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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성녀
[23]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신전의 청정한 기운이 감도는 정원은 아름다운 조각상도 분수도 없었으나 인위적으로 잘라내지 않아 한껏 자유롭게 뻗은 키 큰 나무들로 가득했다.
싱그러운 풀잎의 향기와 함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려 사브작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들으니 아리스텔라도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케인은 그녀를 안은 채로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 아……. ”
“ 왜 그러십니까? ”
“ 저런 곳에 꽃이 피어 있네요. ”
아리스텔라가 가리킨 것은 정원 구석에 피어있는 붉은 꽃이었다. 그리 화려한 모양은 아니지만, 녹음뿐인 정원에 홀로 핀 붉은 꽃은 그 빛깔 하나만으로도 상당히 눈에 띄었다.
케인이 그녀를 안고 정원의 구석으로 가 천천히 내려주자, 아리스텔라는 붉은 꽃이 피어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굽혀 향기를 맡았다. 신전의 꽃향기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 꽃이 향기롭네요. ”
“ 꺾어서 방에 장식해 두겠습니다. ”
“ 아, 아니에요. 이대로 두죠. ”
꽃은 꺾으면 금방 시들어버린다. 관리를 잘한다 해도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겨우 며칠뿐. 차라리 정원에 피어있도록 두면 언제든 와서 감상할 수 있다. 아리스텔라는 꽃을 꺾어 화병에 장식해두는 것보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피어있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꽃향기와 바람을 느끼며 아리스텔라는 케인과 함께 정원을 걸었다. 싱그러운 바람 덕분인가, 지쳐 있던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부상자에게 바람을 쐬게 하는 것은 그리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병실에만 틀어박혀있게 하는 것도 곤란했다. 케인은 과연 성녀를 다루는 법이 부상병을 다루는 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성녀님, 그곳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리스텔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녀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불안해하는 것을 본 케인은 왜 이러는가 싶어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갈색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안경을 낀 사제가 서 있었다. 복장을 보니 평사제는 아니고 신관인 것 같다고 케인은 생각했다. 신전 근무를 하게 되면서 대신관 히페리온을 비롯해 대부분의 신관과 사제들의 얼굴은 익혀 두었지만, 그의 얼굴은 케인에게도 낯설었다. 단체에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조슈아가 케인과 마주칠 일은 그다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신관이 부르는데 무시할 수는 없다. 케인이 가볍게 목례를 하자, 조슈아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 성녀님. 정오 미사에 불참하셔서 걱정했습니다. 몸이 안 좋으셨다고요. ”
조슈아의 말에 아리스텔라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눈빛에 슬픔이 드리워지는 것을 본 케인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조슈아의 말 어디에 슬퍼할 만한 구석이 있어 성녀가 이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네, 네에……. 참석하겠다고 말씀드려놓고 빠져서 죄송해요. ”
“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슈아의 시선을 피했다. 아프다고 말하며 미사에 빠져놓고 케인과 함께 정원에 나와서 꽃구경을 하고 있는 모습을 들키다니, 거짓말로 핑계를 댄 것 같아 가슴이 콕콕 쑤셨다.
“ 저녁 미사는 꼭 참석할게요. ”
“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주일 미사에만 참석하셔도 됩니다. 사제 교육을 받지 않으셨으니 새벽에 기상하는 것도 매번 미사 내내 서 있는 것도 힘드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
조슈아의 말에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전 생활에 익숙해지겠다고 해놓고 아무것도 지킨 것이 없다. 조슈아는 성녀를 섬기는 신관의 본분에 충실하게, 두 번이나 그녀의 요구를 따라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아리스텔라는 아직 성녀로서 이렇다 할 무언가를 해낸 것이 전혀 없었다.
‘ 여자로서도 성녀로서도 나는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조슈아가 나를 싫어하는 것도 당연해. ’
적어도 성녀로서 의무를 다하면, 떳떳하게 그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켕겼다.
사제 교육을 받지 못해 신전 생활에 어려움이 있으면 적응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할 터인데, 이곳에 오고 계속 사고만 치고 다녔다. 하다못해 얌전히 있었으면 중간을 갈 텐데 어째서인지 몸이 그녀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하루빨리 다른 사제들과 친해져서 어엿한 성녀가 되고 싶은데, 어쩐지 갈수록 목표가 요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죄송해요. 사제분들은 저를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데,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
“ 성녀님? ”
“ 죄송해요. 정말로……. ”
아리스텔라는 소맷자락을 꼭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여신 위그멘타르의 기억이 없는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음란한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이 조슈아 한사람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앞에서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연인이 아닌 남자에게 자신의 밑바닥을 보여 버린 여자는 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죄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
“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 성녀님은 노력하고 계십니다. ”
가만히 지켜보던 케인이 입을 열었다.
정오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목욕을 하던 아리스텔라를 범한 것은 케인이었다. 목욕 시중을 돕겠다며 함께 욕조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아리스텔라가 흥분해서 이성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아리스텔라가 흥분했을 때 케인이 그녀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저 봉사만 했더라면 그녀가 기절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성녀의 또 다른 인격은 순진한 평소 모습과는 달리 무척 음란하고 요염했지만, 그녀의 몸은 여전히 부서질 것처럼 연약했다. 그런 여인을 기절할 때까지 거칠게 안아버렸으니, 따지고 보면 책임은 그녀를 지키라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케인 자신에게 있었다.
“ 성녀님께서 미사에 참석하지 못하신 것은, 제가 성녀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케인이 나서서 아리스텔라를 변호하자, 아리스텔라와 조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인을 바라보았다.
“ 케인……. ”
“ ……주제넘은 말을 했습니다. ”
아리스텔라가 이름을 부르자, 그것을 사제 간의 대화에 끼어든 행동을 질책하는 것이라 여긴 케인은 한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아리스텔라는 그저 케인이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해줄 줄 몰랐기에 의아함과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부른 것인데, 그가 사과하자 아리스텔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어쩐지 케인과는 계속 대화가 엇갈리는 것 같아. 어째서일까. ’
크리스나 조슈아와의 대화는 말이 통하지 않아 겉도는 느낌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케인과 대화하면 분명 말을 하고 있는데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가 그녀의 말을 곡해해서 알아듣는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아리스텔라는 자기가 한 말의 어느 부분이 오해할만한 부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사의 긍지를 모르는 성녀와 여자의 섬세함을 모르는 기사의 대화는 갈 곳을 잃고 허공만을 빙빙 돌았다.
아리스텔라는 아무래도 저가 말을 잘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한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으나, 계속해서 대화가 겉도는 것은 분명 자신이 모르는 다른 부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전에 온 뒤로 계속해서 사고를 친 일로 의기소침해져있던 아리스텔라는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 케인. ”
“ 예, 성녀님. ”
여전히 남자는 어렵지만,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옷을 벗기고 몸을 만진다고 일일이 부끄러워해서도 흥분해서도 안 된다. 전자는 어쨌건 간에 후자는 좀 자신이 없었으나, 어제 있었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아리스텔라는 속으로 다짐을 했다.
무의미한 다짐이었지만.
“ 저, 열심히 노력해서 얼른 신전 생활에 적응하도록 할게요. 그……, 제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엄하게 꾸짖어 주세요. ”
“ 성녀님……. ”
아리스텔라는 무엇이든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말했지만, 케인은 당혹스러웠다.
‘ 저 연약한 분을 어떻게 꾸짖는단 말인가. ’
케인은 제 몸집이 크고 목청도 큰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케인이 그녀 앞에서 큰 소리를 질렀다가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릴 만큼 성녀는 심약해 보였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달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으나 정확하게 단어 그대로의 의미만을 알아들은 케인은 연약한 성녀를 다치지 않도록 꾸짖을 방도를 찾을 수 없어 난감해 했다.
케인이 난감해하는 이유를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제가 또 무슨 말을 잘못했나 싶어 주눅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제 더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 성녀님. 저는 이만 저녁 미사 준비를 하러 가봐야 합니다. ”
“ 네, 조슈아. 저녁 미사 때 뵈어요. ”
조슈아는 살며시 눈을 내리깔며 인사를 건네고는, 저녁 미사 준비를 위해 돌아갔다.
그저 참석만 하는 그녀와는 달리 일반 사제들은 준비할 것이 많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조슈아를 돕고 싶었으나 제단의 촛불을 켜는 순서도 성찬에 축복을 내리는 방법도 모르는 그녀가 돕겠다고 나섰다가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어 그러지 못했다.
‘ 조슈아는 나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다른 사람 앞에서 전혀 티를 내지 않는구나. 저런 것이 진짜 사제의 태도겠지. ’
자신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멀어지는 조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리스텔라는 적적한 마음을 달랬다.
“ 성녀님. 저녁 미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방으로 돌아가 쉬시겠습니까? ”
“ 으음……. 아뇨. 다른 곳을 조금 더 돌아보고 싶어요. ”
신전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역시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이 넓은 신전 전부를 돌아보는 것은 무리겠지만, 자주 가는 곳의 동선을 알아두면 후에 도움이 될 것이다.
“ 사제들의 기도실은 어디에 있나요? ”
============================ 작품 후기 ============================
선작과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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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에 수정할 부분이 발견되어 일단 여기서 끊습니다.
24화는 낮 쯤에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