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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꽃을 꺾지 않는다
[27] 기사는 꽃을 꺾지 않는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몸의 열기가 가라앉자, 아리스텔라는 제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어두운 방안에 누워있음을 자각하고 흠칫 놀라 몸을 일으키는데, 허리부터 다리까지 아릿한 통증이 느껴져 바닥에 손을 짚고 앓는 소리를 했다.
“ 읏, 으……아파……. ”
음부가 욱신거린다. 자신이 옷을 벗은 상태라는 것을 안 아리스텔라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분명 크리스가 자신을 이곳에 가둔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의식을 빼앗기기 직전의 기억은 어지럽혀져 있었다. 기억나는 것은 자신을 끌어안는 남자의 팔과 귓가에 울리던 더운 숨소리, 그리고 성기를 통해 느껴지는 쾌감이었다.
‘ 내, 내가……, 크리스랑……? ’
크리스가 그녀의 몸을 만진 것만으로 두렵고 흥분해서 기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몸상태인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끈적하고 비릿한 액체의 존재만큼은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 어, 어떡해……. ”
아리스텔라는 울상을 지으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옷을 주워들었다. 남자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입을 수 없는 성의는 어깨에 걸쳐도 저절로 흘러내리고 허리띠를 질끈 묶어도 손을 떼기가 무섭게 후르륵 풀려버렸다.
하다못해 걸칠 수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몸을 가릴 수 있으련만. 이래서야 모포만도 못했다. 아리스텔라는 결국 성의를 둘둘 말아 품에 안고 알몸인 채로 조심스럽게 방의 문을 열었다.
저녁 미사 시간이기 때문인가,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는 다른 사제들의 명으로 자신을 빈방에 가두겠다고 했다. 시종인 케인이 있음에도 성녀가 사라졌으니 그는 책임지고 시종직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신전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 이번 일로 케인 부단장이 시종에서 물러나면, 다시 다른 사제가 성녀님의 시종을 맡게 될 겁니다. >
아리스텔라는 크리스가 한 말을 기억해냈다.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사제들과 기사들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첫날 로이드가 방을 안내해주려 했을 때도 대신관이 가로막고 직접 자신을 방까지 안내했지. 어째서 그때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 어쩌지, 어디로 가야 하지? ’
미사실로 가서 사제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히페리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그랬다간 크리스가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가 왜 자신을 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크리스는 아리스텔라의 첫 시종이었고 그녀의 부탁에 따라 신전을 안내하다가 다리를 다치고 벌을 받았다. 크리스가 또다시 벌을 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 케인을 찾아야 한다. 케인을 만나 자신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대책을 강구해보자. 아리스텔라는 결심을 다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하지만 케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
아리스텔라는 신전 지리를 몰랐다. 자신의 방도, 케인의 방도, 미사실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며 복도를 배회하던 아리스텔라는 복도 한쪽에 갑옷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동쪽 탑이 사제들의 구역, 서쪽 탑이 기사들의 구역이라고 그랬지. 저쪽으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
사제와 기사들은 사이가 나쁘다고 했다. 기사단의 숙소는 미사실에서 떨어져 있을 테니, 아마 기도실의 반대 방향으로 가면 기사단에 도착하지 않을까.
‘ 사제들은 미사실에 모여 있을 테니 기사단으로 가서 기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
사제라면 몰라도 기사라면, 그들은 같은 기사인 케인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아리스텔라는 갑옷이 늘어서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 ◇
“ 대체 로이드 단장은 무엇을 하고 있나? ”
케인은 초조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자크에게 물었다.
“ 숙취로 곤로하신 상태라 깨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잘못하다간 단장님의 주먹에 머리가 깨질 수도 있다면서……. ”
로이드는 귀족 출신으로 경우가 바른 인간이었으므로 아랫사람에게 엄격할지언정 불합리한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녀를 데려온 이후의 로이드는 확실히 조금 성격이 변한 것 같았다.
성녀가 신전에 도착한 후로, 로이드는 늘 어딘가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마음이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단장으로서 성기사들을 이끄는 일에는 나름 충실했기에 이해하려 했지만, 간밤 성녀가 다쳤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의 반응은 케인으로서도 뜻밖이었다.
대신관 히페리온이 케인을 성녀의 시종으로 삼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의 로이드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히페리온의 멱살을 쥐고 벽에 처박아버릴 듯한 살기등등한 표정. 케인은 바짝 긴장해서 히페리온을 보호하려 했으나 그는 케인의 보호를 거절하고 로이드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로이드 기사단장께는, 성기사들을 이끌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기사단에는 평민과 귀족이 섞여 있었으나 단장은 대개 귀족 출신의 기사가 맡게 되었다. 무능한 귀족이 상관이 되면 뒤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로이드는 신분과 실력 모두를 갖추고 있는 유능한 성기사였고, 케인은 무훈과 경험만으로 위로 올라온 자신보다는 흠 잡을 곳 없는 로이드가 단장을 맡는 편이 기사단의 위엄을 살리고 사제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리라 믿어 그를 단장으로 추대했다.
로이드가 어제 성녀의 시종이 될 기회를 케인에게 빼앗겨 분한 마음에 독한 술을 퍼마시고 잠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흥분해서 냉정을 잃고 실수하느니 술을 마시고 푹 잠드는 편이 약이 되리라 생각해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로이드가 자는 사이에 문제가 터졌다.
“ 기사들이 사제들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 ”
신전의 사제와 기사는 모두 성녀의 권속으로 그녀의 명령을 따르나, 실제로 사제와 기사의 위치는 동등하지 않았다.
기사의 임무는 이 신전에 있는 성녀와 사제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성녀의 권속인 기사에게는 사제를 지킬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기사들이 사제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사제들이 성녀의 대리인이기 때문이었다.
성녀의 생활은 사제들이 모두 통제한다. 성녀가 기사에게 시킬 일이 있다면, 그녀가 직접 신전의 성기사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고 사제들이 그녀의 명령을 전달했다.
말이 명령의 전달이지, 실제로는 성녀가 명령하는 일 없이 사제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사제들은 ‘ 성녀를 위해서 ’라는 이유로 기사들에게 임무를 명했다. 성녀의 대리인이 말하는 ‘ 성녀를 위한다 ’는 명분이 있는 한 기사는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20년 가까이 소속을 옮겨가며 기사단에서 복무해온 케인은 상명하복에 충실한 삶을 살았고, 그래서 사제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에 자존심을 다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젊은 기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제의 명령을 받을 이유가 없다며, 성녀가 직접 내리는 명령이 아니면 듣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나섰다. 성녀가 이 신전에 도착한 이후로 기사들에게 성녀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폐쇄된 신전에 갇혀 평생을 성녀 한 사람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데, 그 성녀를 사제들이 꽁꽁 감춰두고 자신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기사들에게 꼬박꼬박 명령을 내린다. 그 상황을 혈기 넘치는 젊은 기사들이 감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금방이라도 미사실로 쳐들어갈 기세인 기사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케인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 성녀님께 말이라도 전하고 왔어야 했는데. ’
기도실을 나온 성녀가 제가 없는 것에 당황하여 복도에서 미아가 되어 울고 있지 않을까, 케인은 걱정이 되었다. 케인에게 아리스텔라는 심약하고 겁이 많으며 몸이 불편해서 반드시 누군가가 돌봐줘야 하는 존재였다. 아무리 위급한 일이라고는 해도 순진하고 연약한 아리스텔라를 그 넓은 회랑에 홀로 두고 온 일로 케인은 양심이 켕겼다.
‘ 어서 가서 녀석들을 제압하고, 성녀님께로 돌아가야겠다. ’
케인은 이자크를 재촉하여 기사들이 모여 있는 남쪽 탑으로 뛰어갔다.
결과적으로 케인의 걱정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 ◆ ◇ ◆ ◇
“ 앗, 으……. ”
빨리 뛰고 싶은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사 후 뒤처리도 제대로 하지 않은데다 그녀는 지금 알몸이었다. 성의를 품에 안아 가슴을 가리고는 있지만, 몸을 가리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 기사단에도 분명 남자들만 있겠지. ’
알몸으로 남자 앞에 나서는 것은 부끄러웠으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케인을 찾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그리고 아론도 케인도 그녀의 알몸을 보고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색을 멀리하고 성녀를 지키기 위해 일생을 이곳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그들은, 성녀가 알몸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한들 놀랄지언정 음흉한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그녀 주위의 남자들이 너무나도 태연한 태도를 보여 온 탓에, 아리스텔라는 사제와 기사들의 자제력을 과대평가했다.
회랑을 지나 서쪽 건물에 들어와 한참을 걸었는데도 복도는 조용했다.
‘ 이곳은 기사단이 아닌가? ’
분명 서쪽은 기사들의 구역이라고 했지만, 신전이 너무 넓어서 서쪽 건물 중에서도 아주 일부만을 기사들이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넓은 신전 구석구석을 돌아야 하는 건가. 그 사이에 케인을 모함하려는 무리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데. 마음이 다급해진 아리스텔라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넣고, 필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 아, 저기다! ’
복도 모퉁이를 돌자, 중앙의 방문이 조금 열려있고 안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분명 저 안에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이제야 도움을 요청할 사람을 만나겠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에 불빛이 새어나오는 방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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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는 낮 중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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