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35화 (3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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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텔라의 결심

[35] 아리스텔라의 결심

악몽에 내내 신음하던 아리스텔라가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꿈속에서 받은 정화의 의식은 끔찍할 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아프고 나른하기만 했던 이제까지의 정사 후 기침과는 달리 몸이 개운했다. 기분까지 상쾌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낯선 남자들에게 기절할 때까지 범해진 꿈을 상쾌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그 쪽이 더 찜찜할 것이다.

‘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

모르는 남자들에게 정신없이 범해지는 꿈을 꾸었다. 마지막으로는 아론에게 범해졌다. 아직도 몸을 매만지던 사제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아리스텔라는 어깨를 껴안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 일어나셨습니까? 성녀님. ”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리스텔라는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 바람에 다가오려던 조슈아는 걸음을 멈추고 침대 옆의 의자에 앉은 채로 물 잔을 건넸다.

“ 드세요, 성녀님. ”

“ 조슈아……. ”

“ 땀을 많이 흘리셔서 어지러우실 겁니다. ”

땀 같은 것은 흘리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그녀의 몸은 목욕을 마치고 물기를 닦은 뒤 개운하게 잠자리에 들었을 때처럼 뽀송뽀송했다. 조슈아는 히페리온이 그녀의 몸을 정화하고 땀을 닦아냈더라도 계속해서 땀을 흘린 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울 것이라 생각하여 수분 섭취를 권한 것이지만, 아리스텔라에게는 조슈아가 마치 사내들과 격렬한 정사를 치르던 자신의 꿈을 엿보고 하는 말로 들렸다. 자신의 얼굴이 이상하게 보이면 어쩌나. 아리스텔라는 뺨을 붉히며 떨리는 손으로 물 잔을 받았다.

꼴깍.

시원한 물을 마시니 찝찝했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그제야 목이 타기 시작했다. 아리스텔라는 잔을 비우고, 한 잔을 더 받아 마셨다.

“ 몸은 괜찮으십니까? ”

“ 으응……. 네. 괜찮아요. ”

몸은 정말로 괜찮았다. 히페리온이 자신의 신성력을 아끼지 않고 퍼부어 그녀를 치료한 덕분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그것이 꿈속에서 겪은 정화의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상하네. ’

이곳은 자신의 방이다. 그런데 왜 시종인 케인이 아니라 조슈아가 곁에 있는 것일까.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려던 아리스텔라의 머릿속에 자신을 범하던 남자의 모습이 스쳐갔다.

“ 흣……! ”

그제야 전부 기억났다.

크리스가 저를 빈방에 감금하고 범했던 것. 정신을 차리고 도움을 청하러 기사단에 갔다가 또다시 로이드에게 범해진 것.

아리스텔라는 다급하게 제 모습을 확인했다. 그녀의 몸에는 깨끗한 성의가 입혀져 있었다. 분명 로이드에게 안겨 신음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지금 방으로 돌아와 성의를 입고 있다는 것은, 그 후에 발견되어 누군가 그녀의 옷을 입혀주었다는 걸까.

“ 조슈아, 저기……. ”

설마 조슈아가 자신의 옷을 입혀준 것일까. 온몸에 로이드가 남긴 정사의 흔적이 가득했을 터인데, 조슈아가 그것을 보았을까.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에게 묻고 싶었으나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정신이 돌아오니 어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케인이 위험에 처했을까봐 도움을 요청하러 기사단에 찾아갔다. 그리고 로이드와 마주쳤다. 성의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남자의 방에 찾아간 자신이 얼마나 무방비했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되짚어보니 알 수 있었다.

“ 조슈아, 저기……. 로이드, 는……. ”

자신을 강간한 남자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 불편했으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로이드의 이름을 말한 것뿐이었으나 조슈아는 그녀가 묻고 싶어 하는 바를 알아챘다. 아리스텔라가 사제들에게 발견되어 방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곧 로이드가 그녀를 범한 것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목격자는 한, 둘이 아니었다.

“ 로이드 전 기사단장의 처형이 결정되었습니다. ”

“ 네? 처형이요? ”

아리스텔라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 처, 처형이라니요. 안 돼요! ”

확실히 로이드는 그녀를 강제로 안았고, 크리스 때와는 달리 그가 자신을 범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아직도 그 상황을 떠올리면 몸이 오싹했다. 깨어났을 때 그가 곁에 있었더라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를 신전에서 내쫓으라고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형당하길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 처형하면 안 된다니, 어째서입니까? ”

“ 그, 저기, 저는……, 이, 이제 괜찮으니까, 그렇게 심한 벌은 주지 않으셔도 돼요! ”

“ 지금 ‘ 괜찮다 ’고 하셨습니까? ”

조슈아의 말에 아리스텔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 여신을 모시는 신전의 기사가 여신의 현신인 성녀님을 욕보였습니다. 그것을 괜찮다 하시다니요. ”

“ 읏, 으……하지만 먼저 로이드의 방에 들어간 건 저였고……. ”

“ 성녀님께서요? ”

조슈아의 목소리가 드물게 날카로웠다. 어쩐지 대답을 잘못한 것 같아 등골이 싸해지면서 아리스텔라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조슈아가 아리스텔라에게 가까이 다가와 자세를 낮춰 시선을 마주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연녹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와의 정사에서 쾌감을 느낀 자신을 힐난하는 사제의 눈빛이 떠올라 아리스텔라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 로이드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신전에 오는 내내 절 돌봐주기도 했고. 분명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

“ 이유라 하심은? ”

“ 신전에는 여자가 저 하나뿐인데, 기사 분들은 남자니까, 저기……. ”

욕구불만이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고 그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지만, 로이드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아리스텔라로서는 속마음을 전부 말할 수가 없었다.

“ 후우……. ”

조슈아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바르게 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자다 일어나서 헝클어진 아리스텔라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정리해 주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서 다정함을 느낀 아리스텔라는 조금 안도하며 고개를 들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 조슈아, 미안해요. 저녁 미사에 참석하겠다고 말해놓고 약속을 어겨서……. ”

“ 성녀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

“ 그렇지만 저기……, 사정이 있었어요. ”

히페리온과 함께 기도를 마치고 기도실을 나왔더니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시종인 케인이 보이지 않았다.

볼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일까 싶어 혼자 복도를 서성이며 케인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크리스에게 붙잡히고, 빈방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의식이 날아갔다.

깨어났을 때는 정사의 흔적을 가득 남긴 채 혼자 누워 있었다. 남자가 입혀주지 않으면 성의를 입을 수 없기에 알몸으로 덜덜 떨며 서쪽 구역의 기사단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로이드와 마주쳤다.

크리스와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아리스텔라는 횡설수설하며 사정을 설명했고, 어째서인지 로이드는 무척 분노하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그녀를 강제로 안았다.

‘ 조슈아에게 어디까지 털어놓아야 할까. ’

사제와 기사는 사이가 나쁘다. 어쩌면 케인을 시종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사제 무리에 조슈아도 끼어있지 않을까. 함부로 사실을 밝혔다가 조슈아가 곤란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싫었다.

사정을 밝히지 않고, 로이드의 처형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아리스텔라는 비밀을 간직해야 하는 제 처지가 답답했다.

“ 로이드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

“ 신전 감옥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정황과 증거가 명백하여 따로 재판을 열지는 않을 겁니다. ”

“ 네? 재판을 열지 않는다면……. ”

“ 사제인 저희들이 직접 피를 볼 수는 없고, 외부로 내보내 형을 집행하다간 도망칠 우려가 있어 황성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이틀 후에 집행관이 도착할 겁니다. ”

“ 이틀……! ”

이틀 후면 로이드가 죽는다.

오싹해진 아리스텔라는 무릎 위에 꼭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 방법은……감형을 시킬 방법은, 없나요? ”

“ 성녀님. ”

“ 누군가가 죽는 건 싫어요. ”

사람이 죽는 건 싫다. 그것이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알고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리스텔라는 처음부터 로이드를 무서워했지만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로이드가 자신을 강제로 범하는 건 싫고 무서웠다. 아리스텔라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괴로웠는지를 로이드가 알기를 원했다. 로이드에게 왜 자신을 범했는지 이유를 묻고, 화를 내고, 벌을 주고 싶었다. 그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그녀에게 용서를 빌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리스텔라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사제들이 모든 처우를 결정한 후였다.

‘ 강간당한 건 난데, 왜 처벌은 사제들이 내리지? ’

아리스텔라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화를 내야 할 사람도 아리스텔라고, 로이드에게 사과를 들어야 할 사람도 아리스텔라고, 그에게 벌을 줄지 용서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아리스텔라인데, 왜 엄한 사제들이 자기들끼리 상의해서 로이드를 처형한단 말인가.

“ 도와주세요, 조슈아. ”

“ 성녀님. ”

“ 저는 신전의 규율도 기사들의 규율도 몰라요. 제가 함부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간 로이드의 입장이 더 난처해질 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 연루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당신이 가르쳐주세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

필사적인 아리스텔라의 눈빛을, 조슈아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제와 기사는 서로 사이가 나쁘지만, 사실 조슈아는 크게 기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전의 관리자로서 공정해야 하기에 중립을 지키는 대신관 히페리온과는 달리, 조슈아는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다 보니 사제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입장이었다.

애당초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조슈아는 중립이라기보다는 방관자에 가까웠다. 그런 조슈아가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고 가까이 다가온 것이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을 아리스텔라는 몰랐다.

“ 성녀님은 로이드의 처벌을 원치 않으시는 건가요? ”

“ 처벌을 원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죽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

“ 그렇군요. 확실히, 성녀님을 범한 일로 참수당한다면 이곳에 있는 저도 같은 벌을 받아야 할 테니까. ”

“ 네에? ”

분명 사랑해서 몸을 섞은 관계는 아니지만, 조슈아와 로이드는 경우가 다르다.

대미사 중에 쓰러질 뻔한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찾아온 조슈아에게 관계를 요구했던 건 아리스텔라다. 정욕을 참지 못하고 그녀는 조슈아에게 매달렸다.

그날 밤 두 번째로 안겼던 일의 기억은 불확실하지만, 잠들기 전까지 내내 몸이 달아서 괴로워하다 의식을 잃었으니 아마도 자신 쪽에서 먼저 찾아가 안아달라고 요구한 거겠지.

“ 조슈아는 아니에요, 조슈아는……, 당신은 제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잖아요. 벌은 제가 받아야죠. ”

아리스텔라의 대답에 조슈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렇다면 우선 로이드 전 기사단장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겠군요. 그가 어떤 처우를 희망하는가에 따라 이쪽의 태도도 달라질 테니. ”

조슈아가 손을 내밀자, 아리스텔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 미안해요, 조슈아. 사제들은 기사와 사이가 나쁘다고 들었는데……, 로이드의 편을 들게 해서. ”

“ 저는 로이드의 편이 아닙니다. ”

조슈아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따스함에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연녹색의 눈동자는 무척 다정한 빛이었다.

“ 당신의 편이죠. ”

============================ 작품 후기 ============================

35화부터 38화까지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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