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22화 (2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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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성녀

[22]

아리스텔라는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미사 준비를 하기 위해 케인이 목욕을 도와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왜 자신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일까.

“ 이런, 미사……, 아으윽! ”

다급하게 일어나려던 아리스텔라는 허리를 직격한 통증에 앓는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허리도 허리지만, 다리 사이가 시큰거리며 아파왔다.

“ 일어나셨습니까, 성녀님. ”

옆에서 들린 케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단정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신이 자는 동안 내내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걸까. 아리스텔라는 제가 잠들기 전에 뭘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미사에 참석하기 전 목욕을 하기 위해 케인이 자신의 옷을 벗겼다. 욕조에서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며 욕실까지 따라 들어와 함께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가 타올로 닦아주는 것이 간지러워 몸을 비척거리다가, 그의 손이 성기에 닿았을 때는 조금 느껴버렸다.

‘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되었더라? ’

상처받은 마음과 몸을 덮치는 쾌감이 그녀의 기억에 균열을 일으켰다. 도중에 여신에게 몸을 빼앗기면서 직전의 기억까지 함께 날아간 아리스텔라는 케인이 자신의 음부에 얼굴을 묻고 입으로 애무를 해주던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 설마 실수한건 아니겠지. ’

불안한 눈으로 제 시종의 눈치를 살피는 아리스텔라를 보고, 케인은 조용히 대답했다.

“ 욕실에서 성녀님이 기절하셔서, 제가 침대로 옮겼습니다. 미사에는 불참한다고 전했습니다. ”

케인은 자신을 유혹하던 것이 여신 위그멘타르 자체라는 것을 몰랐으나, 깨어있을 때의 아리스텔라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숨겨진 인격이나 착란 상태, 뭐 그런 것일 것이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병사가 있지도 않은 과거를 말하거나 헛것이 보인다며 허공에 칼을 휘두르는 것을 몇 번이고 보아왔다. 어쩌면 이곳에 오기 전 사고가 있었다거나 신전에 가족과 떨어져 혼자 갇힌 그녀의 불안감이 만들어낸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 심약한 분이니까, 외로움과 불안 때문에 이상행동을 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지. ’

케인은 자연스럽게 성녀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였으나 제가 무슨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혼자서 내린 결론에 납득하고, 적당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 신전의 성수는 오감을 예민하게 만들며 더러움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만, 간혹 체력이 약한 자는 정화 과정에서 현기증을 일으키거나 기절하는 경우가 있다 들었습니다. ”

“ 그 ,그래요……? ”

“ 예. 성녀님께서는 성수로 몸을 씻는 일이 익숙하지 않으신 듯하니, 당분간은 성수에 몸을 담그는 대신 성수를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것부터 시작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

아론과 목욕했을 때는 기절하지 않았지만, 그가 온몸을 만져대는 바람에 몸부림치느라 기절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늘은 몸이 아파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허리와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신경 쓰였지만 오늘 처음 보는 남자와 또 몸을 섞는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분명 허리와 음부가 아픈 것은 어제의 성교로 인한 후유증일 것이다. 그렇게 믿는 편이 그녀의 심신 안정을 위해 좋았다.

“ 으응. ”

케인의 앞에서 침대에 늘어져 있기 민망해서 아리스텔라가 살짝 몸을 일으키자, 케인은 그녀의 등에 쿠션을 받쳐 주었다. 폭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니 허리에 걸리던 부담도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 고맙습니다. 케인은 상냥하네요. ”

“ 과찬이십니다. ”

케인은 황궁 기사단 출신으로, 어릴 때 양성소에 들어가 내내 남자들 사이에서만 자랐기에 레이디를 대하는 법 따위는 몰랐다.

경비병이던 시절 매춘부가 유혹하는 말을 건네거나 거리 행군 때 마을 아가씨들이 꺄꺄거리는 것을 종종 보긴 했지만 그녀들과 가까워진 적은 없었다.

결국 케인은 성녀를 ‘ 여자 ’로 인식하는 대신 ‘ 환자 ’로 인식하기로 했다.

부상자는 거동이 불편하니 걸음도 느리고 앉을 때도 등받이가 필요했다. 보통 사람에 비해 체력이 부족해 먼 거리를 걸을 때는 업거나 안아서 옮겨야 하고 식사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 태도는 조심스럽게, 행동은 천천히. ’

머릿속에서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나니 대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졌다. 아리스텔라는 졸지에 부상병 취급을 받게 되었으나 케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속내를 알 방법은 없었다.

허리가 편해지고 긴장이 풀어지자 마음도 조금씩 안정되었다. 아직도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아리스텔라는 케인과 대화라도 하면 조금 친해지지 않을까 하여 적당히 그에 대해 묻기로 했다.

“ 음, 저기……. 케인은 언제부터 기사단에 있었나요? ”

아리스텔라는 남자가 시중을 든다는 것이 어색했지만 어차피 이 신전에는 자신을 제외하면 전부 남자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익숙해지려면 상대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먼저다. 케인과 친해지면 그의 시중을 받는 것이 조금은 마음 편해지지 않을까.

“ 12세에 양성소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16세에 수도 치안부대의 경비병으로 근무했습니다. 타국과의 전쟁 때 공을 세워 황궁 기사단에 들어간 후에는 계속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이번에 신전 기사단 소속이 되었습니다. ”

그렇다는 건 케인은 원래는 성기사가 아니라는 말이구나. 확실히 똑같이 덩치가 좋아도 로이드는 희고 말쑥한 외모에 어딘가 귀족다운 기품이 있었는데, 케인은 피부도 그을리고 단단해 보이는 인상에 손도 거칠었다.

“ 그럼 신전 생활은 거의 해보신 적이 없겠네요. 지내기는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

자신과 케인의 공통점을 찾은 아리스텔라는 겨우 그럴듯한 화제를 찾았다 싶어 질문을 건넸지만, 질문을 받은 케인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 전장에서 군량도 없이 들짐승을 잡아가며 한 달 넘게 전투를 계속한 일도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일주일 내내 한숨도 자지 않고 성녀님을 보필해 보이겠습니다. ”

“ 네? 아니, 저기……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

“ 신전 근무 경험이 없다한들 기사단에서 20년 가까이 구른 몸입니다. 다른 성기사들 보다 제 실력이 뒤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아리스텔라는 그저 공감대를 찾고 싶어 건넨 말이었으나, 케인은 그녀가 자신을 성기사 출신이 아니라서 신전 근무를 힘들어하는 나약한 기사로 보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여성과의 대화에는 공감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케인은 아리스텔라가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것을 ‘ 대화의 시도 ’가 아닌 자신에 대한 ‘ 평가 ’로 판단했다.

아리스텔라는 신전 생활의 어려움과 문화 차이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이해받고 싶었으나 케인은 아리스텔라가 의도하는 바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불편, 어려움. 이런 것은 단체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리바리한 신입 병사에게나 묻는 것이다. 아무리 신전 근무가 처음이라고 하나 20년 가까이 기사로 살아온 케인이 상전에게 들을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물론 사제에 대해서도 기사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케인이 왜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제가 뭘 잘못했나 싶어 위축되었다.

“ 저기, 케인?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요. 그저 당신도 저랑 마찬가지로 이곳이 처음이니까……. ”

“ 성녀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다른 성기사들과 대련을 하겠습니다. 아니면 신전을 지키는 골렘과 싸우겠습니다. 반드시 이겨 보이겠습니다. ”

“ 아뇨, 안 하셔도 돼요! ”

말단 기사로 시작해 무훈을 인정받아 황궁 기사단에 들어가기까지, 밑바닥에서부터 자력으로 올라간 케인의 지지기반은 미약했다.

신분도 재산도 없었고, 딸을 주겠다는 권력자의 제안을 거절하자 귀족들의 눈밖에 나버렸다. 케인은 이리저리 밀리는 대로 내쳐지다가 결국 평생 신전에서 나갈 수 없는 이곳까지 밀려났다.

정치 감각도 없고 신분상승의 욕구도 없는 케인은 귀족이나 다른 황궁기사들이 출신이 천해서 사람 대하는 법을 모른다며 무시하고 깔보는 일은 개의치 않았지만, 자신의 무훈을 우연이나 요령으로 치부하거나 기사답지 못하다며 폄하하는 것만은 참지 못했다.

어떤 명령이든 겸허히 받아들이고, 어떤 위기에서도 반드시 승리하고 생환하여 주군에게 영광을 안겨주는 것이 기사로 살아가는 그의 긍지였다.

“ 어떤 명령이든 수행하겠습니다. 신전 출신이 아니라 하여 못미더워하지 마시고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

“ 모, 못 믿는 게 아닌데……. ”

아무래도 뭔가 실수한 것 같다. 신전 문화도 어렵지만, 역시 기사는 더욱 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아리스텔라는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 ◇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케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살며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온 신경이 아리스텔라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분명 가만히 있는데도 마치 맹수 앞의 먹잇감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아리스텔라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 으으, 답답해……. ’

아리스텔라가 자세를 바꾸기 위해 살짝 몸을 일으키자, 케인이 덥석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 히익? ”

“ 어디를 가시렵니까?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 아니, 저기, 그게……. ”

계속 한 자세로 앉아있기 불편해서 몸을 움직인 것뿐인데, 케인은 아리스텔라가 어딘가 나가려고 한다고 오해한 것 같다.

질문은 정중했으나 우악스러운 거친 손이 제 어깨를 감싸고 찌를 듯이 강렬한 시선이 제게 향하자 무서워서 숨이 멎을 것 같았던 아리스텔라는 달달 떨면서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 저, 저, 저……. 외, 외출을……, 해도 될까요……? ”

“ 가고 싶으신 곳을 말씀하시지요. 어디든 안내하겠습니다. ”

다들 서먹한 사이라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는 어색했다. 그렇다고 실내에서 케인과 단둘이 있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기사라고는 하지만 로이드의 눈빛은 그렇게 무섭지 않았는데, 케인의 의욕 넘치는 힘 있는 시선에 아리스텔라는 오들오들 떨었다.

‘ 무, 무서워……. 왜 노려보는 거야? ’

남자, 그것도 거구의 기사다. 강렬한 눈빛을 마주한 것만으로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던 아리스텔라는 케인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쩔쩔매다가,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 저, 정원에……. ”

“ 정원에 나가고 싶으신 거로군요. 알겠습니다. ”

케인은 이불을 걷어내고 아리스텔라를 번쩍 안아들었다. 남자의 손이 제 몸을 감싸자 아리스텔라는 작게 숨을 삼켰으나 차마 내려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케인에게 안긴 채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가늘게 떨었다. 아리스텔라가 추워서 떠는 거라고 오해한 케인은 그녀를 더욱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여 꼭 안고는,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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