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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에서 깨어나면
[34]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방 안에 있었다. 기사단장 로이드가 성녀를 겁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뛰어왔을 때는 이미 아론이 사제와 기사들을 시켜 그를 감옥에 가둔 뒤였다. 신관은 성녀를 돌보는 것이 먼저였기에, 히페리온은 노엘에게 나중에 상황 보고를 올리라고 말하고는 아리스텔라의 상태를 보러 갔다.
로이드와 아리스텔라는 체격 차이가 너무 컸다. 제 몸집의 두 배나 되는 기사에게 기절할 때까지 안겼으니 가녀린 그녀의 몸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열이 펄펄 끓는 아리스텔라의 몸을 식히고 신성력으로 그녀의 몸을 정화했다. 그러나 열이 식고 근육통이 나아져도 아리스텔라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 아, 흐읏……. ”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히페리온은 신전의 대신관을 맡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신성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사제의 능력을 사사로이 사용할 수는 없기에 함부로 내보인 적은 없으나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어떠한 병도 치료할 수 있었고, 어떠한 상처도 낫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치유와 회복은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부분에 국한되었다.
죽어가는 사람도 회복시킬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신성력을 가진 히페리온이라도 사람의 정신이나 마음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아리스텔라가 고통스러운 듯이 신음하여 악몽을 꾸고 있는데, 히페리온에게는 그녀의 악몽을 쫓아내줄 능력이 없었다.
“ 으응, 읏……. 싫어……. ”
“ 성녀님. ”
히페리온은 그녀의 땀을 닦아주고 어지럽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정리해주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의 모습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 흐흑……. 제발……, 제발 그만해요……. ”
아리스텔라의 감은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본 것만으로 히페리온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고통스러운 듯 신음하며 울고 있는 것은 아리스텔라일진대, 어째서 자신의 가슴이 이토록 쓰라린 것일까.
“ 성녀님, 악몽에 지지 마십시오. ”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눈물을 닦아주고,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리스텔라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어떠한 악몽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히페리온은 그녀의 고통을 함께할 수조차 없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했다.
성녀를 보필하는 것이 신관의 임무일진대, 어째서 그는 성녀가 괴로워하는 이 순간에도 이토록 무력한가.
“ 싫어……! 제발, 이러지 마세요……. ”
“ 성녀님……! ”
아리스텔라는 하염없이 흐느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로이드에게 능욕 당하던 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히페리온은 걱정이 되어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비틀면서도, 히페리온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 성녀님. 괜찮습니다. 제가 곁에 있습니다. ”
“ 하으응, 하으……. ”
그녀의 입에서 뜨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피부가 다시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처음에 고통스럽게만 보였던 아리스텔라의 표정이 점점 선정적으로 변해갔다. 달콤한 숨을 흘리면서,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가 갑자기 성욕을 느낀 듯 음란하게 뒤척이는 행위에 당황했으나, 곧 상황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남자와 몸을 섞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아까처럼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상대는 로이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일까.
“ 성녀님……. ”
“ 아아, 아아아……! ”
아리스텔라의 입에서 달콤한 교성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히페리온은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로이드에게 강제로 능욕당한 일로 앓아누운 그녀에게 엄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히페리온은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숙여, 마치 기도하듯 그 손에 이마를 대었다.
“ 아아, 흐……아앙! ”
허리를 들썩이며 신음하던 아리스텔라의 입에서 높은 교성이 터져 나왔다. 절정을 느낀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뜨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허리를 흔들던 동작을 멈추었다. 고통과 쾌감에 일그러졌던 얼굴이 평온을 되찾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 조슈아……. ”
지끈.
아리스텔라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눈물을 보았을 때도 견뎌냈던 히페리온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저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히페리온은 마치 가슴에 비수가 꽂힌 것 같았다.
아리스텔라가 조슈아와 몸을 섞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사제의 계율을 어겼다며 두 사람을 나무랄 권리는 히페리온에게 없었다. 먼저 계율을 어긴 것은 히페리온이었으니 오히려 그가 그녀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를 상처 입힐 수 없었던, 상처 받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상처 입고 싶지 않았던 히페리온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숨겼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 성녀님은 나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까……. ’
몸을 섞었던 때의 기억이 없으니 그녀는 자신을 이 신전의 대신관, 자신을 맞이하고 시종을 임명하며 위험에서 한 번 구해주었을 뿐인 존재로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그 안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성녀의 방에서 나와 다른 사제에게 지시했다.
“ 조슈아 신관을 불러와라. ”
◇ ◆ ◇ ◆ ◇
“ 로이드의 기사단장 직위를 박탈하고 감금했습니다. 대신관님의 승인이 나는 대로 처형일이 정해질 겁니다. ”
“ 처형이라니……! ”
사제 노엘의 말에 케인은 난처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사태가 심각해졌다.
기사단장인 로이드가 성녀를 범했다. 그것을 사제와 다른 기사들이 보았으니 발뺌할 방도도 없었다.
기사가 여인을, 그것도 지켜야 할 성녀를 강간한 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었으나, 그렇다 해도 신전의 몇 되지 않는 성기사를, 그것도 기사단장을 재판조차 없이 곧바로 처형시키는 것은 과했다.
사실은 케인도 성녀의 목욕 시중을 들다가 돌연 태도가 달라진 그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아리스텔라를 범했다. 그저 들키지 않아 증인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자신의 죄를 고한다 한들 로이드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신전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이 나란히 처형대에 오를 뿐이다. 케인은 자신보다 한참 작은 노엘에게 허리를 굽혔다.
“ 처형만은 면하게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
“ 성녀님을 지키는 기사단장이 성녀님을 능욕했습니다. 당연한 처분입니다. ”
“ 하지만……! ”
“ 애당초 케인 부단장이 성녀님의 곁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
노엘이 목소리를 높여 그를 비난했다. 케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눈을 감았다.
성녀가 직접 내리는 명령이 아니면 듣지 않겠다며, 사제와 몸싸움을 할 기세인 기사들을 말리느라 잠시 성녀의 곁을 비웠다. 가까스로 그들이 미사실로 쳐들어가기 전에 붙잡아 회유하던 중에, 신관 아론이 나타났다.
아론은 케인이 성녀의 곁을 지키지 않고 이곳에 와 있는 이유를 물었고, 케인은 난처했으나 사실대로 고했다. 성녀를 기도실로 안내하고 밖에서 기다리다가, 기사들이 사제들에게 반기를 들려 하니 제발 말려달라는 이자크의 전갈을 받고 급히 남쪽 탑까지 뛰어왔노라고.
「 기도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녀님이 사라지셨습니다. 」
아론의 말에 케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성녀가 사라졌다니, 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이 넓은 신전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까. 혹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하여 다치지는 않았을까. 복도에 늘어선 빈 갑옷을 보고 무서워서 울고 있지는 않을까. 온갖 상상이 다 들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 성녀님을 찾아오겠습니다. 」
「 아니오, 더 이상 기사에게 성녀님의 시종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성녀님은 저희가 찾을 테니 케인 부단장은 책임을 지고 시종에서 물러나십시오. 근신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
「 하오나 성녀님이 사라지셨는데……! 」
우선은 성녀를 찾는 것이 먼저가 아닌가. 이 넓은 신전에서 사라진 사람을 찾으려면 사제들만으로는 손이 부족한 것이 당연했다.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 하더라도, 사제와 기사가 힘을 합쳐 신전 곳곳을 샅샅이 뒤져야 할 때다.
케인이 협동을 제안하려던 순간, 남쪽 탑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노엘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 큰일 났습니다! 성녀님이 사라지셨습니다! 」
아론의 침착한 말과는 대조적인, 다급함과 놀람이 섞여 있는 외침이었다. 방금 아론이 말한 사실을 재차 확인했을 뿐인데, 아론의 표정이 놀라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케인은 자신이 시종이 된 것을 사제들이 질투하여 저를 모함하려고 성녀를 숨겼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충직한 기사로 살아온 그는 자신의 기사도에 떳떳하기를 삶의 제일원칙으로 꼽았다.
임무수행에 실패한 기사가 증거를 조작하여 제 주인을 속여 성공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을 케인은 혐오했다. 케인은 임무에 실패하면 반드시 사실대로 고하고 벌을 받았다. 공적도 과실도 숨기지 않는 케인은 자신보다 과실이 많은데도 그것을 감춰서 속이는 다른 기사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자신을 포장하려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직함과 유능함을 알아보는 이들은 많았고,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황궁에까지 들어갔다. 비록 정치적인 싸움에 휘말려 신전까지 밀려나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목표 달성을 위해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니 처음 들었던 아론의 「 성녀가 사라졌다 」는 말과 그 다음 노엘이 외쳤던 「 성녀가 사라졌다 」는 말에 실린 경중이 다른 이유를 케인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 흩어져서 찾아봅시다. 성녀님을 찾아야 합니다. 」
아론의 입에서 먼저 협동을 제안하는 말이 나왔다. 케인은 이자크와 함께 북쪽 탑으로, 아론과 노엘은 각각 사제와 기사들을 반씩 이끌고 동쪽과 서쪽 구역을 찾기로 했다.
기사들의 구역인 서쪽 탑을 탐색하던 아론이 성녀의 기운을 느끼고 찾아간 곳이 로이드의 방이었으며, 그가 성녀를 범하고 있었으리라고는 케인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었다.
‘ 성녀님은 이 일을 알고 계실까. ’
케인은 성녀가 겪었을 충격과 상처가 걱정이 되면서도, 상냥하고 자애로운 성녀가 재판조차 하지 않고 로이드의 처형을 원하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케인은 이제까지 사제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 성녀를 위해서 ’라는 그들의 명분에 의문을 품은 적 또한 없었다.
그러나 로이드의 처형을 통보받은 순간, 케인의 안에 사제에 대한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조금이라도 많은 내용을 적으려고 빨리 쓰다 보니 오타가 많습니다. 지적해주시면 발견하는 대로 수정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