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28화 (28/219)

0028 / 0219 ----------------------------------------------

기사는 꽃을 꺾지 않는다

[28]

그녀는 은색의 망토를 두르고 떨고 있었다.

성녀를 마중하러 간 로이드는 아리스텔라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녀에게 반응하는 성령석을 이용하여 그녀의 위치를 찾았다.

한밤중의 산길에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은 낡은 산장이었다. 아무렇게나 세워뒀는지 수레는 반쯤 기울어 안에 들어있던 잡동사니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리스텔라의 아버지 알베르트가 다급함에 지나치게 과장을 한 탓에 빚쟁이가 데려온 폭력배가 어느 영주님의 사병쯤 되는 줄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달려온 로이드는 성녀를 납치한 것이 어중이떠중이 무리임을 간파하고 다소 안심했다.

그러나 산장 안에서 여인의 가느다란 비명이 새어나오는 것을 듣고, 로이드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헉헉거리는 남자의 불쾌한 신음과 웃음소리. 몇 명이나 되는 무자비한 남자들의 손에 억눌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인의 새하얀 다리를 본 순간, 로이드는 아리스텔라의 허벅지 사이에 제 것을 비비며 신음하는 남자의 등에 검을 찔러 넣었다.

인신매매를 일삼는 폭력배들은 대개 뒷배가 있었다. 이들 개개인의 능력은 정규 기사들에 비할 수 없이 허접한 수준이나 여기저기에 산재해있어 뿌리를 뽑는 것이 어려웠다.

폭력배 집단을 소탕하려면 본래 주위를 에워싸 탈출구를 막아놓고 진압한 뒤에 두목을 생포해야 한다. 그래야 배후의 주모자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로이드와 함께 온 다른 성기사들은 탈출구를 봉쇄할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틈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대 성기사 중 최강이라는 칭호를 받아도 아깝지 않다는 그들의 단장 로이드는 혼자서 십 수 명의 폭력배 무리를 모두 죽여 버렸다. 생포할 틈도 없었다.

‘ 더러운 놈들. ’

로이드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저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무리를 로이드는 혐오했다. 괴롭힘을 당하는 약자가 여자나 어린아이라면 더욱 치를 떨었다. 강자의 힘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지키고, 자신보다 더 강한 사람과 맞서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제 힘으로 약자를 위협하고 괴롭히는 일을 로이드는 극렬히 혐오했다.

물빛의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새하얀 몸을 은빛 망토로 가리며 가늘게 떠는 아리스텔라는 그녀의 아버지 알베르트가 설명하던 것보다도 더 미인이었다. 연못에 핀 수련처럼 청초하고 신비로웠으며,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처럼 가녀렸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애틋한 마음이 드는 그녀를 데리고 무도한 짓을 벌인 폭력배들을 단칼에 죽여 버린 것을 로이드는 후회했다.

더욱 고통스럽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폭력배들에게 능욕당할 뻔한 경험 때문일까, 아리스텔라는 남자를 어려워했다. 특히 로이드처럼 덩치가 큰 기사가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로이드는 아리스텔라가 자신을 보며 흠칫 어깨를 떨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안고 무서워할 필요 없다며 달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 저분을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은 성녀 이외의 여자를 들일 수 없는 금녀 구역이었다. 한평생을 이 폐쇄된 신전에 갇혀 살아야 하는데, 남자를 무서워하는 그녀가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지 로이드는 걱정이 되었다.

머릿속에 성서와 계율밖에 없는 고지식한 사제들이 과연 그녀의 여린 마음을 배려해줄까.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무서워 흠칫거리는 그녀에게 성녀로서의 마음가짐이 되지 않았다며 훈계나 하려 들지 않으면 다행이다.

온종일 남자 시종의 시중을 받으며 움직여야 하는 아리스텔라가 가여웠다. 마음이 여린 그녀라면 불편한 일이 있어도 차마 사제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을 것이 빤했다.

섬세하기로 따진다면 기사들이야말로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자들이었으나 로이드는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쉬이 잊어버리는 편리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녀를 이 신전에 데리고 온 후로 로이드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대미사 중에는 성기사들이 밖에서 경비를 서니 문틈으로나마 성녀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갑자기 미사 순서가 바뀌면서, 성녀가 사제들에게 직접 축복을 나누어 주는 의식이 생략되었다. 대신관 히페리온이 성녀에게 축복을 받고, 그것을 사제들에게 대신 나누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로이드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볼 기회를 다시 한 번 놓친 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성녀가 밤 산책을 하던 중 위험에 처했노라고 그녀의 시종이 말했다. 가뜩이나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보지 못해 초조했던 로이드는 다급해졌다. 이 폐쇄된 신전의 고지식한 사제들은 연약하고 섬세한 성녀를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 성녀님께는 내가 필요해. ’

성녀의 시종이 다리를 다쳐 기사에게 시종을 맡기려 한다는 대신관 히페리온의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서 성녀를 보필하는 시종 자리를 케인에게 빼앗기자 좌절해서 속병을 앓은 로이드는 술을 퍼 마시고 내리 자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 으윽……. ”

로이드는 숙취가 심한 편이 아니었으나 정신적인 충격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용맹하고 고고한 성기사 로이드는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놀라지도 겁을 먹지도 않으니 마음에 상처를 받을 일 또한 없었다. 마음을 단련할 필요조차 없었던 용감한 기사는 처음으로 마음에 중상을 입고 앓아누웠다.

‘ 너무 오래 잤군. 일어나야 하는데……. ’

훈련을 할 기분도 아니었고 다른 기사에게 대련을 신청할 기분도 아니었다. 온종일 누워있느라 굶어서 속이 쓰렸지만 방에 있는 것은 어제 마시다 남긴 브랜디뿐이었다.

로이드는 한숨을 쉬면서 테이블의 브랜디를 집어 들어 잔에 따랐다. 딱히 술을 마시고픈 기분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음식보다는 술 쪽이 더 넘기기 편하리라.

“ 시, 실례합니다! 좀 도와주세요! ”

“ 푸웁!!! ”

갑자기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알몸의 성녀를 보고 로이드는 마시던 브랜디를 뿜었다.

후두둑. 주홍빛을 띤 투명한 액체가 테이블에 떨어졌다.

“ 서, 서, 성녀님? ”

“ 로이드, 도와주세요! 케인이……! ”

케인. 그녀의 새로운 시종.

“ 그자가 성녀님께 무슨 짓을 했습니까? ”

로이드가 고함을 치며 일어나자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다 주저앉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세워 이곳까지 뛰어왔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 놀라니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 흣, 으읏……. 로, 로이드……. ”

“ 성녀님……. ”

두려움과 놀라움, 당혹감으로 아리스텔라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자신이 고함을 치는 바람에 아리스텔라가 놀란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로이드는, 그녀의 눈물의 의미를 곡해했다.

복도를 뛰어오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상기된 얼굴에, 내내 알몸으로 다니느라 추워서 떨리는 가느다란 몸, 정사의 흔적이 남아 후들거리는 다리까지. 남자의 손으로만 입히고 벗길 수 있는 성의를 품에 안고서, 아리스텔라가 자신에게 ‘ 도와달라 ’며 뛰어 들어온 이유를 로이드는 하나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 케인, 이 극악무도한……! ”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알몸의 아리스텔라를 보고 로이드는 눈이 뒤집혔다. 분명 케인이 그녀를 범하려 한 것임에 틀림없다.

“ 지금 당장 케인을 잡아 그 무뢰한의 목을 베어버리겠습니다! ”

“ 네? 아, 아니에요! 기다려요, 로이드! ”

방구석에 놓여 있던 성검을 뽑고 뛰쳐나가려는 로이드를 막기 위해 아리스텔라는 품에 안고 있던 성의를 내던지고 로이드의 팔에 매달렸다. 그녀의 말랑한 가슴이 팔에 닿는 순간, 로이드의 몸이 움찔 굳었다.

내내 자느라 얇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을 뿐이다. 갑옷을 입고 건틀렛을 끼고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성녀의 따스하고 보드라운 살결과 달콤한 체향에 로이드는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 로이드, 제발 진정해요! 왜 이러는 거예요? ”

그를 진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녀가 아닌가. 로이드는 아리스텔라의 말을 그대로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 하지만 성녀님, 케인이……, 그 자가 성녀님께……! ”

“ 케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제발 검을 내려놓으세요! ”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외치면서,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제 팔에 눌린 뭉클한 가슴의 감촉이 더욱 생생하게 전해져, 로이드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 성녀님, 자, 잠시……. ”

로이드는 열이 오르는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며 호흡을 골랐다. 그 모습을, 케인이 그녀를 강간했다고 오해한 로이드가 기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분노하는 것으로 곡해한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팔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 로이드, 제발……! 케인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

“ 자, 잘못이 없다니요? 이, 이런 짓을 했는데 어떻게……. ”

“ 케인의 책임이 아니에요. 케인이 저 때문에 사제들에게 문책받지 않았으면 해요. 케인이 제 시종을 그만두길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로이드, 부탁이에요. 케인을 변호해주세요! ”

로이드는 혼란한 기분으로 머릿속에 흘러드는 아리스텔라의 말을 정리했다. 알몸의 성녀가 정사의 흔적을 가득 남긴 채, 홀로 자신을 찾아왔다. 응당 그녀의 곁을 지켜야 할 시종인 케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성녀는 케인의 잘못이 아니니 그가 문책당하지 않도록 변호해달라고 한다.

그렇다는 것은 곧, 케인이 그녀를 강제로 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 성녀님. 설마 케인을……? ”

“ 네? ”

“ 그자를 사랑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그자와 합의 하에 몸을 섞었다고……. ”

“ 아니에요! ”

============================ 작품 후기 ============================

낮에 온다고 해놓고 쓰고나니 낮 시간이 아니지만 아직 해가 떠 있으니까 낮인 것으로 합시다.

이 이야기는 달달한 러브스토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 알려주신 오타를 수정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