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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꽃을 꺾지 않는다
[29]
“ 성녀님. 설마 케인을……? ”
“ 네? ”
“ 그자를 사랑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그자와 합의 하에 몸을 섞었다고……. ”
“ 아니에요! ”
로이드의 질문에 아리스텔라는 기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침에 욕실에서 케인과 몸을 섞을 때는 여신 위그멘타르의 의식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리스텔라에게는 여신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을 때의 기억이 없었고, 몸이 아픈 것을 전날의 후유증으로 생각하고 흘려 넘긴 탓에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케인과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케인을 의지하기는 하지만, 오늘 처음 본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로이드가 묻는 질문에는 그녀가 수긍할 수 있는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 하지만 성녀님, 지금 모습은 아무리 봐도……. ”
“ 이건, 저기…….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팔을 안고 있던 손을 내려 음부를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뒤처리도 하지 못하고 도움을 청하러 뛰어오느라, 그녀의 다리 사이에는 아직 크리스의 정액이 묻어 있었다.
아리스텔라에게는 크리스와 관계한 기억도 없었으나 증거가 너무 명확했다. 케인과의 정사는 기분 탓으로 흘려 넘길 수 있었으나 이것은 그럴 수도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사랑해서 안긴 게 아니에요……. ”
“ 예? 그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가 보였던 반응을 떠올렸다. 그는 아리스텔라를 겁간한 상대가 케인이라고 오해하고, 그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며 뛰쳐나가려고 했다.
로이드에 대해 잘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그가 원래 다혈질인 성격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능욕하려던 폭력배들을 전부 죽인 것도 이 남자였다.
만약 의식을 잃은 그녀를 안았던 것이 크리스라는 것을 밝히면, 이번에는 크리스가 위험해진다.
기사인 케인과는 달리 크리스는 아직 나이 어린 수습사제였다. 크리스보다 연상인 아리스텔라조차도 로이드를 보면 무서워서 심장이 쿵쿵 뛰는데, 로이드가 분노하며 그에게 고함치면 크리스는 또 얼마나 무서워할까.
< 저는 성녀님을 원해요. >
의식을 잃었을 때의 기억이 없는 아리스텔라가 기억하는 크리스의 마지막 말이었다. 크리스가 말하는 깊은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라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그가 충동적인 행동을 한 것도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새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한 탓이 아닐까. 그렇다면 크리스는 정식 사제가 되는 길이 막힌 일로 아리스텔라에게 보복을 한 것일까.
사정을 알 수 없으니 가정은 최악의 상황으로 향했다. 크리스가 로이드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웠던 아리스텔라는 차마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 크리스라고 밝힐 수 없어 그의 이름을 생략했다.
“ 저,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그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어요. ”
이야기를 이어나가고는 있지만 아리스텔라는 침착한 상태가 아니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사의 흔적을 한가득 남기고 있었다. 자신이 의식을 잃은 사이에 크리스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는 기사단을 찾아 넓은 신전을 뛰어오면서 그녀의 불안감은 극도로 강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로이드가 화를 내며 흥분하는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아리스텔라는 그를 마주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덜덜 떨었다.
크리스의 말로 미루어보아 사제들은 케인을 성녀의 시종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것이다.
케인이 무고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아리스텔라가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가 저를 감금하고 안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는 아리스텔라 때문에 다리를 다쳤고,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분명 무척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았다. 사정도 모르는데 함부로 밝혔다가는 정말로 크리스가 다칠지도 모른다.
우선은 케인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였고, 크리스에게 자초지종을 묻는 것은 상황이 진정된 다음에 하자. 아리스텔라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우선순위를 세웠다.
“ 미, 미안해요. 그래도 저는……. 로이드, 당신이 케인을 변호해줬으면 좋겠어요. 케인은 정말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저 때문에……. ”
경황이 없어 초조한 상태의 아리스텔라는 한 사람의 이름을 배제한 채로 로이드에게 대략의 상황을 설명했다. 크리스와의 일과 케인의 이야기를 뒤섞어 말하는 데 한 사람의 이름을 빼버리니 로이드에게 들리는 이야기는 아주 묘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그 바람에 로이드의 오해는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케인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강간당한 것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격렬한 정사를 겪은 여인의 모습인데, 자신 때문에 케인이 곤란해졌다니.
“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스스로 원해서 몸을 섞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 네? ”
“ 성녀님께서 그자에게 잠자리를 요구하고, 그것을 들켰다고……. ”
내막을 모른 채 아리스텔라의 이야기만으로 상황을 추측한 로이드 또한 최악의 가정을 믿어버렸다.
“ 제기랄! ”
로이드가 욕설을 내뱉으며 바닥에 검을 내동댕이쳤다. 그 바람에 아리스텔라는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뒤는 벽이었다. 아리스텔라는 등에 벽이 닿자 헉 하고 숨을 삼키며 오들오들 떨었다.
“ 로, 로이드……? ”
로이드처럼 건장한 기사라면 옆에 다가오는 것만으로 위축된다. 그런데 그가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고 검을 내던지니 아리스텔라로서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로이드가 자신의 말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무척 화가 난 상태인 것 같았다.
“ 미, 미안해요. 로이드, 나는, 그저……. ”
그에게 도움을 청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어쩌면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에 아리스텔라가 그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로이드가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리스텔라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화가 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그가 화를 풀지 알 수가 없었다.
“ 흑, 흐윽……. ”
무섭고 당혹스러워서 눈물이 흘렀다. 아리스텔라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는 로이드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리스텔라가 무슨 생각으로 케인과 관계를 맺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몸을 섞을 바에야, 차라리 자신을 불러 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녀가 이 먼 기사단까지 몸을 떨며 도움을 요청하러 올 일도, 이렇게 울면서 괴로워할 일도 없었을 것을.
“ 성녀님. 저를 곁에 두십시오. ”
“ 네……? ”
“ 케인이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아니라, 저를, 이 로이드를 당신 곁에 두십시오. ”
로이드가 아리스텔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리스텔라는 제 등 뒤가 벽이라는 것도 잊고 뒤로 물러나려다 벽에 가로막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성녀님. ”
“ 로, 로이드……? ”
“ 제 목숨을 걸고,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곁에 두십시오. 저를……, 저를, 받아 주십시오. ”
로이드의 커다란 손이 아리스텔라의 작은 어깨를 감쌌다. 아리스텔라는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제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기자 하얗게 질려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은 채로 그의 품에 안겼다.
“ 앗, 으……, 아, 로이드……?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가 갑자기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 조금 전까지 로이드는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지금 로이드도, 크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벌을 주려는 것일까.
“ 로, 로이드……. 이거 놓아주세요……. ”
“ 놓을 수 없습니다. ”
로이드는 단호하게 말하며 아리스텔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곱고 매끄러운 그녀의 등은 남자의 단단한 손이 한번 쓸어 올린 것만으로 쭉 몸을 폈다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 흐읏, 으……. 로이드……! ”
“ 사랑합니다. ”
아리스텔라의 귀에 생소한 단어가 들렸다. 그러나 긴장과 공포로 덜덜 떨고 있던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로, 로이드……. ”
“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녀님. ”
아리스텔라의 몸을 가리듯이 남자의 두 팔이 그녀의 등과 허리에 둘러졌다. 커다란 남자의 품에 안겨본 경험이 없는 아리스텔라는 지금의 상황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서웠다. 로이드는 그녀보다 덩치도 배 이상 크고 강한 기사였다. 그가 자신의 목을 힘주어 잡는다면 그대로 목뼈가 부러져 죽을 것이다.
“ 하읏, 로이드……. 제발……. ”
“ 성녀님. 저를 받아주세요. ”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고개를 들어올렸다. 거의 고개가 꺾일 정도로 들어 올려야 겨우 시선이 마주칠 만큼 커다란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이드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애틋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리스텔라는 무서워서 그의 표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 놓, 놓아 주세요. 제발……. ”
“ 왜죠?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
“ 흐읏, 이러지 마세요……! ”
“ 케인, 그 자는 되면서 저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로이드의 팔이 아리스텔라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대로 한걸음 성큼 옮긴 것만으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 히익……! ”
등에 닿는 시트의 감촉에 놀라 몸을 일으키려던 아리스텔라는 침대 가장자리에 팔을 걸치고 제 위에 몸을 드리운 거대한 남자를 보고 움찔 놀라 입을 다물었다.
“ 저는, 당신이 성녀니까, 어차피 가까워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숨기려고 했는데……, 제가 바보였군요. ”
“ 로이드……? ”
“ 왜, 왜죠?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
잔뜩 찌푸린 얼굴로 떨리는 한숨을 뱉은 로이드가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아니, 그저 분노가 아니라 뭔가 다른……. 그래. 자신을 방에 가두었을 때 크리스가 보여주었던 눈빛과 비슷한 끈적거리는 시선이었다. 그가 욕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29화부터 31화까지 3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