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36화 (3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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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텔라의 결심

[36]

로이드는 기사단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의 신전 감옥에 감금당한 상태였다. 기사들이 난투를 벌이거나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했을 때 격리하고 반성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감옥으로, 원래는 죄인을 가두는 용도가 아니었다고 조슈아는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감옥이라고는 해도 쇠창살이 있을 뿐 구조는 다른 방과 비슷했다. 창문이 작아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것 정도가 차이였다.

아리스텔라와 조슈아는 감옥을 지키는 골렘을 물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감금된 상대가 전 기사단장이기에, 기사들을 감시역으로 세우면 편의를 봐주거나 친분을 이용해 도주시킬수도 있다는 우려로 인한 것이었다.

“ 이쪽입니다, 성녀님. ”

무거운 문이 열리고, 아리스텔라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자도 침대도 아닌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로이드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아리스텔라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크게 떴다.

“ 성녀님……! ”

로이드는 아리스텔라가 설마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기사들의 손에 포박당하고 감옥에 들어온 후로 차차 냉정을 되찾은 로이드는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강간하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어떤 처분이 내려오든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분명 아리스텔라는 로이드를 끔찍하게 여겨, 그의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진저리칠 것이다.

그렇게 여겨 자포자기 상태였던 로이드는 아리스텔라의 얼굴을 보고 황망한 얼굴을 했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화보다 몸을 쓰기를 좋아하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로이드는 귀족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가정교사로부터 화술 교육과 레이디를 대하는 예의범절을 배웠다.

후자야 이미 그녀를 범한 일로 진작 배운 보람도 없이 날려버렸다 치더라도, 아리스텔라의 얼굴을 보니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 그……! 송구합니다. ”

어릴 적부터 배워온 것들은 전부 기억에서 사라져, 로이드는 그 한마디만을 하고 침묵했다.

자신의 행동에 변명하지 않는 것이 기사. 죄를 시인하고 마땅히 처벌을 기다리는 것이 그의 기사도.

자신이 욕보인 아리스텔라를 마주하고, 로이드는 그녀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체 어떤 말로 사죄해야 하는지 그는 몰랐다.

신분과 재능, 용모 할 것 없이 모자란 구석이 없었던 로이드는 이제까지 살면서 한 번도 여자에 궁했던 적이 없었다. 그에게 여자란 오히려 번거로운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그를 시중들던 하녀들에게 귀여움을 받았고, 자라서는 흠모의 눈길을 받았다. 가정교습을 맡던 여교수가 은근한 추파를 던지지를 않나, 사교계에 데뷔했을 때 그를 한번 본 영애가 첫눈에 반해서 결혼해주지 않으면 3층 난간에서 뛰어내리겠다며 자살 소동을 벌이지를 않나, 어려서부터 여자들에게 시달려온 로이드는 여자가 귀찮았다.

그가 성기사가 된 것도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근무환경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황궁 기사단과는 달리 교황청에서 관리하는 성기사단은 귀족의 입김이 미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우받았지만, 단순히 신분뿐만이 아니라 실력으로도 최강인 그는 자신이 받는 존경과 흠모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자만했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여자들이 매달리고, 그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대우받는 삶을 살아온 로이드는 폐쇄된 신전에서 근무하며 성녀의 곁에 머물라는 교황청의 지시를 받았을 때 다소 당황했다.

그러나 신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사제들마저 두려워하는 장소라는 것을 듣고 역시 자신이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다며 수긍했다.

기사단장인 로이드에게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대신관 히페리온이 그보다 어리다는 것이 조금 자존심 상했으나, 어차피 대신관이라 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녀의 지시를 받는 종이 아닌가.

제 주인인 성녀가 자신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성녀 아리스텔라가 귀족 영애나 왕녀처럼 고귀하고 도도한 여자였다면 로이드도 언제까지고 그녀의 곁에서 충직한 기사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로이드가 맞이한 그의 주인은 분명 그가 상상했던 대로 청초하고 아름다운 성녀였다. 문제는 그녀가 너무도 가련하고 연약해서, 그가 지켜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위에 군림하여 명령을 내려야 할 그의 여신이 그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로이드의 마음을 흔들었다.

충성심이 보호본능으로, 존경과 숭배가 연심과 애욕으로 변해버렸다.

남녀를 떠나 ‘ 신 ’으로 섬겨야 할 주인을 ‘ 여인 ’으로 인식해버렸다.

한번 바뀌어버린 인식은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녀에게 사죄하는 이 순간조차도,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여신이 아닌 여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얇은 성의가 바람에 펄럭이며 가녀린 몸의 곡선을 드러내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 로이드.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조차도 달콤했다. 로이드는 표정을 숨기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 예, 성녀님. ”

자신을 범하던 때와는 달리 과묵하고 진중한 태도의 로이드를 보고 아리스텔라는 조금 의아했다.

‘ 아니, 원래 그는 이런 사람이었어. ’

처음 그녀를 무뢰한들로부터 구해주었을 때도, 신전으로 오는 길에 야영을 하던 중 악몽에 시달리던 자신을 불렀을 때도, 로이드는 침착하고 정중했다. 누군가 아리스텔라에게 <기사>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녀는 자신이 만났던 로이드의 행적을 그대로 죽 읊어줄 정도였다.

그날 분노와 정욕에 이성을 잃어 자신을 범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기사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참지 못하고 싫다는 여자를 억지로 범했는지 힐난할까, 제대로 사과하라고 화를 낼까. 아리스텔라는 입안에서 맴도는 여러 가지 말을 속으로 삼키고 로이드를 불렀다.

“ 로이드. 그날 당신이 물었지요? 케인과 관계를 가졌냐고. ”

“ ……. ”

로이드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 미친 놈. 성녀님한테 무슨 질문을 한 거냐! ’

제가 한 소리지만 너무 치졸하고 한심스러워서 듣고 있기가 민망했다. 그것도 아리스텔라로부터는. 성녀에게 얼마나 실례되는 소리를 했단 말인가.

“ 저는……. 케인과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

욕실에서 케인과 섹스하던 때의 기억이 없는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대답했다. 크리스 때의 일을 생각해보면 목욕을 위해 함께 욕조에 들어가고 침대에서 일어나기까지 기억이 날아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는 정말로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아리스텔라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 전부 로이드의 오해였어요. 당신 방에 찾아갔던 건 오히려 사라진 케인을 찾기 위해 도움을 청하러 간 거였어요. ”

“ ……예. ”

“ 함부로 넘겨짚어서 나를, 그……. 저기, 아무튼! 로이드는 케인한테도 사과를 해야 해요. 기사인 케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오해를 했잖아요. 나는 그렇다 치고, 케인은 이 일과 정말 무관한데. ”

“ 예. 죄송……, 합니다. ”

“ 로이드. 나는 당신이 그곳에서 나와서 제대로 사과하고, 반성하면 좋겠어요. 당신은? ”

“ 예? ”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자주색 눈동자와 보라색 눈동자가 서로의 모습을 비추었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에게 끔찍한 짓을 한 로이드를 쉽게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노력하길 원했다. 아리스텔라와 케인에게 사과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길 원했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죗값을 치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죽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적시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며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 하지만 성녀님, 이미 제 처분이 정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틀 후에 사형을 집행할 집행관이 황궁으로부터 도착한다고 들었습니다. ”

감옥의 감시는 전부 골렘에게 맡겨놨다면서, 처형 집행에 관한 소식은 누가 가져다 준 건지. 아리스텔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이드는 죽고 싶은 걸까. 잘못을 저지른 과거를 인정하고 나아가기보다, 죽어서 끝내버리기를 소망하는 걸까.

그가 죽기를 원한다면 아리스텔라로서는 억지로 살릴 수 없다. 때로 남자에게 명예가 목숨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를 잃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자처하는 로이드에게 살아달라고 한다면, 그는 기사의 긍지가 손상되었다며 자존심 상해할까.

“ 하지만. ”

한참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이드는,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성녀님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에야말로 성심을 다해,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

“ ……정말인가요? ”

“ 예. ”

이름을 걸고. 명예를 걸고.

맹세에는 수단이 필요했으나 이미 기사로서의 명예를 잃은 로이드는 무언가를 걸고 맹세하는 대신 짧게 대답했다. 진심의 무게는 말의 길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 알았어요. 당신의 형을 감면한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러니까 로이드도 포기하지 마세요. ”

“ 성녀님……. ”

로이드는 위험에 처한 아리스텔라를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가 자신을 범했다고 해서, 자신을 구해준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로이드가 그녀를 구해주었듯, 이번에는 아리스텔라가 그를 구해줄 것이다.

‘ 나를 강제로 안은 책임을 묻는 건 이 사건이 해결된 이후에 하기로 하자. ’

아리스텔라는 최대한 태연해보이도록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 로이드. 그곳에서 나왔을 때 나와 케인에게 어떻게 사과할지 생각해두세요. 납득이 가는 변명이 아니면 화낼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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