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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과 순수
[24] 거짓말과 순수
여신 위그멘타르는 신전의 구석구석을 전부 알고 있었지만 아리스텔라는 아는 장소가 없었다.
기도실에서 남자와 관계를 가졌을 때는 두 번 다 그녀의 의식이 잠들어 있을 때였기에 그녀는 기도실의 위치조차 몰랐다. 케인은 아리스텔라를 기도실이 있는 복도로 안내한 뒤, 문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 기도실은 사제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라 기사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을 보시겠다면 혼자서 들어가셔야 합니다만……. ”
아리스텔라의 곁에 딱 붙어서 경호하는 것이 임무인 케인은 말끝을 흐렸다. 애초에 성녀의 시종을 사제에게 맡기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기사는 기도실에도 미사실에도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밖에서 지키는 것만이 가능했다.
처음부터 성기사로 입단하여 교육받아온 로이드라면 몰라도, 내내 황궁기사로 근무하다가 소속을 옮긴 케인에게는 여신의 축복을 받는 건 고사하고 성찬을 먹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케인이 시종으로 있는 이상 성녀가 미사에 참석하거나 기도하는 중에는 아리스텔라를 바로 곁에서 호위할 사람이 없었다. 물론 미사 중이나 기도 중에 위험한 일이야 없겠지만 임무수행에 있어서는 말 그대로의 의미를 따르는 데 충실하려 했던 케인은 제 처지를 깨닫고 난감해했다.
“ 혼자서 다녀올 수 있어요. 그럼 잠시 여기 계세요. ”
적어도 기도실은 늘 사제들이 사용하는 곳이니 안전할 것이다. 지하실에서처럼 괴물에게 습격 받을 일은 없으리라 생각한 아리스텔라는 저를 바라보며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케인에게 인사하고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 성녀님? ”
“ 꺄! 대신관님? ”
저녁 미사 준비를 위해 사제들이 자리를 비웠을 테니 기도실에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해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건만, 안에는 히페리온이 있었다.
무릎을 꿇고 기도 중이던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를 보고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무슨 일이신지요? ”
“ 아, 그, 저……. ”
기도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러 왔어요, 라는 태평한 소리는 기도를 방해한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다.
전날에도 히페리온은 그녀를 위해 미사 순서를 바꾸지 않았던가. 성녀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그에게 미움 받을지도 모른다. 아리스텔라는 다급하게 변명했다.
“ 저기, 대신관님. 저한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면 안 되나요? ”
“ ……기도하는 법을요? ”
여신의 현신이 무슨 일로 여신에게 기도를 한단 말인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으나 아리스텔라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 그, 저는 사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기도하는 법도 모르거든요. 그래서 방에 혼자 앉아있거나 정원을 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기도에 익숙해지면, 미사에 참여할 때도 더 오래 참을……, 아, 아니 수월할 것 같아서요. ”
횡설수설하면서도 어떻게든 성녀다운 일을 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히페리온은 그녀를 조금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재앙의 여신을 봉인하기 위한 산 제물. 그저 다음 대 성녀를 찾을 때까지 이 신전 안에만 있으면 그것으로 쓸모를 다하리라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건가.
대미사 때도 결국 미사 순서를 바꾸긴 했어도 그에게 축복을 베풀 때까지 버텼고, 오늘도 정오 미사를 참석하려 했다고 들었다.
아리스텔라가 사제 교육을 받아 성녀다운 행동을 한다면 인내심과 자제심이 강해져 몸 안의 여신을 억눌러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히페리온은 한발 물러서 자신이 기도하던 자리를 가리켰다.
“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제 앞에 서십시오.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이 지시하는 대로 그가 기도하던 위치에 가서 두 손을 모으고 섰다. 그러자 뒤에서 히페리온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 꺄아! ”
“ 허리를 구부리면 안 됩니다. 똑바로 펴세요. ”
“ 네, 네에! ”
히페리온은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을 풀어 엉덩이 바로 위에서부터 등뼈를 따라 천천히 쓸어 올리며 곧은 자세를 유지하도록 했다.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가 아닌 서서 기도하는 자세였다.
“ 읏, 아……. ”
남자가 몸을 만져주는 일에 익숙해지겠다고 다짐한 것이 방금인데, 막상 그의 손이 몸에 닿으니 어색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최대한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히페리온이 천천히 등을 쓰다듬어주자 쿵쾅쿵쾅 시끄럽게 울려대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어갔다. 여전히 가슴은 설렜지만, 흥분했을 때 느껴지는 몸의 열기와는 다른 따스한 것이 천천히 자신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 어쩐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
제 몸을 감싸는 따스한 손길이 어딘가 익숙했다. 지하실에서 그녀를 구했을 때 안아 들고 방으로 데려갔으니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아리스텔라는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자답게 커다란 손인데도, 길고 섬세한 손가락. 그 손길이 제 몸을 만지던 때의 감촉을 알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든다.
‘ 내가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
아리스텔라는 의식적으로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히페리온의 손길과 체온에서 느끼는 친숙함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아리스텔라가 가늘게 몸을 떨면서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을 느낀 히페리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성녀의 몸은 가녀리고 부드러웠으며 민감했다.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고 잘 때 불편하지 않도록 성의를 얇은 재질로 만든 것이 실수였다.
아리스텔라가 기도하는 중에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잡아주고 있는 것뿐인데, 그녀의 달콤한 체향이 코를 찌르자 히페리온은 그녀와 처음 몸을 섞었던 밤이 떠올라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 만약 또 그때처럼 몸이 달아오르면, 계속해서 남자와 육체관계를 가지게 되는 건가. ’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에게 그날 밤의 일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여 수도원에 들어온 이후로 이 신전에 대신관으로 부임해 들어올 때까지, 히페리온은 단 한 번도 계율을 어긴 적이 없었다. 여신 위그멘타르와 관계했던 그날 밤이 그의 청렴결백함에 유일한 오점이 되었다.
첫 성관계에서 강렬한 쾌감을 느끼고 그녀의 은밀한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처녀혈을 본 경험은 히페리온에게도 상당히 큰 충격이었다. 사제란 당연히 색을 멀리해야 하는 것이고, 자신은 어떠한 유혹에도 절대로 넘어가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히페리온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 성녀님은 그때의 기억이 없으니까, 내가 사실을 밝힌다면 분명 상처 입겠지. ’
이제 와서 당신의 처녀를 빼앗은 것이 나다, 라고 밝혀봐야 아리스텔라만 상처 받을 뿐이다. 여신이었을 때의 기억이 없는 아리스텔라에게는 저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히페리온이 그녀를 강간한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결국 진실을 밝히는 것은 히페리온의 욕심일 뿐 아리스텔라를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 성녀님을 위해서 침묵하자. ’
그것은 변명이었고 자기합리화였다. 히페리온은 그녀에게 진실을 밝혔다가 아리스텔라가 자신을 원망할까 두려웠다. 그 맑은 보랏빛 눈동자가 눈물을 떨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붉은 입술이 저를 원망하는 말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 하지만 그러면, 성녀님은 몸이 달아오를 때마다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겠지. ’
성녀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갖는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히페리온은 심장이 꽉 옥죄는 것을 느꼈다. 그 <다른 남자>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밝히지 않고 이대로 있으면 아리스텔라에게 자신은 언제까지고 <대신관님>일 뿐이다. 그녀는 결코 자신을 <히페리온>이라고 친근하게 불러주지 않을 것이다.
성녀와 대신관의 관계는, 딱 그 정도가 적절했다. 히페리온은 가슴에 차오르는 불안과 질투를 억누르며 그렇게 자신을 달랬다.
히페리온이 뒤에서 그녀를 안은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신전의 청정한 공기와 히페리온의 따스한 체온에 감싸여 아리스텔라는 무사히 첫 기도를 끝마쳤다.
“ 와아……. ”
기분 좋은 두근거림 속에서 가슴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전신에 퍼졌다. 기도라는 건 무척이나 지루하고 고된 것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기분 좋은 것일 줄이야.
“ 첫 기도를 끝마치셨군요. 경하드립니다. ”
“ 고마워요. 히페리온 대신관님 덕분이에요. ”
아리스텔라가 활짝 웃으며 돌아서자, 히페리온이 흠칫 놀라 한 발짝 물러났다. 표정이 조금 굳은 것을 의아하게 여긴 아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웃하자, 히페리온은 커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시선을 피하며 문밖을 가리켰다.
“ 저는 이제 저녁 미사를 준비하러 가야 합니다. 미사 중에는 기도실을 비워야 하니 성녀님도 이만 돌아가심이 좋겠군요. ”
“ 아, 네. 그렇게 할게요. ”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 ◆ ◇ ◆ ◇
“ 케인, 이제 방으로……어라? ”
복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겠다던 케인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라도 간 걸까?
안을 잠시만 둘러보고 올 셈이었는데, 히페리온을 만나는 바람에 예정에 없던 기도를 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아마 더 걸리리라 예상하고 잠시 개인적인 용무를 보러 자리를 비운 것일지도 모른다.
“ 으음……혼자서는 방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데. ”
신전은 무척 넓다. 복도는 길고 어디나 비슷하게 생겨서, 계속 다른 사람을 따라 이동하기만 했던 아리스텔라는 기도실에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커녕 여기서 자신의 방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조차 몰랐다.
‘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테니 주변을 찾아볼까? 아니면 가만히 기다리는 게 나으려나. ’
신전 구조를 모르니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다. 혹시나 엇갈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아리스텔라는 주위를 서성거리며 케인을 기다렸다.
‘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데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네. 저런 건 화가가 천장에 매달려서 그리는 거라던데, 그린 사람 엄청 힘들었겠다. ’
벽의 장식과 천장의 그림을 구경하고 있던 아리스텔라는, 누군가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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