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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의 한걸음
[39] 진실에의 한걸음
신전 도서관인 만큼 성서가 많지만, 일반도서의 양은 결코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수십 명의 사제와 기사가 평생 지내는 신전이니, 평생 읽을 수 있을 만큼의 서적은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초대 관리인의 의견이었다.
“ 와아……엄청 크네요. ”
“ 저도 아직 일부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아마 법률에 관련된 도서는 저쪽에 있을 겁니다. ”
두 사람은 똑같은 크기, 똑같은 두께로 만들어진 성서가 가득한 책장이 놓인 구역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 어? ”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 대신관님! ”
“ 성녀님……? ”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를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가, 그녀 뒤의 조슈아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 ……조슈아 신관까지. 도서관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
“ 로이드 경 일로, 대신관님께 선처를 구할 요량이었습니다. 설득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해서, 참고할 만한 선례가 있는지 찾아보려 도서관에 왔습니다. ”
머뭇거리는 아리스텔라 대신 조슈아가 대답하자, 히페리온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그들 쪽으로 책을 밀었다. 전대 대신관의 일기였다.
“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
“ 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요? 전에도? ”
“ 사제라 하여 타락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기사도 마찬가지지요. 더구나 외부에서 모셔온 성녀님은 사제 교육을 받지 않은 분이니, 개중에는 문란한 행동을 일삼는 분도 계셨던 모양입니다. ”
히페리온은 수도원에서 수행할 때,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여신과 사제가 성관계를 가진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사제가 색에 타락하는 일이 절대로 없으리라 생각해 그것을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신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의 몸으로 현현한 음욕의 여신 위그멘타르를 안으면서 히페리온도 현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자제력이 강한 사제일지라도, 그가 모시는 ‘ 신 ’인 위그멘타르가 명령한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신의 종으로 살기로 맹세한 순간 사제의 육체와 정신은 신에게 종속된다. 신성력이 뛰어난 사제일수록 신과 잘 감응하는 법이니, 지위가 높은 사제일수록 오히려 음욕에 물들 공산이 컸다.
비록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위그멘타르의 신전 밖으로도 소문이 새어나갔을 정도라면 신전 안에서는 분명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자가 있을 것이다.
히페리온이 과거의 기록과 신관들의 일기를 찾아 내용을 대조하며 아리스텔라의 몸 안에 있는 여신 위그멘타르의 음욕을 잠재울 방안을 마련하려던 중, 로이드가 아리스텔라를 강간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 다만, 이번처럼 성녀님이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아 기사와의 추문이 발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
“ 죄, 죄송해요……. ”
어쩐지 이번 일의 책임이 자기한테 있다는 말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 대신관님. 이번 일은 성녀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성녀님께서 신전문화에 무지하신 것과 로이드 경의 일은 무관하지요. ”
“ 알고 있습니다, 조슈아 신관. ”
로이드가 성녀를 강제로 범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여러 사제와 기사들이 목격한 사실이다. 그러니 히페리온은 대신관으로서 공정하게 보인 그대로, 있는 그대로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면 될 일이다. 하지만 히페리온은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음욕의 여신의 협박에 못 이겨 그녀를 안았다. 협박이라고는 하나 결국 유혹에 넘어간 것이었다. 사제로서 떳떳하지 못할 일을 했다는 생각에 히페리온은 내내 마음이 괴로웠다. 그렇다고 성녀에게 가서 내가 지난밤에 당신을 범했다고 고할 수도 없었다. 기억이 없는 아리스텔라에게는 당혹스러울 뿐이겠지.
이제 막 성녀가 되어 아직 신전 생활에 적응하지도, 사제들이 제 주변에 있는 것에 익숙해지지도 않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가 여사제 출신이라 할지라도 아마 그날 밤의 일을 평생 알리지 않고 침묵했을 것이다. 다만 그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다를 뿐이었다.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텔라가 상처받은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일까. 히페리온은 로이드에게 있는 그대로의 죄를 물어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사제들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히페리온은 로이드가 아리스텔라를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다. 색에도 사랑에도 무지했던 히페리온은 신전의 성기사가 성녀를 진심으로 사랑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아리스텔라의 몸 안에 있는 위그멘타르가 로이드를 유혹하였거나, 성기사치고 높은 로이드의 신성력이 여신의 음욕에 감응하여 성적 충동을 일으켰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충동이라기보다는 강제에 가까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설령 유혹이라 한들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성기사로서 지켜야 할 성녀를 범했다는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처벌을 내릴 수는 있어도 재판조차 없는 참형이 과한 처사라 여기는 것은 히페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사제들 앞에서 그날 밤 아리스텔라와 히페리온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하며 변호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과거의 비슷한 사례를 예로 들어 로이드의 행동이 전대미문의 중죄라는 것만은 면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던 중이었다.
“ 성녀님.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 네? 그……. 저기, 로이드와의 그……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뒤로 뺐다. 당혹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히페리온은 살며시 눈을 내리깔며 정중하게 말했다.
“ 로이드가 입을 다물었기에 저는 사제들의 목격담을 듣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녀님의 증언이 그들의 이야기와 다르다면 처음부터 생각을 달리해야겠지요. ”
“ 하지만 그건……. ”
로이드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 때가 오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사실 아리스텔라는 그날의 일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에게 안기던 때의 기억은 날아갔어도, 로이드에게 안기던 때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제 몸을 쓰다듬던 크고 단단한 손의 감촉도, 매끄러운 입술과 촉촉한 혀의 감촉도, 귓가에 파고드는 더운 숨이 섞인 음성과 빠른 속도로 제 안을 왕복하던 단단한 성기의 움직임까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 읏……. ”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아리스텔라는 두려움과 수치심에 부르르 떨었다. 자칫하면 또다시 그에게 안기면서 쾌감을 느끼던 감각이 되살아날 것 같아서 황급히 고개를 털었다.
이미 로이드를 만나고 감옥을 나오면서 흥분하는 바람에 조슈아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버렸다. 히페리온 앞에서까지 실수할 수는 없었다.
아리스텔라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가늘게 떠는 것을 보고, 조슈아는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 대신관. 성녀님께는 떠올리기 괴로운 기억이 아닐까요. 여성분께 그런 것을 묻는 건……. ”
“ 지금 밝힐 수 없다면 영원히 침묵하실 수밖에요. ”
이틀 뒤에는 로이드의 처형을 집행할 집행관이 온다. 그 안에 히페리온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로이드가 죽을 것이다. 로이드가 죽은 뒤에 사실은 사정이 있었다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리스텔라는 제 어깨를 감싸던 조슈아의 손을 밀어내고 똑바로 섰다.
“ 말할게요. 사실대로. ”
크리스와의 일은 아무래도 밝히기 꺼려져서,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와 있었던 일만 말하기로 했다. 히페리온이라면 분명 로이드와 아리스텔라 사이에 있었던 일만으로도 공정한 판단을 내려줄 것이다.
히페리온과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케인이 보이지 않았던 일, 케인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기사단까지 가 버렸던 일, 벌어진 문틈으로 불빛이 비치기에 안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려 들어갔더니 로이드가 있었던 일, 로이드가 그녀와 케인의 관계를 오해하고 그녀를 범했던 일까지.
“ 성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결국 사제와 기사들의 증언대로 로이드가 성녀님을 강제로 범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만. ”
“ 그, 그건, 저……. ”
그것이 강간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그녀는 아직 누군가를 이성적으로 사랑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에게 강제로 안기면서 쾌감을 느껴버렸다.
“ 어, 어쩌면 유혹……을, 했을지도 몰라요……. ”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재판하던 사제들에게 그녀 안의 음심을 고했다. 그랬더니 육체가 타락했다며 사제들이 정화의 의식을 거행했다. 어디가 정화의 의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스텔라는 그들에게 정신없이 범해지면서 쾌락에 몸부림쳤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안기는데 불쾌한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다는 것이 그녀를 비참하게 했다.
어쩌면 사실 자신은 사랑하는 남자와 몸을 섞는 것보다도, 강제로 안기면서 쾌락을 느껴버리는 타락한 여자인 것이 아닐까. 아리스텔라는 자기 자신이 무서워졌다.
“ 로이드에게 안기는 중에도 내내,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막……, 몸이 멋대로……. ”
“ 몸이 통제가 안 되는 겁니까? ”
히페리온의 질문에 아리스텔라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조금 망설이다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전 아직도 남자 분들이 어려워요. 그런데 요즘 들어 이상해졌어요. 다른 남자가 제 몸을 만지면……. ”
흥분된다. 몸이 뜨거워지면서 야릇한 기분이 든다. 조슈아와 관계할 때도 그랬다. 낯선 남자가 몸을 만져주는 것이 무섭고 수치스러운데, 그만두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녀가 느끼는 곳을 더 만져줬으면, 안쪽까지 깊이 찔러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역시 육체가 타락한 걸까. 성녀가 되기 전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제 안의 음란한 욕망에 아리스텔라는 귀까지 붉어져서 울상을 지었다.
“ 왜……. 왜 제가 이렇게 된 걸까요? 왜 이렇게 쉽게 성욕을 느끼는 거죠? ”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아리스텔라의 모습에 히페리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재앙의 여신 위그멘타르는 흔히 탐욕과 질투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가 음욕의 여신이라는 사실은 이 신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히페리온이 찾아본 기록으로는 이제까지 신전의 사제들조차 여신의 진짜 정체를 아는 자는 드물었던 듯했다. 이전 대의 사제들은 성녀가 음란해지고 자신들이 그녀에게 음욕을 품는 것을 타락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때로는 회개하고, 때로는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 성녀님. 잠시 이리로. ”
히페리온의 부름에 훌쩍임을 멈춘 아리스텔라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성녀의 손을 잡았다.
“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성녀님은 여신의 현신. 마땅히 그래야 할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뿐입니다. ”
“ 그런……, 가요? ”
“ 예. ”
평화의 신 헤시우스는 그 해에 성년이 된 처녀 가운데 가장 신성력이 높은 여인의 몸에 여신 위그멘타르를 봉인했노라고 말했다. 신성력이 높은 여인의 몸. 얼핏 들으면 여신을 가두기 위해 신성력이 높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결국 신성력이 높다는 것은 신과 잘 감응하여 몸 안에 봉인해도 저항이 적다는 뜻이다.
음욕의 여신과 감응한다는 것은, 그녀 자신이 음욕을 품기 쉬운 몸으로 변해간다는 것.
아마도 여신이 깨어났을 때의 기억이 없는 건, 그녀가 아직 자기 내면의 음란한 욕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 탓이리라.
“ 자신을 미워해서도, 혐오해서도 안 됩니다. 성녀님의 마음이, 몸이 반응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의 몸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자연스럽다 여기시길. ”
“ 대신관님……. ”
“ 그런 당신을 섬기기 위해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
히페리온이 천천히 자세를 낮춰 무릎을 꿇고, 아리스텔라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대신관이 성녀의 은총을 받는 정중하고 경건한 동작일진대,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아리스텔라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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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부터 41화까지 3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