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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텔라의 결심
[37]
감옥에서 나온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에게 로이드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의술에 해박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지식욕이 왕성한 조슈아는 서적뿐 아니라 소문을 통해 얻는 정보에도 관심이 높았다. 신전 일 이외의 바깥 사정에도 밝은 그는 사제 무리에서 겉돌면서도 내부의 사정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 사제들은 대부분 로이드 전 기사단장의 참형을 원합니다. 기사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줄 셈이지요. 애초에 신전을 지키는 결계와 골렘이 있으니 성기사는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니까요. 반대로 황성에서는 신전에 기사를 두고 싶어 합니다. ”
“ 왜요? ”
“ 한 번 배속되면 다시는 신전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후환이 두려운데 모함으로 죽이기 어렵거나, 후계자 쟁탈에서 밀려난 자식을 눈에 띄지 않게 치우는 데 제일이지요. 로이드 전 기사단장도 고위귀족 출신이지만, 작위승계와 유산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밀려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
“ 그렇다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까요? ”
“ 빠져나갈 수 없는 평생근무지임에도 지원자가 있는 것은 전쟁과는 달리 신전은 목숨을 잃을 일이 없고 근무가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죄를 지었다고 처형당한다면 자원자가 사라지겠죠. ”
그렇다면 황성에서 보내오는 집행관은 로이드의 형을 가볍게 하는 일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해도 좋은 걸까.
“ 그럼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
“ 사제들은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 있는 이상 협상이 어려울 겁니다. 제일은 대신관님을 당신 편으로 만드는 것이죠. ”
“ 대신관님을요? ”
그녀에게 예의를 지키기는 하지만, 대신관 히페리온은 어쩐지 대하기 어렵다. 거리가 느껴진다고 할까. 아리스텔라는 젊은 나이에 대신관이 된 그의 능력을 순수하게 존경했지만, 히페리온은 어쩐지 그녀를 기피하는 것 같았다.
“ 대신관님은 신전의 관리인으로서 사제와 기사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로이드 경을 변호할 수단도 근거도 없어 사제들의 의견을 묵묵히 듣고 계시지만, 성녀님께서 감형을 원한다고 말씀하신다면 태도가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
공명정대한 재판관 같은 건가. 아리스텔라는 머리가 복잡했다. 사제들의 의견에 휩쓸리지 않고 중도를 지키려는 것은 좋지만, 반대로 사제들의 의견에도 동요하지 않는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어려웠다.
‘ 대신관님에 대해 아는 게 많다면 조금이라도 설득하기 편할 텐데……. ’
아리스텔라는 대신관 히페리온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신전이나 사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대신관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표정에 다 드러나는 크리스나, 자기 원칙이 확고해서 한 번 파악해두면 응대하기 편한 조슈아와는 달랐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론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아론은 사제들의 편인 것 같았다. 로이드를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한 것도, 대신관에게 그의 처형을 강하게 권유한 것도 아론이라고 들었다.
‘ 읏……. ’
아론을 떠올리자 사제들에게 범해졌던 꿈의 기억이 되살아나 아리스텔라는 어깨를 안고 가볍게 몸을 떨었다. 모르는 남자들에게 정신없이 범해지던 ‘ 정화의 의식 ’. 어째서 마지막에, 아론이 그녀의 꿈에 나타났을까.
아리스텔라는 아론과 몸을 섞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그와 관계하는 것은 무척 아찔하고 짜릿했다. 자신 안의 음욕이 이토록 커진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꿈속에서 보았던 자신의 음란한 모습을 떨쳐버리려 고개를 털었다.
“ 성녀님, 추우시면 방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
“ 으응! ”
가늘게 몸을 떠는 그녀의 어깨를 조슈아가 감싸 안았다. 그 정도의 자극에도 아리스텔라는 신음했다. 사내에게 범해지던 꿈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또다시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 성녀님? ”
“ 조슈아……. ”
한탄스러울 만큼 욕망에 솔직한 몸이다. 아리스텔라는 아론의 얼굴을 떠올린 것을 후회했다. 아론을 떠올린 것만으로 꿈속에서 그에게 범해지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정화의 의식은 분명 로이드가 그녀를 강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는 강제적인 행위였는데, 어째서 그토록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 조슈아. 참기 힘들면,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잖아요. ”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옷소매를 살며시 붙잡았다. 지금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조슈아밖에 없다.
“ 도움을 청해도, 되나요……? ”
◇ ◆ ◇ ◆ ◇
조슈아는 아리스텔라를 욕실로 안내했다. 사제의 숙소까지는 너무 멀고, 다른 사람의 눈에 띌 위험이 있었다. 로이드가 성녀를 강간한 일로 감옥에 갇히고 처형 판결을 받았는데, 아무리 합의 하라고 한들 조슈아가 아리스텔라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들키면 상황이 좋지 않다.
조슈아가 조용히 욕실의 문을 열고 아리스텔라를 이끌자, 그녀는 순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신성한 빛으로 새하얗게 빛나는 욕실 안에는 성수가 가득한 욕조가 있었다.
“ 이곳은 어디인가요? ”
“ 의식을 치를 때 신관이 몸을 정결히 하는 대욕탕입니다. ”
“ 네? 그런 곳에 들어와도 괜찮아요?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
“ 지금은 의식을 치르는 시기가 아니니까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
온종일 몸을 정결히 하고 기도하는 것이 사제의 삶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리스텔라의 생각보다도 사제의 삶에는 확실한 규율이 잡혀 있었다.
대욕탕에의 출입은 특별한 의식이 있을 때에만 허가되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청소는 신성 마법으로 만든 요정들이 대신하고, 성수에는 자체적으로 정화의 능력이 있었으니 사람의 손으로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 그럼 지금은 이곳에 들어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당신에게 계율을 어기게 할 수는……. ”
거기까지 말하고 아리스텔라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에게 성관계를 갖자며 유혹하고 있는 것은 아리스텔라가 아닌가. 사제의 계율을 어기게 하는 장본인이 의식 시간 외에 욕실을 방문하는 것을 꼬집어봐야 우스울 뿐이다.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욕실 천장에는 신의 위엄을 나타내는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의 창문에서 빛이 들어와 욕실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어두운 방 안도 아니고 이렇게 밝은 곳에서 몸을 섞는다는 것이 민망한 듯 아리스텔라는 조슈아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 나 진짜 이상한 여자로 보이지 않을까. ’
로이드 앞에서는 그토록 당당한 태도를 보였으면서, 감옥을 나오자마자 또다시 욕망에 약한 모습을 보여 버린다. 어쩌면 자신의 곁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몸이 욕망에 반응하는 속도가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 조슈아, 저기요. 음……. 여, 역시 그만 두죠? 생각해보니까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닌……아! ”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조슈아의 손이 감쌌다. 기사의 것과는 다른 사제의 곱고 매끄러운 손이었다. 조슈아와는 벌써 두 번이나 몸을 섞은 적이 있는 아리스텔라는 그 손길과 체온이 익숙했다. 그래서 더욱 부끄러웠다.
‘ 조슈아는 나와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은 걸까. ’
아리스텔라가 성녀이기에, 여신의 현신인 성녀를 따르는 종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응하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제인 조슈아를 뜻대로 휘두르는 아리스텔라가, 그녀를 강제로 범한 로이드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 저기, 조슈아. ”
“ 왜 그러십니까? 성녀님. ”
“ 그……. 어, 억지로 할 건 없어요. 저도 제 지위를 이용해서 당신을 곤란하게 하려던 게 아니니까……. ”
조슈아가 싱긋 웃더니 아리스텔라의 성의를 벗기고,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조슈아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아리스텔라의 매끄러운 피부 위로 흘러내렸다.
“ 저는 당신의 종.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저의 의지입니다. ”
그것이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인지, 사제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그의 본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의무감만으로 아리스텔라를 안으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것만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 조슈아, 안경……. ”
아리스텔라는 살며시 손을 올려, 조슈아의 안경을 벗겨냈다. 안경을 벗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미끄러운 욕실 바닥에서 넘어지거나 하여 다치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역시 그가 자신의 몸을 보는 것은 부끄러웠다.
“ 성녀님. 욕망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
“ 하, 하지만 벌써 세 번이나 당신과 이런 짓을……. ”
“ 사제에게 욕망을 절제할 것을 강제하는 것은 사제가 욕망에 빠져 신을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여신의 현신인 당신은 다릅니다. ”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몸을 안아들고, 성수가 담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따스한 성수가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아리스텔라는 알몸이었으나 조슈아는 아직 성의를 벗지 않은 채였다.
“ 당신의 뜻이 신의 뜻. 신의 명령에 응하는 것이 사제의 역할이니까요. ”
“ 조슈아……. ”
사제가 여인을 품는 것은 계율을 어기는 것이니 죄가 된다. 그러나 사제가 신의 계시를 받고 영접하는 것은 영광된 일이다.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요구를 후자로 해석했다. 고지식하게 계율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히페리온이라면 아마도 욕망에 약한 성녀의 요구에 난감한 반응을 보였겠지만, 조슈아는 달랐다.
처음 성녀가 몸이 달아 그에게 욕구를 풀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조슈아가 주저 없이 응한 것은 그가 그녀를 ‘ 신 ’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는 여신이 아닌 여인으로 생각하여 품에 안았다. 그러나 조슈아는 아리스텔라를 여인이 아닌 여신으로 생각하여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의 차이는 바로 이곳에 있었다.
“ 여신의 은총을, 당신의 종에게. ”
조슈아가 아리스텔라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눈가와 뺨을 지나 턱 끝까지 입맞춤이 천천히 이어지고, 가늘고 긴 목을 타고 부드러운 입술이 아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