔라가 만난 사제들은 그러지 않았다. 조슈아도 히페리온도 아리스텔라를 질책하지 않았다. 강제로 범하려 들지도 않았다. 육욕을 느끼고 당혹스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인간적인 그녀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분명 처음에 대신관 히페리온은 그녀에게 조금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아리스텔라의 성녀로서의 됨됨이를 판단하려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에 주눅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히페리온으로부터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리스텔라 자신이 보아도 성녀에는 어울리지 않는 욕망에 약한 모습을 보여도 경멸하지 않는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기묘한 거리감이 지금은 옅어진 듯했다.

“ 부디, 당신을 섬기는 이들을 버리지 마시길. ”

“ ……네……. ”

아리스텔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 ◇

히페리온과 조슈아와 함께 과거의 기록을 살피던 아리스텔라는 비슷한 기록이 여러 개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야 평생 나갈 수 없는 커다란 감옥 같은 곳에서 여러 남자들 사이에 여자를 한명 남겨놓았을 뿐이니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곳에 남아있는 기록들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차마 옆에 사람을 두고는 읽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낯 뜨거운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전대 대신관의 일기에는 아리스텔라가 꿈속에서 겪었던 ‘ 정화의 의식 ’도 기록이 되어 있었다.

정화의 의식.

그것은 음욕의 여신에 타락해버린 사제들이 그녀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변명하는 수단이었다. 사제는 정욕을 느끼지 않는 고결한 존재이니 그의 성행위는 필부의 욕구와는 다른 신성한 의식임에 틀림이 없었다. 사제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자신의 신성력으로 타락한 성녀를 정화하기 위해 미사실의 제단에 그녀를 눕히고 기절할 때까지 범했다.

“ 앗, 으……. ”

기록을 읽은 것만으로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히페리온과 조슈아가 있는 자리에서 또다시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고 혀를 깨물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 참아야, 참아야 해……. ’

아리스텔라의 몸은 점점 더 성욕을 강하게 느끼는 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녀가 성욕을 느낄 때마다 달콤한 체향이 짙어졌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히페리온에게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니,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조슈아도 아리스텔라가 흥분한 상태인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슈아의 표정은 무척 평온했다.

‘ 내 사제로서의 자제심은 조슈아 신관보다도 못한 건가. ’

히페리온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면서 성녀로부터 흘러나오는 달콤한 색향에 정신을 홀리지 않도록 속을 진정시켰다.

‘ 조슈아는 참을 수 있는 것 같고, 나는 여신 위그멘타르가 음욕의 여신인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사제들은 어떨까. ’

도서관은 개방되어 있으니, 이미 이곳에서 ‘ 정화의 의식 ’에 대한 기록을 읽은 사제나 기사가 있을 것이다. 만약 아리스텔라가 성욕이 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자의로 몸을 섞거나, 누군가와 섹스하면서 쾌감을 느꼈다고 시인한다면 정말로 ‘ 정화의 의식 ’을 행하는 자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이 세워진 이래로 아주 오랫동안 많은 사제들이 남겨온, 그들이 성녀에게 욕정하고 그녀를 범하는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남겨둔 기록. 그 수많은 기록이 전부 거짓이며, 성녀의 몸에 깃든 여신이 음욕의 신이기에 사제들이 그녀에게 홀리는 것뿐이라고 밝힌다 한들 과연 누가 믿을 것인가.

아리스텔라는 신관들의 기록에 자신이 꿈속에서 겪었던 ‘ 정화의 의식 ’과 동일한 것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심지어 성녀를 범하는 상대가 사제들이 아닌 기사들인 경우도 많았다.

“ 이 사람들이 다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죠? ”

“ 예. ”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히페리온이 대답했다.

“ 하지만 이 경우에는 신전 밖으로 말이 새어나가지 않았고, 황성에 사자를 보내 집행관을 보내올 것을 요청한 적도 없었습니다. ”

조슈아가 히페리온의 말을 듣고 덧붙여 말했다.

“ 기사들은 사제와 사이가 나쁘지만, 이번에는 로이드 경이 기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건인 만큼 기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로이드 경을 내치고 선을 긋자는 의견이 조금 더 많습니다. ”

로이드는 기사단장인데, 기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단 말인가. 아리스텔라는 걱정이 되었다.

“ 어쩌죠? 사제들이 로이드의 처형을 원하는데, 기사들까지 동조하고 있다면……. ”

“ 로이드의 처형을 결정한 것은 사제들입니다. 기사들 가운데 동조하는 이가 나온 이상 차라리 집행관을 설득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

“ 집행관을요? 황성에서 온다는? ”

“ 예. 기사단 전원이 로이드의 처형을 반대한다면 대신관님께서는 공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판결을 유보할 수 있지만, 처형 쪽에 의견이 쏠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

“ 성녀님과 제 의견이 함께 한다면 강경하게 맞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

로이드를 구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제들 사이에서 히페리온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아리스텔라는 원하지 않았다. 히페리온은 공명정대한 대신관이며, 이 신전의 관리자였다. 기사와 사제를 모두 통솔해야 하는 그가 기사의 편을 드는 것은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니다.

“ 기사와 사제의 의견 대립이 팽팽할 때, 판결을 유보할 수 있다고요……. ”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집행관을 그녀가 설득할 수 있을까. 집행관은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신전의 사제도, 성기사도 아니다. 권모술수에 능한 황성의 집행관이 과연 아리스텔라가 말하는 대로 따라 줄까.

공명정대한 사람이라면 감정에 호소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고, 제 잇속을 챙기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신전의 성녀는 모든 사제와 기사들의 위에 군림하는 대신 사유재산이 없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 또한 신전 사제들의 것이니 뇌물을 쓰는 것도 불가능했다. 만약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비겁한 방식으로 로이드를 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 집행관이 오기 전까지, 기사들을 설득해볼게요. ”

“ 하지만 성녀님. 저는 사제라 기사들이 꺼릴 것이고, 대신관님이 직접 기사를 편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모양새가 나쁩니다. ”

“ 두 분은 정보를 주시는 것만으로 좋아요. 나머지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

“ 성녀님께서요?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 케인이라면 어떨까. ’

케인과 로이드의 사이는 모르지만, 성기사단의 부단장인 케인이 아리스텔라의 편이 되어준다면 다른 기사들을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사제와 기사가 대립하게 만드는 것을 아리스텔라는 반기지 않았다. 안 그래도 폐쇄된 신전에서 평생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사이가 좋지는 못할망정 대립해서야 삶이 고단해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 사제와 기사가 대립하는 상태라면 집행관도 함부로 한쪽 편을 들어 형을 집행하지는 않을 거야. ’

로이드의 잘못을 없던 일로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처형만은 면하게 하고 싶었다.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구해주었다. 그에게 강제로 안긴 기억은 끔찍했지만, 그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로이드가 예전처럼, 정중하고 기사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신을 범하는 무서운 남자가 아니라, 그녀를 구해주었던 은빛의 기사를, ‘ 아리스텔라의 구원자 ’를 만나고 싶었다.

“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제들을 설득하는 일보다는, 의견분열을 일으키는 기사단을 하나로 모으는 쪽이 나을 테니까요. ”

그렇게 판단한 아리스텔라는 도서관을 나와 홀로 기사단으로 향했다.

◇ ◆ ◇ ◆ ◇

기사단은 소란했다.

기사단장이 성녀를 겁간한 일로 직위를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니, 기사들로서는 사기가 떨어질 만도 했다. 그를 처형해야 한다며 길길이 날뛰는 사제들에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가뜩이나 사제들과 사이가 나쁜데 괜히 공격할 빌미만 만들어줬다며 로이드를 원망하는 자들도 있었다. 로이드에 대한 혹평이 쏟아지는 것을 들으며 이자크는 얼굴을 찌푸렸다.

젊은 신입 기사 이자크는 로이드를 동경해서 성기사단에 입단했다. 출중한 검술 실력과 귀족다운 기품, 결혼해달라는 여자가 줄을 서는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평생 금욕해야 하는 성기사단에 몸을 담은 로이드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훈련병이던 이자크는 정식 기사가 되면 반드시 그의 곁에서 일하리라 의욕을 불태웠다.

로이드는 이자크에게 영웅이었고, 닮고 싶은 이상형이었다.

그런 로이드가 성녀를 범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성녀를, 제 아래에 깔아 누르고 짐승처럼 범했다고 사제들은 말했다. 케인과 함께 북쪽 구역을 수색하던 이자크는 나중에 기사들과 사제들의 말을 듣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말은 점점 과장되고 자극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이자크는 자신의 영웅이 육욕에 빠져 여자를 겁간하는 불한당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 어쩌면 이게 계획된 함정이고, 로이드 경이 녀석들의 음모에 넘어갔을 수도. ”

“ 눈이 삐었냐? 어떻게 그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

이자크의 어설픈 변호에 다른 기사들이 그를 힐난했다.

“ 진짜 그랬더라면 단장님이 억울하다고 항변이라도 했겠지. 쥐 죽은 듯이 입 다물고 끌려갔는데. ”

“ 단장 아니지, 잘렸으니까. 지금 단장은 케인 경이지. ”

또다시 로이드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이자크는 더 이상 기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기사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휴게실의 문을 열고 나온 이자크는 복도를 돌아 밖으로 나왔다. 계단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찬바람이 불어와 더운 열기를 식혀 준다.

‘ 단장님이 그럴 리가 없어. ’

하지만 로이드가 성녀를 범하는 것을 수많은 사제와 기사들이 보았는데, 그의 영웅이 사실은 색마였던 게 아니라면 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자크는 혼란스러웠다.

“ 저어……. ”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자크가 뒤를 돌아보자, 복도에서 계단으로 이어지는 기둥 뒤에서 소녀처럼 자그마한 여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성녀 아리스텔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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